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예술기행] 깊고 푸른 호수를 가진 백야의 땅…이르쿠츠크·바이칼

혁명 실패한 장교들 시베리아 유배…출소 후 이르쿠츠크 정착 문명 전파
귀족 출신 지식인들 의해 도시 번성…교회·성당마다 그려진 이콘화 눈길

바이칼호수
바이칼호수

2014년 6월, 여름이 시작되었지만 시베리아 중심도시답게 이르쿠츠크(Irkutsk)는 서늘했다. 돌이켜보면 그 체감온도에는 우랄산맥, 동토(凍土), 죄수, 유형지,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 가혹한 강제노역, 굶주림과 고문, 굴라크 등의 의미소도 한몫 거들었을듯. 그러다 문득 강진에서의 정약용과 제주도의 김정희를 연상케 하는 데카브리스트(Decembrist, 1825년 12월 차르의 전제군주청 철폐를 기치로 혁명을 일으킨 청년귀족 장교들, 데카브리는 러시아어로 12월)를 떠올린다.

데카브리스트 혁명(바실리 표도로비치 팀 作)
데카브리스트 혁명(바실리 표도로비치 팀 作)

◆이르쿠츠크의 백야 그리고 데카브리스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베리아로 유배된 귀족 장교 데카브리스트들은 고문과 노역, 굶주림과 추위, 전염병과 죽음에 피폐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정신적 굶주림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책도 반입되지 않고 글도 쓸 수 없었던 그곳에서 낮의 강제노역을 마치고 밤에 각자의 지식을 강의해주는 감옥아카데미를 열었다.

러시아문학사, 물리학, 화학, 의학, 역사, 수학, 생물학, 외국어 등 말 그대로 서로의 전문지식을 함께 나누는 콜로퀴엄으로 시베리아 수용소의 긴 밤을 불꽃으로 타오르게 했다. 그에 동조한 많은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또한 재가를 해도 좋다는 차르의 권고를 귀족 신분마저 버린 채 단호히 뿌리치고 남편들을 좇아 시베리아로 갔다.

이르쿠츠크 시내.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린다.
이르쿠츠크 시내.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린다.

수용소 담벼락에 오두막을 짓고 언 땅을 파고 얼음물에 빨래를 하며 데카브리스트들과 갖은 고난을 함께 겪었다. 이윽고 20여 년의 형을 마친 남편들이 출소하자 주거 이전을 제한하는 당국의 감시 아래 이르쿠츠크에 서유럽식 집을 짓고 거실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족이 보내온 피아노를 놓고 예전의 생활처럼 음악회, 토론회를 열며 정착하기 시작했다.

강제수용소와 목조가옥만 즐비하던 이츠쿠르츠가 점차 변모하기 시작했다. 귀족 출신의 데카브리스트들은 자신들의 교육 수준에 맞춘 학교, 도서관, 보건소를 지어 원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책을 빌려주며 무상치료와 새로운 농사기술을 전수했다. 시베리아 변방의 도시는 대도시 못지않게 점차 번성해갔다. 혁명적 '점잖은 유배지식인'들과 유럽에서 가장 늦게까지 존속한 봉건제에 짓눌려 문명에 고립되었던 원주민들의 유대는 갈수록 끈끈해졌고 이르쿠츠크는 그렇게 '시베리아의 파리'가 되어갔다.

이렇게 이르쿠츠크엔 19세기 개혁과 자유를 목 놓아 외쳤던 실패한 혁명가들의 열정과 마리아 발콘스카야를 비롯한 귀족부인 열여덟 명의 지고지순한 순애보, 그 가열찬 정신의 기록들이 당시 그들이 수혈한 프랑스식 귀족생활상과 함께 온 거리와 데카브리스트박물관, 발콘스키 공작의 집에 고스란하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속 주인공이 발콘스키이며, 도스토옙스키가 1849년 페트라셉스키봉기 가담으로 옴스크에서 4년간 복역했고, 체홉이 시베리아 일대를 돌며 르포를 썼던 것도 데카브리스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르쿠츠크 카잔성당. 좌우대칭으로 러시아의 수호신이었던
이르쿠츠크 카잔성당. 좌우대칭으로 러시아의 수호신이었던 "카잔 성모마리아 이콘"의 그림이 있다.

여름 이르쿠츠크는 밤 11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았다. 백야(白夜)였다. 바이칼에서 유일한 물줄기로 흘러든 앙가라 강은 환했고 구 소련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동상이 세워진 강변엔 밤 늦게까지 산책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묘와 북극해를 세 번 탐험한 시베리아의 콜럼버스 쉘레호프의 묘가 있는 즈나멘스키수도원은 장엄했다. 황금색 돔과 마찬가지로 수도원 내부를 가득 채운 금색 테두리를 한 이콘화 앞에서 엎드려 간절하게 기도하던 노파의 그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키로프광장의 스파스카야교회, 폴란드가톨릭성당, 신의 출현교회에도 신의 존재를 강렬하고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콘화가 가득했다. 광장에는 참전 군인들을 기리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다소 폭력적인 건축 형태의 이르쿠츠그 주청사와 시청사가 우뚝하다. 시베리아횡단열차 개통 기념으로 세워졌다는 알렉산더 3세의 입상이 오벨리스크로 바뀌었다가 소련 붕괴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웅장하게 서 있다. 레닌 동상도 있었던 듯한데.

세계 최대 담수호인 바이칼 호수.어릴 적 춘원 이광수의 '유정'을 읽으며 소설적 공간 스케일에 감탄하며 이름을 되뇌던 곳이다.
세계 최대 담수호인 바이칼 호수.어릴 적 춘원 이광수의 '유정'을 읽으며 소설적 공간 스케일에 감탄하며 이름을 되뇌던 곳이다.

◆바이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시원(始原), 시베리아의 푸른 눈

바이칼은 서늘한 먹구름과 거친 바람으로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르쿠츠크에서 290㎞, 광활한 시베리아벌판과 스텝을 5시간 달려 도착한 선착장은 물굽이가 파도처럼 출렁대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에도 저 궂은 날씨로 통행이 어려웠단다. 세계 최대 담수호, 길이 636㎞, 수심 1742m, 과연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시원(始原), 가장 깊은 심연(深淵)이라는 말이 수사(修辭)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기온이 급강하해 모두 가방을 열고 두꺼운 옷을 꺼내 입으며 선착장에서 날이 눅어지기를 기다린다.

바이칼, 어릴 적 춘원 이광수의 '유정'을 읽으며 소설적 공간 스케일에 감탄하며 이름을 되뇌던 곳이다. '최석으로부터 최후의 편지가 온 지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는 바이칼호수에 몸을 던져버렸는가. 또는 시베리아 어느 으슥한 곳에 숨어서 세상을 잊고 있는가. 또 최석의 뒤를 따라간다고 북으로 한정 없이 가 버린 남정임도 어찌 되었는지. … 나는 이 글을 다 쓰고 나서는 바이칼 호숫가에 최석과 남정임 두 사람의 자취를 찾아서 떠나 보려고 한다.' 다행히 바람이 잦아져 나는 서둘러 모자를 귀밑까지 푹 눌러쓴 채 알혼섬행 바지선에 올랐다.

알혼섬은 제주도 면적의 반 정도로 바이칼 22개의 섬 중 가장 크다고 한다. 칭기스칸이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불칸바위.
알혼섬은 제주도 면적의 반 정도로 바이칼 22개의 섬 중 가장 크다고 한다. 칭기스칸이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불칸바위.

알혼섬은 구불구불한 흰 길, 장난감 상자 같은 숙소, 낮은 구릉들, 풀을 뜯는 소들과 목책 아래 핀 자잘한 풀꽃들을 나직하게 거느린 아름다운 곳이었다. 제주도 면적의 반 정도로 바이칼 22개의 섬 중 가장 크다고 한다. 오물(Omul)이란 이름을 가진 수많은 바이칼의 어종들로 어부들은 부유하고 물범과 곰, 사슴도 가끔 출몰해 사냥도 해야 하는 청정지역이다. 말을 타거나 하릴없이 풀밭에 앉아 하늘 한 번, 바이칼 한 번 바라보던 이들이 하나, 둘 유르트(몽골의 게르, 천막집)로 모여들어 평화롭게 일몰과 백야를 맞이하는 평화로운 곳으로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기도 한다.

몽골계 부리야트족은 알혼섬을 몽골의 시원지, 세계 샤먼들의 성지라 주장한다. 칭기스칸이 묻혔다는 전설의 불칸바위는 성스러웠고 주변엔 색색 자아라(소원을 비는 천) 솟대들이 늘어서 있었다. 부족 일부가 이동해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 역사에 기술되었다는데, 우리와의 생김새, 미토콘트리아 DNA, 서낭당, 솟대, 아기 탯줄을 문지방 아래 묻는 토속전통, 선녀와 나뭇꾼 설화, 강강술래와 흡사한 춤 그리고 아바이 게세르(단군신화와 흡사한 몽골 서사시), 탱그리(단군)라는 말 등으로 보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칭기스칸이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불칸바위 주변엔 색색 자아라(소원을 비는 천) 솟대들이 늘어서 있었다.
칭기스칸이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불칸바위 주변엔 색색 자아라(소원을 비는 천) 솟대들이 늘어서 있었다.

바이칼의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샤먼이 외치는 소-옥(so-ok,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손에 든 생수병 레벨이 바이칼의 전설(Legend of Baikal)이다. 모스크바행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길에 민속박물관 딸찌에 들렀다.

자작나무 숲속에 17세기부터의 러시아와 부리야트족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나무껍질로 만든 고깔모양의 움집, 가축우리, 풍장문화, 요새, 개썰매, 베틀 등 매우 흥미롭게 재현해 두었다.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바라본 시베리아 벌판의 자작나무들이 작고 푸른 나뭇잎을 공기의 정령인 양 흔든다. 아, 그러고보니 소설 '유정'의 화자는 최석과 남정임을 시베리아에서 만났던가. 결말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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