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우리역사 되찾기] <2>총독부가 만든 요상한 역사교과서

▶조선총독부가 창안한 '반도사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에 자신을 식민사학자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가 식민사학을 추종한다는 비판은 지금도 여전히 거세다. 식민사학은 우리역사의 전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틀을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큰 틀을 인식하는 것이 식민사학 극복에 중요하다.

일본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가 만든 식민사학의 큰 틀은 '반도사관'이다. 일제는 1910년 한국 강점 직후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반도사》 편찬에 나섰다. 한국사의 강역을 '반도(半島)'라는 틀에 가두어 놓고 편찬을 시작했다. 지금도 한국 강단사학계에서 영원한 스승으로 추종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편찬을 주도했다. 한국사의 무대는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쳐 전개된 광활한 역사인데, 《조선반도사》는 대륙과 해양을 모두 삭제해서 반도로 축소하고 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이라는 중국 한(漢)의 식민지가 지배했고, 남쪽은 야마토왜(大和倭)의 식민지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고 서술했다. 북쪽이나 남쪽 모두 식민지로 시작한 조선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은 한국사의 당연한 귀결이니 '독립운동' 따위는 하지 말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1919년 전 국민이 들고일어나는 3·1혁명이 일어나자 당황한 일제는 어린 학생 때부터 황국사관을 조직적으로 주입시키지 않으면 계속 통치가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920년에 '임시교과서조사위원회'를 설치했고, 《심상(尋常) 소학국사》 상·하권을 만들어 가르쳤다. '심상'은 얌전하다는 뜻인데 일제는 메이지(明治) 33년(1900)년부터 초등학교를 심상소학교라고 부르다가 소화(昭和) 16년(1941)에 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의 구조

일제는 《심상소학국사》를 편찬했는데 국사는 물론 일본사를 뜻한다. 조선총독부는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아동용)》 교재를 편찬했는데 '국사보충교재'란 국사인 일본사에 한국사도 부수적으로 가르치겠다는 뜻이었다. 《심상소학국사》란 '대일본제국사'를 뜻하고,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는 '대일본제국사의 한국지방사'를 뜻하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가 만든 이 구조가 국정, 검인정을 막론하고 현재까지 관철되면서 '식민사학 비판'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는 '1. 상고시대의 조선반도'로 시작한다. 이 단원은 세 개 항목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북부조선/남부조선/고대 일·한(日韓)의 교류'가 그것이다. '북부조선' 항목은 다시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란 소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는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역사서에 지워버리고 중국에서 왔다는 '기자조선'부터 시작하고 있다. 현재 한국 역사학계가 편찬한 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은 물론 기자조선도 삭제한 '위만조선'부터 역사적 사실로 삼아 교과서에 수록하고 있다. 기자조선을 삭제한 이유는 우리의 주체적 역사관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제 식민사학이 이후 기자조선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기자조선을 그대로 둘 경우 한국사의 종주권은 중국에 있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기자조선을 삭제하고 '위만조선'부터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겼는데, 현재의 한국사교과서는 이런 논리를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남부조선' 항목에서는 '한(韓) 종족' 하나만을 다루고 있다. 한 종족이란 삼한을 가리킨다. 조선총독부는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에서 한국사를 반도사로 가두고 북부는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 있었고, 그 남부는 '삼한'이 있었다는 구도를 제시했는데, 광복 8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한국역사학계는 이 구도를 추종하고 있고, 국정, 검인정을 막론한 모든 한국사 교과서가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북부조선의 내용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는 '기자조선'에 대해서 "옛날에 반도의 북부를 조선이라고 불렀으며, 중국에서 기자(箕子)가 와서 그 땅에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고조선은 '반도의 북부'에 있었는 작은 나라였는데 중국에서 기자가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가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단군 조선이 만주를 차지했고, 그 적통은 만주에 있던 부여가 계승했다고 서술했음에도 이를 부정하고 고조선은 한반도 북쪽의 소국이라고 왜곡했다.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는 '위만조선'에 대해서 "그 후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이 지방에 와서 기자의 후계자인 준(準)을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았다.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시기에,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 서술했다. 위만이 기자에게 반도 북부 지역의 조선을 빼앗았다가 한 무제가 이를 멸망시키고 한 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는 '한사군'에 대해서 "이로부터 수백 년 동안 반도의 대부분은 중국의 영지(領地)가 되었다. 한(漢)이라는 것은 그때의 중국 국명(國名)으로서, 무제가 조선을 취한 것은 우리의 가이쿠와(開化) 천황 [제9대] 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반도 북부에는 수백 년 동안 중국의 영지인 한사군의 땅이었다는 주장인데, 이것이 현재까지 한국 역사학계에서 절대 부정하면 안 되는 정설로 행세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를 통해서 제시한 '한사군=한반도 북부설'을 부정하면 자칭 "식민사학을 극복했다"고 자화자찬하는 한국 역사학자들에게 '사이비역사학'이니 '유사역사학'이니 하는 비난에 시달리게 된다.

▶무서운 아이들과 한사군 한반도 북부설이라는 교리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논리는 '한사군=한반도 북부설'로서 북한 강역은 고대 중국의 강역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역사학계는 서론에서는 "식민사학을 극복했다"고 자화자찬하고 나서 본론과 결론에서는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것처럼 서론에서는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한다"고 비판하고 나서 본론과 결론에서는 동북공정을 추종하는데, 그중 하나가 '한사군=한반도북부설'이다. 2016년 《역사비평》이라는 계간지에서 〈한국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이라는 특집을 두 차례 게재했는데, 집필자들은 '젊은역사학자모임'이라는 나이를 강조했다. 이들이 '젊은' 나이를 강조한 것은 그 주장하는 바가 '젊음'과는 전혀 배치되는 케케묵은 조선총독부 학설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국 사회의 놀라운 좌우합작이 가동되었다. 보수언론에서 이들을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라고 띄워주고 자칭 진보언론들은 물론 중도를 자임하는 언론들의 학술담당기자들이 일제히 나서서 기존학설을 무너뜨린 대단한 학자들이 등장한 것처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란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에서 주장한 "이로부터 수백 년 동안 반도의 대부분은 중국의 영지(領地)가 되었다."는 내용의 반복에 불과했다.

▶낙랑군=평양설에 목숨 거는 학자들

2016년 현충일을 하루 앞둔 6월 5일 《한국일보》의 조태성 기자는 이 '무서운 아이들'과 대담하면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국고 47억 원을 역사학자 80여명에게 주어서 《동북아역사지도》를 만들었는데,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을 북한강역으로 그려놓은 것은 물론 '독도'를 끝까지 그려오지 않아서 비판을 받았는데, '낙랑군=평양설'에 대한 '무서운 아이들'의 견해를 물은 것이다. 무서운 아이들 중 한 명인 안정준이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답하자 김재원은 "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라고 맞장구쳤다. 그러자 다른 무서운 아이 기경량이 "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한국일보》, 2017. 6.5)"라고 결론 내렸다. '무서운 아이들'은 프랑스 장 콕토의 소설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무서운 아이들)〉에서 나온 말로 기성세대가 만든 개념과 질서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을 뜻하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따르는 나이만 '젊은' 학자들이 이런 닉네임을 받았다.

이들은 과연 한사군이 북한지역에 있었다는 중국 고대 사료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지면관계상 하나의 사료만 제시하면 《후한서(後漢書)》 〈최인(崔駰)열전〉에는 최인을 장잠현(長岑縣)의 현령으로 보냈다는 기사가 나온다. 최인은 후한의 화제(和帝:재위 89~105) 때 인물인데 그 주석에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長岑縣 屬樂浪郡 其地在遼東]"라고 말하고 있다. 후한 때 낙랑군 산하에 18개의 현들이 있었고, 장잠현은 그 중의 하나인데 그 위치는 고대 요동(遼東)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반도 동쪽이 아니라 하북성 일대를 뜻한다. 한사군의 위치를 가지고 북한강역을 중국사의 강역이라고 우기는 동북공정 논리를 깰 수 있는 중국 고대사료는 많다. 그러나 이런 사료를 인용하면 한국 역사학계는 '사이비' '유사' 역사학이라고 비난하고, 식민사학에 가스라이팅 당했거나 식민사학 카르텔의 한 축이거나 한 언론의 학술담당 기자들은 그대로 받아쓴다. 아직도 한국인들의 역사관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가 지배하고 있다는 반증이니 이 나라와 이 역사를 되찾기 위해 생애를 바치신 순국선열, 애국지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사진설명)

1, 중국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한반도 북부의 낙랑군과 실제의 낙랑군(왼쪽 하북성) 하북성 노룡현에 처음 설치된 낙랑군은 나중에 북경으로 옮겨졌다.

2. 동북아역사재단에서 2013년도 영문으로 출간한 [한국고대사의 한나라 영지들(한사군)]표지. 한사군을 한(漢)의 영지로 보는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3.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했다는 내용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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