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도 없다면서…."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뽀롱뽀롱, 새소리가 새어나왔다. "꿀 바른 말을 너무 잘해. 사기꾼 같이." 명치를 틀어막고 있던 답답한 덩어리가 뱃속으로 꺼지듯 내려갔다.」 작중 경주가 인생의 구원자 지은에게 고백하는 장면이다.
뭐지? 이거 뭐야. 진짜 정유정이 쓴 게 맞나 싶었다. 가슴이 아릴 정도로 명치끝을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기대한 건 이런 말랑말랑한 로맨스가 아니었으니까. 전조는 초반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킬리만자로를 여행하던 제이가 해상이 근무하는 원주 연구소로 찾아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그러니까 "이 정신 나간 수컷, 누가 책임져야 할까?"라는 제이 질문에 "암컷이."라고 답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는 얘기다.
정유정이 변한 걸까. 그 옛날 저잣거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던, 소위 기센 서사로 악을 탐구하던 작가의 결이 변한 걸까. 전작을 읽은 독자라면 그렇게 생각하도고 남을 만하다. 운명의 폭력성과 맞서는 인간, 인간의 본성을 그리던 작가가 내놓은 신작에 담긴 인간의 야성은 전과 달리 안전했다. "도망치지 않는다면, 견뎌낼 수 있다면, 내가 그 세상에 존재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 같은 문장조차 부드럽게 다가왔다.
서울서 대구로, 또는 부산에서 대구로 올 때, 종점 아닌 중간에서 내려야 할 때, 잠들었다가 내릴 역을 놓치면 안 될 때면 나는 정유정의 책을 담는다. 두꺼운 부피와 무게가 부담되긴 해도 이만한 각성제가 없다. 이번 여행의 선택은 '영원한 천국'이었다.
중환자실 간호사 5년, 보험심사평가원 9년의 경력답게 '영원한 천국'도 병원과 의학에 관한 정유정 소설 특유의 컨벤션으로 빼곡하다. 트렌드에 맞춘 듯 가상세계와 접합한 소설은 군더더기 없는 문체 덕에 단숨에 읽힌다.
열 살 소년이 서른여섯에 삼애원을 거치고 아내를 사고로 잃은 후 30년 세월을 거슬러 예순 중반에 다다른 실버타운까지, 작가는 한 남자의 파란만장을 노정하고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삶에 대하여 집요하게 탐구한다. 현재와 미래를 종횡하던 인물들의 서사가 어둡고 고통스런 현실과 대조되는 롤라와 드림시어터라는 영원한 가상공간에 안착할 때, 숨차게 달려온 여정은 한 편의 휴먼드라마로 변신할 터이다.
작품마다 필연적으로 등장시킨 죽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종반 경주가 내뱉은 "내겐 운명의 설계 없이 살아볼 기회가 필요해"(390쪽) 라는 말은 곧 작가 자신에게 던진 선언문으로 읽힌다. 때문인지 가상현실 프로그래밍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또 다른 인간 본성에 안도하며 마무리 짓는 '영원한 천국'.
마니아들조차 갑론을박을 벌인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까지 정유정의 소설이 독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미로 속으로 달려갔다면 '영원한 천국'은 독자 스스로 올무를 걸고 목적지까지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든다. 여전히 독자를 쥐락펴락하고도 남는 영민함이 번뜩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종의 기원'의 정유정이 더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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