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함재봉 칼럼] 친일파

함재봉 한국학술 연구원장
함재봉 한국학술 연구원장

'친일'은 한국말 중에서 가장 나쁜 말이다. '친일파'는 '매국노' 또는 '반역자'보다도 나쁜 말이다. 누군가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을 '친일파'라고 부른다. 그리고 누군가를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마치 '애국지사'라도 된 듯 우쭐해 한다.

반면 '친중'이나 '친러' '친영' '친독'은 지극히 중립적인 단어다. 특별히 긍정적인 어감도 부정적인 어감도 없다. 그러나 '친일', 즉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 일본을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조차도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 민족에 대한 반역을 저지르는 것과 동일시된다.

'친미'도 '친일'만큼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한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 이념과 정치체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들을 친근하게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부정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그리고 용어가 그런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분명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섞여 있다.

물론,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악감정만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을 배우고 따라가려는 경향 역시 뿌리 깊다.

사실, 한국 사람들만큼 일본 문화를 만끽하고 음식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도 드물다. 한국 사람만큼 '스시' '사시미' '사케' '우동' '오뎅'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도 없고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일본식 선술집 '이자카야'가 선풍적인 인기다.

코로나19 사태로 해외 관광이 끊기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2018년 일본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 숫자는 750만 명이 넘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일본은 한국 관광객들이 단연코 가장 선호하는 관광지로 다시 자리매김했다.

일본 만화, 소설, 영화, 음악은 한국 대중문화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에도 한국의 젊은이들은 '스크린' '논노' 등의 영화, 패션 잡지들을 탐독하고 이츠와 마유미의 '고이비토요'와 같은 노래들을 애청했다.

한국의 국영방송은 '요괴인간' '타이거마스크' '마징가제트' '은하철도 999' 등 많은 일본 만화들을 방영했다. 일본 만화라는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 간 스포츠 경기 중 한국 팬들이 한국 팀을 응원하고자 마징가제트 주제가를 부르면 일본 팀을 응원하는 측에서도 놀라면서 마징가제트 주제가를 일본말로 불러 서로 놀랐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들도 있었다.

'BTS'나 '블랙핑크' 같은 세계적인 보이밴드, 걸그룹도 일본의 대중음악계가 발명한 상품들을 한 차원 높게 가공한 상품들이다. 한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전 가장 먼저 그 가능성을 확인한 것도 일본 시장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사실은 일본을 친근하게 생각하고 모델로 따르는 '친일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사안에 따라 '반일' 코드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가격에 비해 품질이나 모양이 월등해서 즐겨 입던 옷도 일본 브랜드라고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일본 차를 타는 것도 눈치를 보아야 하고 일본 제품의 광고에 출연한 연예인은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근대 일본에 대해 막연히 갖고 있는 생각들은 대부분 틀렸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 특유의 '일본 콤플렉스'가 빚어낸 현실 도피성 왜곡과 공상의 결과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과거에 일어난 특정 사건에 대한 생각, 감정, 기억, 열등의식이 과하여 심리적인 통합과 안정을 저해하고 자아 형성에 부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콤플렉스'라고 한다. 일본은 한국 사람들의 '콤플렉스'다.

한국 사람의 올바른 자아 형성을 위해서는 이런 '일본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이 일본과 본격적으로 조우하는 근대사를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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