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현동 허준' 약사 김동언 씨 "덤으로 사는 인생…힘닿는 데까지 약국 지킬 것"

뇌경색, 암 수술 후에도 약국 지켜…'상전벽해' 속에서 약국 만은 그대로
"약국 손님 쾌차했을 때 가장 큰 기쁨…오랜 약국 손님 책임감 느껴"

대구 달서구 새화신약국을 운영하는 김동언 약사가 약국에서 약품을 정리하고 있다. 허현정 기자
대구 달서구 새화신약국을 운영하는 김동언 약사가 약국에서 약품을 정리하고 있다. 허현정 기자

대구 달서구 송현시장 인근 골목 어귀에서 '새화신약국'을 32년째 운영 중인 김동언(76) 씨. 점심시간도 따로 없고, 명절에도 쉬지 않고 약국을 지키는 그는 이 일대에서 '송현동 허준'으로 통한다.

김 씨 부부는 약국 건물 3층에 살면서 지금도 간혹 야간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 내려가 손님을 맞이한다. 수십 년간 평일과 토요일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요일엔 교회를 다녀온 후 오후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약국을 지켰는데, 몇 해 전 암 수술을 받으면서 일요일엔 문을 닫기로 했다.

영남대 약대를 졸업한 김 씨는 경주 안강에서 17년간 약국을 하다, 1992년 5월 지금 위치에 약국을 차렸다. 약국을 한 기간으로만 따지면 49년,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다.

"경주 안강에서 약국을 운영하다가 아이들이 크면서 이 자리로 오게 됐습니다. 경주에선 해수욕장으로 가는 국도변에서 약국을 했었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휴가도 없이 약국만 보며 살았습니다."

가족들이 다 모인 명절에도 김 씨만은 1층 약국에 내려가 자리를 지킨다. 닫힌 약국을 보고 돌아가는 손님을 생각하면 집에서 몸은 쉬고 있어도 마음은 천근만근이기 때문이다.

아내 최영애(71) 씨는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 가족 모두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멀리 온 김에 며칠 서울에서 자고 돌아가자고 했지만 '약국에 가야 한다'며 홀로 KTX를 타고 대구로 갔다"며 "약국을 지키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약국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며칠 여행을 가는 건 꿈도 못 꾸고, 집에서 설교 테이프를 듣는 것 외엔 특별한 취미도 없다"며 웃음을 지었다.

과거 한약 조제 자격을 취득했던 김 씨. 젊은 시절 지금보다 일을 더 많이 할 땐 한밤중에도 약국에 내려가 약을 달이곤 했다. 비염, 설사 등에 효과를 봤다며 경산, 청도 등에서 오랜 단골손님들이 약을 지으러 오던 일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내 최 씨 또한 약국 운영에 있어 든든한 조력자다. 김 씨의 식사를 챙기는 것은 물론 손님 응대 등 약국 곳곳에 최 씨의 손길이 닿지 않는 데가 없다.

최 씨는 "어느 날 미용실에 갔더니 손님들이 '송현동 허준 댁에서 오셨다'고 해서 '허준'이란 별명을 알게 됐다. 한 곳에서 오래 약국을 하다 보니 웬만한 손님들과 수십 년간 인연이 있다"며 "한밤중 아플 때, 급할 때 약을 건넨 오랜 세월이 있다 보니 주민들과도 자연스럽게 신뢰 관계가 두터운 것 같다"고 했다.

김 씨 약국 인근은 지난 30여 년 동안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겪었다. 큰 도로가 생기고, 대구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됐고, 인근엔 대형 빌딩도 하나둘 들어섰다. 그래도 김 씨의 약국 만은 위치도, 모습도 그대로다.

"1990년대 초반에만 해도 약국 바로 앞 길이 월배 쪽으로 가는 국도였습니다. 이 동네에선 가장 큰 도로였죠. 부모님 손을 잡고 약국에 오던 꼬마 손님들이 어른이 돼 어린 자녀와 다시 찾아오곤 합니다. '다른 곳은 다 바뀌어도 여긴 그대로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면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다고 느낍니다."

그런 김 씨에게도 위기가 온 적이 있었다. 과거 뇌경색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다, 2년 전 전립선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이후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고, 김 씨를 보는 가족들의 걱정도 커져갔다.

동서, 사위 등이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냐'며 약국을 접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삶의 당연한 일상이 돼버린 약국 일마저 놓으면 더 건강을 잃을 것 같다고 하자, 가족들이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아프고 난 후로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국 일도 예전보다 더 감사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랜 손님들을 위한 책임감도 갈수록 크게 느껴집니다. 언젠가 약국을 정리할 날이 오겠죠. 하지만 힘닿는 데까진 약국을 하고 싶습니다. 약국에 왔던 손님들이 쾌차한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큰 보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