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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훈 칼럼] ‘총선 민심’이라는 의회 독재 가짜 면허증

정경훈 논설주간
정경훈 논설주간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서문의 첫 문장이다. 이를 22대 총선 이후 한국 정치 상황에 대입하면 이렇게 패러디할 수 있겠다. '하나의 유령이 여의도 하늘을 배회하고 있다. 총선 민심이라는 유령이'.

더불어민주당 등 범야권은 총선 압승의 여세를 몰아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을 압박하는 자신들의 언행의 정당성을 '총선 민심'에서 끌어낸다. 국회 상임위원장 독식도, 해병대 채 상병 특검·김건희 특검 추진도, 양곡법 개정안·민주유공자법 국회 통과도 '총선 민심의 명령'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이를 거부하면 '국민과 역사에 대한 거역'이라고 거품을 문다.

이런 정신 구조에서는 현대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삼권분립'은 개나 물어갈 말라비틀어진 뼈다귀에 지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위헌적"이며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단적인 예다. 대통령 거부권(법률안 재의 요구권)은 헌법(제53조 2항)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이다. 이게 어떻게 '위헌적'인지 모르겠다. 대통령 거부권은 1987년 개헌 때 '대통령 국회 해산권'의 삭제에 따른 행정부의 입법부 견제 기능 약화를 보완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마저 없으면 현행 헌법하에서는 대통령과 행정부는 입법부, 구체적으로는 다수당의 집행부에 지나지 않는다.

야당이 추구하는 것은 이런 입법부 시녀로서의 행정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회 독재'이다. 그런데 이는 '상식'과 배치된다. '국민'의 대표가 모인 의회가 어떻게 독재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당연한 것 같지만 근거 없는 맹신일 뿐이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보여준 입법 폭주는 이를 잘 입증한다. 22대 총선에서도 175석을 얻었으니 다음 국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의회 독재'는 '국민 다수의 집단지성(集團知性·collective intelligence)은 정의롭다'는 독단의 소산이다. 이는 참으로 위험하다. '정의로워서 다수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다수가 결정했기 때문에 정의롭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알렉시스 토크빌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잠복해 있다고 경고한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논리 구조에서는 다수의 결정은 그 어떤 것도 정의롭고 무오류(無誤謬)이다. 민주당의 '총선 민심' 타령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생각의 연원은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따르면 프랑스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초미의 관심은 국가 권력의 제한이 아니라 '권력이 누구에게서 나오느냐'였다. 그들은 한 사람의 왕이나 소수의 귀족에게 집중된 정치권력을 국민의 집합적 의지로 대체하면 인간의 '자유'는 자동적으로 확보되며, 국민의 집합적 의지는 의회의 다수의 의지를 통해 수렴된다고 봤다. 그 논리적 귀결은 무제한적 의회 권력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의회는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곳이니 의회의 권력을 제한할 필요도 없고 제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하에서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정치권력에서 자유로운 사법부 독립이라는 당위도 실상은 허구이다. 법관은 원칙적으로 독립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판결은 의회가 제정하고 의회가 필요한 경우 언제든 변경할 수 있는 법을 기초로 이뤄진다. 물론 위헌 심판 같은 무분별한 입법에 대한 견제 장치가 있긴 하다. 하지만 헌법도 의회 다수에 의해 바뀔 수 있다.

그만큼 현대 민주주의에서 의회 권력은 막강하다. 문재인 정권 이후 지금까지 한국 국회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 권력의 원천은 '국민의 뜻'이다. 그런데 그 국민의 뜻은 어떻게 확인하나? 말도 안 되는 법을 밀어붙이고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을 탄핵하라는 것이 총선 승리에 내포된 민심의 명령이라면 똑같은 논리로 그런 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역시 대선 승리에 내포된 민심의 명령이다. 어느 민심이 정확한 민심일까? 개개인의 국민은 있어도 100% 지지를 받지 않은 다음에야 전체로서의 국민과 국민의 뜻은 없거나 최소한 확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의 '총선 민심'은 왜곡 과장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추상적인 가공물이자 의회 독재 합리화를 위한 가짜 면허증이다. '국민의 뜻'을 참칭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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