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의 창] 조국 독립 위해 목숨 바친 민족의 스승 도산 안창호

10일 서울 도산안창호기념관 강당에서 열린 도산 안창호선생 서거 제86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0일 서울 도산안창호기념관 강당에서 열린 도산 안창호선생 서거 제86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 왔다."

-도산 안창호

◆독립투사 안창호의 진실

매일신문 1월 23일자 25면 송철의 회고록을 인용한 '독립투사 안창호의 또 다른 얼굴' 제하의 '역사의 창'에 대해 대구경북흥사단은 아래와 같은 반박문을 보내왔다.

'역사의 창'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는 황제가 보낸 구호금을 횡령하고, 동포에게 폭력을 휘두른 파렴치한 인물이며, 흥사단은 독립운동가를 처단하기 위한 암살단으로 묘사돼 있다.

대구경북흥사단(대표 김상경)은 이같은 내용이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흥사단과 그 단우들의 명예를 크게 훼손하는 것이며, 나아가 신성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선열을 욕보이는 처사다가 아닐 수 없다며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고 독자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반론의 글을 올린다고 밝혀왔다.

◆안창호는 황제의 구호금을 착복했나?

1906년 4월 18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20여 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500여 명이 사망한 큰 재난이었다. 이 지진으로 교포 중 사망자는 없었으나, 공립협회의 회관이 소실되고 53명의 교포가 재해를 당했다.

대한매일신보는 5월 24일 자 신문에 피해 규모가 과장된 통감부의 자료를 인용해서 재미동포 중 사망자가 24명, 피상자가 84명이라고 보도하였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구휼금 4천환을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를 통해 재난을 당한 동포들에게 전하려 한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를 접한 공립협회는 긴급히 회의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고, 동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일본 영사를 통해서 전해지는 구휼금의 수령을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공립협회는 일찍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배일하기로 공결한 바가 있으며, 일본 영사를 경유해서 구휼금을 전하는 것은 장차 한국 동포를 일본 영사가 보호하겠다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므로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 영사를 경유하는 구휼금은 절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결의 내용은 1906년 6월 24일에 공립협회 총회장 송석준 명의의 통고문으로 발표하고(6월 30일 자 공립신보에 게재), 동시에 그 등본을 대한매일신보사에도 보냈다. 황실에서도 공립협회의 이 결정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구휼금을 현지 미국인을 통해서 전달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한인 감리교 예배당 전도사 문경호가 이미 일본 영사로부터 일화 500원과 쌀 13부대, 간장 3통을 수령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격분한 한인 동포 50여 명이 문경호를 불러 일본 영사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사실을 추궁하였다.

그 결과 일본 영사로부터 받은 금품이 동포나 예배당을 위해 쓰이지 않았음을 확인하였고, 예배당의 전도사는 곧 방화중으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사건의 경위는 공립신보 6월 30일 자와 7월 14일 자에 소상하게 보도되었고, 1959년에 김원용이 저술한 '재미한인50년사'(p.57~58, p.314~317)에도 기록되어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역사의 창'은 '일본 영사를 통해 전달한 고종 황제의 구휼금 3,000원을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안창호가 착복하였고, 이에 대해서 일본영사관과 미국이민국은 공립협회와 안창호를 엄중하게 문책하였으며, 이 일을 일본영사관에 문의한 문경호 전도사를 피범벅이 되도록 폭행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사실의 왜곡이다. 정작 일본 영사로부터 금품을 수령한 것은 문경호인데, 안창호가 황제의 구휼금을 횡령하고 문경호를 폭행했다고 호도하는 것은 단순한 오류나 왜곡을 넘어 조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안창호는 문경호의 구휼금 수령 건에 대해서는 깊이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공립협회 총회장은 송석준으로 교체되었고, 안창호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면서 로스앤젤레스 지방총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공립협회도 이재민을 돕고 공립협회 회관을 재건하는 이외에 이 사건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현지 교민들이 문경호 건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공립협회에 문의하였을 때 협회는 '협회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니 현지 교민들이 의논해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회신하였다. 공립회관은 미국인 선교사 낙글린 씨를 통해서 전달된 황제의 구휼금과 본국 3개 신문사(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가 모금하여 미국인 의사 두류 씨를 통해서 전달된 구휼금, 그리고 현지 동포들이 모금한 의연금의 일부를 각각 지원받아 오클랜드에 재건하고 그해 8월 10일부터 업무를 재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왼쪽 앞줄 가운데가 도산 안창호선생 (1919.10.11)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왼쪽 앞줄 가운데가 도산 안창호선생 (1919.10.11)

◆안창호는 지방색을 조장한 민족분열주의자인가?

기사에서는 안창호를 지방색을 조장한 분열주의자로 매도하고 있다. 조선 500년 동안 서북인들이 차별을 받았던 불행의 역사를 끊어내고 서북인들이 정권을 잡아 천하를 호령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안창호만큼 지방색을 걱정하고,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지도자도 드물다. 수많은 단체를 조직해서 관리하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고루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독립운동의 노선을 두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갈등하는 양상을 보면서 개인의 신념과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대동단결하자고 간절하게 호소하였다.

대공주의의 주창, 국민대표회의 소집, 민족유일당 결성 등은 대동단결하고자 노력한 안창호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신민회를 결성할 때도 당시 중요한 여러 집단의 애국 세력들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흥사단을 창립하면서 8도의 대표를 선임해 창립위원으로 삼은 것도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지역감정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안창호를 지방색을 조장하고 서북인에 의한 정권 쟁취에만 혈안이 된 민족 분열자로 매도하는 것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다양한 갈래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뭉치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던 선열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어떤이(외국식자)가 황제가 하사한 구휼금 3,000원과 미주에서 거둔 구제금 800원을 공립협회와 안창호가 받아 착복하였다고 허무맹랑한 말로 일미신문에 투고한 행위를 성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떤이(외국식자)가 황제가 하사한 구휼금 3,000원과 미주에서 거둔 구제금 800원을 공립협회와 안창호가 받아 착복하였다고 허무맹랑한 말로 일미신문에 투고한 행위를 성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흥사단은 독립운동가를 처단하는 암살단이 아니다

흥사단은 민족의 자주적 독립과 항구적 번영을 위해 안창호가 8도 대표와 함께 1913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흥사단의 목적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건전한 인격자가 되고, 온 국민이 민성을 혁신하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한때는 젊은 청년 단우들을 중심으로 흥사단을 독립운동의 실행단체(당시의 용어로는 혁명단체)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했지만, 안창호는 독립운동의 신성성과 민족 사회의 항구성에 비추어 혁명조직과 함께 인재양성조직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젊은 단우들을 설득하였다.

흥사단은 창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10여 년 동안 꾸준히 수련에 정진하여 18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으며, 해방 후의 국가건설과 산업화, 민주화를 위해 각 분야에서 꾸준히 노력해 왔다. 현재에도 국내 25개 지부와 해외 12개 지부, 30여 개의 부설기관을 운영하면서 청소년교육운동, 투명사회운동,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의 창'은 송철의 회고록을 인용하여 안창호가 '흥사단 암살대'를 조직, 국경의 요로에 진을 치고 있다가 동포를 검문해서 서북 사람, 안창호 계열의 사람이 아니면 살해했다는 것이다. 안창호가 조직했다는 암살단의 존재는 장지연이 쓴 해조신문의 논설을 통해서 알려졌다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는 살해의 위협을 느껴 상해로 도망간 장지연을 끝까지 따라가 붙잡아서 일본 경찰에 넘겼다고 하였다. 송철의 회고록에 기록된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날조된 허구이다.

해조신문은 정순만(鄭淳萬, 1876~1911)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08년 2월 26일에 창간하여 1908년 5월 26일에 7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된 교민 대상의 일간신문이다. 장지연은 주필로 초빙되어 3월 3일부터 폐간할 때까지 논설을 집필하였다.

흥사단은 1913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되었으니, 장지연이 해조신문에 논설을 집필하던 시기는 흥사단이 창립되기 5년 전이다. 5년이나 후에 창립될 흥사단이 이 시기에 암살단을 조직하여 국경 요로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도망간 장지연을 상해까지 따라가 붙잡아서 일본 경찰에게 넘겼다는 것은 황당한 억설이며 근거 없는 조작이다.

장지연은 해조신문 5월 1일자(55호)에 발표한 '일반 동포에게 경고함'이라는 논설에서 '명확한 근거 없이 동포를 친일 분자로 몰아서 처단하는 일은 심히 부당한 일이며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임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데, 안창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지극히 교훈적인 이 논설을 접하고서 앞뒤 가리지 않고 '동포를 친일분자로 몰아서 처단하는 짓'이 모두 안창호의 소행이라고 단정한 것으로 보인다.

◇ 흥사단에 대한 본사 입장문

대구경북흥사단(대표 김상경)은 매일신문 1월 23일자 25면 '김용삼의 근대사: 독립투사 안창 호의 또 다른 얼굴' 이라는 외부글(역사의창)에 대해 본사에 유감문을 전달해왔습니다. 이에 아래와 같이 본사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먼저 110년의 역사를 갖고 민족통일운동, 투명사회운동 등을 위해 애쓰시는 흥사단과 민족의 스승 안창호 선생에 대해 외부글이지만 본지의 의사와 달리 상처를 드린점, 또 안창호 선생의 명예를 훼손하게 된 점에 대해 깊은 유감표명과 함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본지는 이번 일을 계기로 흥사단의 창립정신과 활동상을 더욱 되새기고 흥사단의 지향하는 바가 민족과 세계인들에게 깊이 용해될 될수 있도록 흥사단 추진 업무에 대한 홍보와 협력에 최선의 노력을 할 것임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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