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화려했던 시절 어디로…홍콩 영화의 위기, 중국 영화의 몰락

주윤발 “중국 검열 多…영화 만들기 힘들어”
‘패왕별희’ 만든 영화 거장 첸 카이거 감독도
장진호 등 중국 공산당 찬양 영화 잇따라 제작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주윤발.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주윤발.

"말하기 어렵다. 지금 중국 쪽에서 검열이 많다. 여러 부서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한다. 홍콩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기 힘든 순간이다."

영원한 따거(大哥·큰 형님) 주윤발(67·저우룬파)이 지난 5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 말이다. 한국 영화의 자유로운 창작 환경에 부러움을 나타내면서 홍콩의 현실을 빗댄 것이다.

주윤발이 누구인가. "사랑해요! 밀키스!"로 생소한 맛의 탄산음료를 마시게 한 장본인이자, 그 시절 홍콩 영화의 추억과 연민을 고스란히 가진 인물이 아닌가. '영웅본색'(1987)이라는 희대의 누아르 영화로 남자의 의리와 형제애를 비극미 넘치게 느끼게 해준 배우였다. 그랬던 그가 홍콩 영화의 몰락을, 한국 영화의 부흥을 얘기하니 세월무상이다.

실제 중국에서는 소재나 내용에 대한 제약이 많은 편이다. 체제 비판은 고사하고 농촌의 어두운 면을 작품화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해 '먼지로 돌아가다'(감독 리루이쥔)라는 영화가 중국에서 개봉됐다. 시골 마을에 사는 가난한 중년의 남자가 장애를 가진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지만 참혹한 현실로 좌절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재가 '불량'하다 보니 투자할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감독이 사비를 털어 제작했다. 무명 배우에 홍보도 못했다. 그러나 입소문이 타면서 '대박'이 났다. 4억원의 제작비로 202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런데 자세한 설명도 없이 영화관에서 상영이 중단됐고, 스트리밍 서비스도 불허됐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유였다. 제작사는 항의 차원에서 이 영화를 유튜브에 무료로 배포했다. 'Return to Dust'로 검색하면 영어 자막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과거의 화려했던 홍콩 영화인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윤발의 경우 홍콩 민주화운동에서도 시위를 지지하는 발언을 해 '역시 따거!'라는 평을 받았지만, 다른 배우들은 그렇지 못했다. 좌절하는가, 영합하는가, 아니면 사라지는가.

첸 카이거 감독.
첸 카이거 감독.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 '지원군:웅병출격'의 한 장면.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 '지원군:웅병출격'의 한 장면.

중국의 자랑이던 5세대 감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 가장 안타까운 것이 첸 카이거 감독이다. 그는 '패왕별희'(1993)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중화권 최초였다.

'패왕별희'는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경극 배우의 슬픈 삶을 그린 걸작이다. 등장인물들의 한 맺힌 개인사와 예술혼을 문화 대혁명이라는 중국 공산당의 어두운 과거에 녹여 넣은 작품이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중국 영화 최고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 바로 첸 카이거다.

그런 그가 이제는 '장진호'(2021)와 같은 중국 공산당 찬양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에는 '장진호'의 속편인 '장진호의 수문교'를 공개하더니 올해에는 '지원군:웅병출격'을 제작해 중국 최대 연휴인 국경절(10월 1일)을 앞둔 9월 28일에 개봉했다.

'지원군:웅병출격'은 송골봉(쑹구펑) 전투를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전투지만, 2018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군부대를 시찰하며 이 전투를 언급했으니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 영화국이 탐을 낼 만도 하다.

이 영화는 장쯔이 등 200명의 출연진에 제작비로 무려 6억위안(한화 약 1천108억원)이 투입됐다. 그런데 이 영화의 흥행이 기대한 만큼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상영 7일 째인 지난 4일 기준 4억3천600만 위안(한화 약 805억원)의 매출에 그쳤다. 올해 '항미원조' 70주년을 강조하며 관영매체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홍보했음에도 말이다. '장진호'가 7일 만에 30억 위안(한화 약 5천600억원)의 매출을 올린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결과이다.

중국 공산당의 애국주의 영화에 대한 피로감이 커졌다는 분석도 있지만, 중국 관객의 "내용도 지루하고 '장진호'의 전투 묘사와 흡사한 것이 반복된다"는 감상평을 봤을 때 연출의 안일함도 예상해볼 수 있겠다. 천편일률적인 영웅 찬양에 무슨 신선함을 기대할 수 있을까.

'장진호'는 총 57억7천만 위안(한화 약 1조700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려 역대 중국 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장진호의 수문교'도 40억6천700만 위안(한화 약 7천528억원)으로 지난해 중국 영화 흥행 1위를 차지했다.

그동안 흥행 보증수표였던 중국 애국주의 영화의 몰락에서 첸 카이거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체제와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예술가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 인생의 영화, '패왕별희'를 생각하면, 마뜩찮은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김중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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