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청정 샌드위치 세자
영조 25년(1749)에 15세의 세자에게 맡겨진 업무는 오늘날로 치면 사법, 국방, 인사에 관한 업무는 제외하고 일상적인 행정 업무만 대리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매일 올라오는 탕평을 반대하는 상소를 처리했다. 15세 세자가 당쟁에 관련한 상소문 지뢰밭에 아버지 대신 들어간 것이다.
영조는 세자에게 당쟁 관련 상소문 처리를 맡기고, 그와 관련한 상소가 본인에게 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차단했다. 대리하는 세자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편법이었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영조가 몰입했던 일은 군역(軍役)의 혼란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지만 그래도 불공정한 군역을 재정비하여 균역법을 선포한 것은 영조 28년(1752)이었다. 이것은 그나마 세자에게 당쟁 상소를 맡기고 영조가 집중적으로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영조는 노론내 반탕평파들의 지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론중용 탕평책을 그만할 마음이 없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세자가 그들의 집요한 반대 상소를 단호하게 제압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런 기대 자체가 모순이었다. 단지 일반 정무를 대리할 뿐인 세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에게 상소를 돌려주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급기야 영조 27년(1751) 6월 12일에 영조는 세자를 격하게 나무랐다. 옆에서 보고 있던 영의정 김재로가 "동궁 저하께서 어린 나이에 대리하여 ..일찍이 성상의 뜻을 우러러 몸 받지 않음이 없으셔서 신이 일찍이 찬탄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매양 지나치게 책망을 하십니까.." 라고 말할 정도 였다. 영조는 자신이 수십년에 걸쳐 당론 중재에 애를 썼지만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던 일을 갓 대리청정을 시작한 10대 중반의 세자가 완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엉뚱한 망상에 사로잡혀 세자를 사사건건 괴롭히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지 주변 신하들의 눈에는 다 보였지만 오로지 영조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노론반탕평파들은'소론을 완전하게 숙청하도록 아버지에게 간언하지 못하는 아들은 불효자'라는 논리로 끝도 없이 상소를 올리면서 세자를 흔들었다. 아버지 영조는 그들을 엄하게 제압하지 못한다고 하루가 멀다 하게 세자를 꾸짖었다. 여기서 부자간의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기 권력인 세자가 아버지 영조를 뒤이어 소론중용 탕평책 까지 이어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노론 반탕평파들은 부자 간의 틈이 더욱 벌어지도록 맹렬하게 활동했다. 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노론반탕평파들 사이 에서 양쪽으로부터 두들겨 맞는 샌드위치 신세였다.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정시 사건 - 광기의 대토벌 죽음의 행렬
그런 시절이 흐르던 중, 영조 31년 을해년에 전국의 소론들을 멸종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영조 4년에 있었던 무신란과 관련하여 귀양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던 소론들이 역모로 얽혀 대토벌이 되는 사건이다. 을해옥사로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결국 소론 중용 탕평책을 중지하게 된다.
영조 31년(1755, 을해)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가 급하게 장계를 올렸다.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는 흉서가 나주 객사에 내걸렸다는 보고였다. 무신란이 있기 전 영조 3년에 괘서가 유행처럼 나붙은 이후, 이런 비슷한 괘서가 영조 24년에 걸린 적이 있었다. 당시 남인 이지서 등을 잡아들이고 사건을 일단락 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7년만에 다시 등장한 괘서였다.
"기한을 정해 반드시 범인을 잡아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영조의 명의 떨어진 지 1주일 뒤인 2월 11일, 나주에 살고 있는 윤지(尹志)가 체포됐다. 윤지는 윤취상(尹就商)의 아들이다. 윤취상은 김일경과 함께 노론 축출에 앞장섰던 소론 강경파였다. 그 윤취상의 아들 윤지는 무신란에 연루되어 제주에서 10년, 나주에서 20년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영조와 조정은 나주 벽서 사건의 범인을 30년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윤지 라고 지목한 것이다.
윤지의 두 아들 윤광철(尹光哲)과 윤희철(尹希哲)이 잡혀왔고, 윤지와 절친이었던 전직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도 잡혔다. 영조는 이들을 친국했다. 관련자들이 늘어났다. 윤지가 유배 생활 내내 훈장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기 때문에, 윤지에게 글을 배워 나주 관아에서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주 외에 나주와 가까운 지역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몰락한 양반들도 윤지와 자주 어울렸다. 이들이 모두 역모 사건으로 엮어지기 시작했다.
이하징은 2월 23일에 복주되었고, 윤지는 끝내 자백하지 않은채 물고되었다. 윤지의 아들 윤광철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당일 영조는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현장인 숭례문으로 친히 거동했다. 윤광철의 온 몸이 산채로 찢겨졌다. 비명과 함께 찢겨진 사지에서 피가 솟구쳤다. 모두 눈길을 돌리지 말고 그 모습을 똑똑히 쳐댜봐야했다. 눈길을 돌리면 죄인을 동정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월 11일부터 3월 30일까지 약 40일 동안 33명이 효수당했고 20명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이것은 광기어린 복수극에 가까웠다. 점점 잔혹해져가는 영조의 복수극에 보다 못한 노론 탕평파 영중추부사 김재로가 "지금은 군사를 일으키는 때가 아닌데 날마다 효시하는 것은 불가할 듯 합니다."라고 말릴 정도였다.
한 달 넘게 진행한 대역모 죄인들을 처벌을 마무리 할 때가 되자, 영조는 역적 토역을 기념하고 축하한다는 의미로 5월 2일 토역정시(討逆庭試)를 개최했다. 토역정시는 역모 사건을 마무리하고 다시 일상적 정무를 회복하기 위한 터닝 포인트로서의 역할도 있었다. 그런데 마무리는커녕 이 토역정시에서 죽음의 행렬은 다시 시작되었다. 시험 답안지 중에 조정을 비난하는 내용과 역대 임금의 휘(諱)를 깨알 같은 글씨로 적은 답안지가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휘란 선왕들의 이름이다. '꺼리다'라는 뜻인데 왕조 국가에서는 임금들의 이름을 절대 쓸 수 없었다. 그런데 휘를 잔뜩 써놨으니 누군가 죽기를 작정하고 써낸 것이었다. 곧 바로 심정연(沈鼎衍)이 지목되어 끌려 나왔다. 심정연은 영조 4년 무신란에 연루되어 아버지와 형을 잃었다. 당시 그는 2세 였기 때문에 화를 면했다. 그 후로 27년이 흘러 29살이 되어 복수의 마음을 먹고 토역정시장에 신분을 속이고 들어왔던 것이다.
수사가 시작되었다. 심정연의 배후에 윤혜(尹惠)가 있음이 밝혀졌다. 윤혜는 윤취상의 동생이자 윤지의 숙부였다.
윤혜는 답안지에 왜 휘를 가득적었냐는 질문에 "제 아들의 이름을 적을 때 상고하려고 적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영조는 기가 막혔다. 죽일테면 죽여라 하는 대답이었다. 너 같은 사람도 임금이 되는데 내 아들이라고 임금 되지 말란 법 있느냐는 이죽거림이었다. 영조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관련자로 5월 20일에 승지(承旨)로 있던 신치운(申致雲)이 잡혀왔다. 신치운은 잡혀와서 폭탄발언을 했다. "나는 갑진년(영조 즉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말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만방에 보이기 위해 자신이 평생 노력해 오며 탕평을 추구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세월이 허사였구나 하는 좌절과 분노에 휩싸였다.
5월 6일에 윤혜를 복주하면서 영조는 술에 취했다. 영조는 평소에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날 만취했다. 윤혜의 목을 치고 그 목을 깃대 끝에 매달도록했다. 백관들을 모두 나오게 한 후 머리가 달린 깃대를 조리돌리게 했다.
광기의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영조 31년(1755) 2월의 나주벽서 사건과 5월의 토역정시 사건을 '을해옥사' 라고 한다. 이 옥사로 참수당한 자가 200여명, 노비가 되거나 귀양간 자가 300여 명으로 모두 500여 명이 화를 입었다.
탕평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살육의 당쟁을 막고자 했지만, 영조의 조선은 피바다에 잠기고 있었다. 그것은 친소론 정서로 성장하여 노론 반탕평파의 상소를 막고 있었던 세자의 피를 부르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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