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55> 마초의 악기, 하모니카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하모니카. 출처-클립아트코리아
하모니카. 출처-클립아트코리아

대부분의 관악기들은 날숨을 불어넣어 소리를 내지만 하모니카는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하듯 소리를 낸다. 하모니카는 공간 구획된 칸으로 이루어져 음악의 시간성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하모니카 소리는 도시적인 세련미와 거리가 먼 B급 감성을 자극한다. 옛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는 이런 동요가 실려 있었다. "우리 아기 불고 노는 하모니카는 옥수수를 가지고서 만들었어요. 옥수수 알 길게 두 줄 남겨 가지고 우리 아기 하모니카 불고 있어요." 가사는 하모니카도 사기 어려웠던 당대의 초라하고 열악한 환경을 그대로 담아낸다. 하모니카는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는 동네의 비좁은 하숙방과 포플러가 줄지어 선 병영의 내무반, 시골의 어머니가 끓여주던 청국장 맛 같은 헐벗은 시대의 풍경과 냄새와 맛을 골고루 불러온다.

하모니카는 남자들의 악기였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피리가 햄릿의 악기이고 류트는 오필리아의 악기이듯, 소리가 큰 타악기와 관악기가 남성의 악기이고 플루트와 하프가 여성의 악기라는 통념이 있듯 하모니카는 큰 나무 아래 기대거나 목책에 걸터앉아 상의나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내 불곤 하던 남자의 악기였다. 하모니카는 고독한 남자의 낭만과 향수, 페이소스를 표현하는 악기였다.

서부 영화에서는 거친 야성과 토속성을 풍기는 마초들의 악기였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 'Once upon a time in the West'(1968)에서 하모니카는 극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하모니카를 목에 걸고 다니는 주인공 찰스 브론슨은 이름 대신 하모니카로 불린다. OST 중 'Man with a Hamonica'는 음산하고 반복적인 울림으로 생사가 순간에 달린 총잡이들의 짧고 장렬한 삶과 죽음을 들려준다. 하모니카에서 울려나오는 단조의 멜로디는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의 헐떡임 같기도 하고 울먹임 같기도 하다. 하모니카 맨은 긴 망토를 걸친 악당들을 일망타진하고 어디론가 표표히 떠나간다. 엔리오 모리코네는 이탈리아식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영화음악을 시작했다. 서사에서 중요한 복선이기도 하지만, 황량한 서부와 복수의 집념을 불태우는 고독한 총잡이의 삶을 들려주기 위한 악기로는 하모니카가 적격이었다.

하모니카는 여성의 사회 참여가 제한적이던 잿빛 시대를 보여준다. 그 시대의 여자는 군에 갈 일도 객지에서 유학할 일도 없었으며 두근거리는 활극의 주인공이 될 일은 더욱 없었다. 1970년대에는 시각장애인 가수가 애용했고 1980년대에 와서는 캠퍼스의 멋과 낭만을 발산하는 악기로, 1990년대 이후에는 김광석, 윤도현 같은 가수들이 기타와 함께 수준급의 하모니카 실력으로 대중의 감성을 장악했다. 이들 모두 남성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모니카라는 악기에 있어서 여성은 여전히 객체이며 관객에 불과한 것 같다.

하모니카 연주자들이 선호하는 노래는 동요와 가요, 외국 민요 등이다 그 중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섬집 아기'가 가장 많이 불려진다. 이 노래의 음색에는 외딴 섬의 바람과 파도 소리가 묻어 있다. 애잔한 선율은 가슴으로 파고든다. 슬프지만 평온하고 잔잔하지만 울림이 크다. 이런 안정감 때문에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람의 입은 하나의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모니카는 2열 횡대로 가지런하게 구획된 수많은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전으로부터 당신의 으슥한 목구멍을 통과하며 올라 온 숨은 부패하기도 발효하기도 하는 시간을 거쳐 생의 천태만상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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