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념과 체제가 제공하는 '자유'를 그저 물과 공기처럼 거저 얻은 것이라 믿고 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아무리 설명해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일부 운동권 인사들은 자유를 제공하는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빼앗겨 봐야 그 절실함을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구조다.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6·25 관련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 6월 25일부터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 90여 일간 낙동강 방어선 안쪽을 제외한 대한민국 전역이 북한의 점령통치 하에 놓여 자유를 빼앗긴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구 일원은 다행히 낙동강 방어선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그나마 행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석 달에 걸친 점령통치 기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인민군이 남침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김일성은 즉각 서울로 달려왔다.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김일성은 인민군 전차부대를 중앙청과 서울시청 앞에 세워놓고 서울 점령식을 거행했다. 점령식을 마친 후 중앙청 지하실에 마련된 전선 사령부에서 승리의 향연을 베풀고 축배를 들었다.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은 자신은 회색분자로서 대한민국에 그다지 충성을 바치지 않았고, 그 결과 언제든 한번은 인민공화국 백성이 될 것을 예견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이념 성향이었기에 그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적 치하 90일 간의 체험을 일기로 남겼다.
그의 6월 28일 일기에 의하면 거리에는 붉은 기 흔들며 만세 부르는 사람이 넘쳐났고, 학교 깃대엔 인공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인민군 전차는 서울에 진입하자마자 서대문 형무소로 직행하여 투옥됐던 사상범들을 석방했다. 이로써 서울은 단숨에 붉은 공화국으로 돌변했다.
◆서울에 남은 중립·좌익계 의원들의 최후
인민군의 서울 점령 전에 피난을 떠난 시민은 4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대부분 공산치하를 경험했던 월남민이 80%를 차지했고, 20%는 고급 공무원이나 자본가, 우익계 정치가, 자유주의자, 군인, 경찰관 가족이었다. 반면에 피난을 떠나지 않고 서울에 남았던 시민들은 적기를 흔들며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숨어 살며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당시 국회의원 중 피난을 떠나지 않은 사람은 김효석(전 내무부장관), 김약수(전 공산당원. 전향 후 국회 부의장), 조소앙(사회당 당수), 원세훈(민족파), 김규식(상해 임정 원로) 등 48명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념 성향이 중립, 혹은 좌익계이니 인공 치하에서도 별일 없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이들은 인민군 철수 과정에서 모두 납북 당했다.
1946년 월북하여 북한의 부수상 겸 외상에 오른 박헌영은 "인민군대가 밀고 내려가 서울만 점령하면 20만 남로당원이 일제히 봉기하여 손쉽게 적화통일을 이룰 수 있다"면서 김일성에게 남침을 부추긴 주인공이다. 박헌영은 6월 28일 남로당원과 당 조직에 총궐기를 호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방송 연설을 했다.
"인민군은 여러분 남조선 인민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한을 풀어주고 역도들이 일으킨 내전을 끝내기 위해 진격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러한 엄숙한 시기에 모든 남반부 인민들은 왜 총궐기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 같이 일어서서 이 전 인민적, 구국적 정의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의 후방에 있어서는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입니다. 전력을 다해서 대중적, 정치적 폭동을 일으키시오."(하기와라 료(萩原燎) 지음·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주)한국논단, 1995, 266~267쪽)
박헌영의 원색적인 선전 선동에도 불구하고 남한 전역에서 남로당의 폭동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날 김일성은 "우리 조국 수도 서울 해방에 제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김일성은 남한 주민은 조속한 시일 내에 전쟁을 승리로 종결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다해 인민군에 협조할 것, 해방된 서울 시민은 민주질서를 속히 수립하여 수도 복구건설 사업에 착수할 것, 반동에 의해 해산된 인민위원회를 급히 복구하여 인민군대를 적극 원조하라고 말했다.
◆인민재판의 실상
김일성의 이 연설 직후부터 정치보위부는 남한 내 좌익세력을 앞세워 시내 소탕작전과 '국가반역자'(한국의 공무원, 우익인사, 자본가, 지주, 군인, 경찰 등)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체포된 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편, '한국전쟁(1)-38선 초기전투와 지연작전', 1986, 명성출판사, 1986, 97쪽).
이들은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교정, 서대문 송월동, 명동 국립극장 앞, 돈화문 앞, 명륜동 입구에서 열린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인민재판은 노동자·농민·학생·청년들이 부르주아와 지주·반동을 심판한 것으로 선전되었지만, 실제로는 당이 모든 것을 조종했다.
김성칠 교수가 명륜동 입구에서 목격한 인민재판은 청년 몇 사람을 끌어다놓고 따발총을 멘 인민군이 군중을 향해 "이 사람이 반동분자요, 아니요?"라고 물었다. 모두들 기가 질려 아무 말이 없었는데, 그중 한두 사람이 "악질 반동분자요"라고 소리치자 인민군은 두말 없이 현장에서 총을 쏘아 죽였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창비, 2017, 99쪽). 이것이 인민재판의 실상이었다.
6월 29일 '자치대'라고 쓴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이 총을 메고 다니며 집집마다 식량 보유량을 조사했다. 그들은 "만고역적 이승만 도당들의 학정으로 말미암아 선량한 인민들이 많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여 있으니 우선 가진 것을 다 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 그러면 인민공화국에서 1주일 안으로 식량을 넉넉히 배급해 줄 것이다"라며 모조리 강제로 빼앗아갔다(김성칠 지음, 앞의 책, 84~85쪽).
남한 점령지에서 강제 징발한 식량은 인민군을 비롯한 당 기관, 정권 기관의 공무원에 한해 배급을 주고 시민들에게는 일체의 식량 배급을 중단했다. 인민군 점령지에서는 모든 공장과 직장이 문을 닫아놓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선언했다. 이것이 인민군 치하에서 자행된 스탈린식 중점배급정책이다. 인구가 밀집한 서울에서 150만 시민에게 식량 배급을 중단하자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 정책 덕분에 김일성은 서울시민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세웠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3개월 간 서울시민은 기아선상에서 헤매었고, 식량을 구하러 농촌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9월 초에는 서울시 인구가 3분의 1로 줄었다(박갑동 지음·구윤서 옮김, '한국전쟁과 김일성', 도서출판 바람과 물결, 1990, 108쪽).
◆40만 남한 청년을 인민의용군으로 징집
인민군의 최대 약점은 보급이었다. 인민군에는 아예 보급부대가 없었다. 그들은 러시아 내전 당시 적군이 식량을 전적으로 혁명을 지지하는 민중에 의존하여 기민하게 부대를 이동시킨 점을 모방하여 남침 때 한 톨의 식량도 북한에서 가져오지 않았다.
식량뿐만 아니라 인민군대에 필요한 수건·양말·칫솔·비누 등 생필품도 남한에서 강제 징발했다. 7월 12일부터 일주일간 "조국을 위해 귀금속을 바칩니다"라는 구호 아래 귀금속 헌납을 요구했고, 애국미와 부식(고추장, 된장, 장유 등) 헌납도 강제했다. 김일성은 "남한에 무기만 갖고 내려가면 모든 것이 공짜로 혁명이 이룩된다"는 약탈적인 남침을 한 것이다.
7월 1일, 인민군은 전시동원령을 내려 남한 점령지에서 18~36세 청년을 인민의용군으로 징집했다. 초기 입대자는 보도연맹 가입자, 출옥한 좌익사상범, 지하에 숨었던 좌익 활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는 인공 치하에서 출세를 위해 자진 입대한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전황이 악화되자 인민군은 닥치는 대로 청년들을 끌어다 전선으로 내몰았다. 심지어 중학생들까지 잡아갔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낙동강 전투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포로 송환 과정에서 북으로 가지 않기 위해 반공포로로 활동하게 된다. 김일성은 남한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한 남한 청년의 숫자를 40만 명이라고 밝혔다. 40만 남한 청년의 피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것이다. 백주 노상에서 젊은이들을 강제로 납치하여 총알받이로 내모는 일들이 자행되면서 인민군에 대한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다.
식량·물자 공출, 의용군 강제 징집 등 점령 정책에 적극 협조한 주역은 '바닥 빨갱이'였다. 이들은 남한에서 좌익 행위를 하다 붙잡혀 이승만 정부 치하에서 처벌받은 자들로서, 복수심과 출세 의식에 젖어 있었다. 각 내무서와 분주소에는 남한의 '바닥 빨갱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특별자위대가 설치되었다. 이들은 자신들 지역에서 지주와 우익 인사, 군경 및 가족 색출에 앞장섰다.
점령지에선 내무성의 706 치안여단(사령관 박훈일)이 병참선 보호, 민간인 통제 및 행정 지원, 점령지역 내의 고립된 국군과 유엔군 격멸, 포로 후송 및 남한 우익인사 처형을 담당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을 체험하면서 붉은 완장 차고 인민군을 환영했던 민심은 싸늘하게 식었다. 김성칠 교수는 "사람들 거의 전부가 공산주의를 외면했고, 어떤 명령이 내려와도 비협력적이고, 돌아서서 비난하고 있다"고 8월 19일자 일기에서 토로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붕괴된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철수하며 곳곳에서 민간인을 납치하거나 집단 학살했다. 1952년 서울 재수복 후 내무부가 북한 공산집단에 의한 납북자 및 피살자를 조사한 결과 납북자 수는 8만2천959명, 피살자 수는 12만2천799명이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남한 내의 우수 인재 말살 작전이었다.
김성칠 교수는 적 치하 90일을 혹독하게 경험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개인의 자유를 빼앗기는 끔찍한 체험을 한 후에야 대한민국과 그 체제가 제공한 '자유'를 갈망하고 그리워하게 되었다. 인간이란 이처럼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는, 멍청한 존재들인 모양이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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