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이 희붐하게 밝아 왔다. 나는 침대에 누워 '오늘은 뭘 해 먹고 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떠나간 후부터 늘 그랬다. 나는 하루의 문을 이런 질문과 고민을 하면서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의 숨소리 말고 아무 인기척도 없는 나만의 조용한 공간. 저녁마다 침대에 누워 잠들기까지 '내일은 뭘 해 먹을까?' 고민하며 뒤척일 때부터 그 질문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잠들기 전에 확실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그래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자.'며 스르르 잠들곤 했다. 앞으로도 이런 질문과 고민은 내가 살아있는 한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주방으로 갔다. 아내가 하던 대로 휴대폰을 가스레인지 옆,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화면을 오른손 검지로 넘기며 선호 채널로 지정해 두었던 유튜브 채널을 찾았다. 썸네일만 봐도 군침이 도는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비롯하여 요리가 주된 콘텐츠였다.
김해 사는 사람은 33만원의 파격적인 가격에 임플란트를 해준다는 광고가 떴다. 이빨이 튼튼한 나는 건너뛰기를 눌렀다. 화면에서 광고가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제가 음식점 운영할 때 진짜 인기 있었던 차돌 된장찌개 비법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땡기는 맛이 있어서 손님들이 주방 앞에까지 와가꼬 국물 좀 더 달라고 했던 기가 막힌 차돌 된장찌개 바로 공개하겠습니다."
셰프의 감칠맛 도는 사투리가 바닥에 떨어진 콩처럼 통통 튀어 올랐다. 셰프는 '당기는 맛'을 '땡기는 맛'으로, 주방 앞에까지 '와서'를 주방 앞에까지 '와가꼬'로 발음했다. 호남과 영남의 사투리와 억양이 섞여 있는 그의 말이 왠지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그의 말투와 거의 흡사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이 내가 속한 풀꽃 동아리에도 있었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결성한 풀꽃 동아리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시, 소설, 수필, 인문학 등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하며 함께 독후감을 공유했다.
나는 영남과 호남의 두 지역을 아우르며 긴 세월 쌓아 올린 셰프의 이력에 경의를 표했다. 도마 위에서 펼치는 현란한 칼솜씨도 그를 선택하는데 한몫했지만 묘한 정감이 밴 그만의 독특한 사투리에서 또 다른 매력을 느꼈다. 게다가 그의 요리는 초보자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었고 실용적이었다. 아무튼 그는 다른 셰프보다 더 신뢰가 가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셰프가 냄비를 열고 물을 부었다.
"먼저 멸치 다시마 육수부터 끓여 보겠습니다. 현재 끓고 있는 물은 900미리입니다. 여기에 멸치 한줌 반 넣습니다."
나는 셰프가 시키는 대로 전자레인지에 넣어 30초 돌린 마른 멸치를 넣었다. 셰프가 말을 이었다.
"다시마 15그램 넣습니다."
나는 15그램을 정확히 잴 수 없어서 눈대중으로 작은 다시마 3조각을 넣었다. 이 재료들은 마트 창립기념 폭탄세일을 한다는 전단지를 보고 산 것들이었다. 그날 나는 차돌박이 된장찌개용 호주산 차돌박이 400그램짜리 2팩, 부침과 찌개 겸용 국산 콩으로 만든 600그램짜리 두부 2모, 무항생제 계란 1판, 뉴질랜드산 골드키위 10개, 대파 1단, 양파 10개, 애호박 1개, 된장 1통, 청국장 1통, 팽이버섯 1팩, 표고버섯 1팩, 깐 마늘 1통, 간 마늘 1통, 간 생강 1통, 홍고추 1팩, 청양고추 1팩, 국간장 1병, 맛술 1병, 부산 어묵, 비비고 만두 등을 샀다. 만두나 어묵처럼 1+1의 유혹에 넘어가 장보기 계획에도 없는 것을 사기도 했다.
아내가 있었다면 먼 장래의 식재료까지 미리 사 두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장보기는 늘 이렇게 즉흥적이었다. 어떤 것들은 이미 사둔 것도 모르고 다시 산 적이 있었고, 어떤 것들은 유통기한을 한참 넘겨 폐기할 때까지 냉장고 구석에 처박아 둔 것도 있었다.
예전에 아내와 같이 마트에 가는 일은 즐겁고 재미있었다. 나는 카트를 끌고 아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내가 매대에서 고른 물건을 카트에 담았다. 흥이 나면 나는 오지랖도 넓게 매대에 진열된 물건들을 싸다고 카트에 주워 담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내의 핀잔을 들었다.
"그런 건 싸다고 미리 살 필요가 없어요."
아내가 떠난 후 나는 한동안 마트에 가지 않았다. 갈 수가 없었다.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마트를 혼자 가려니 아내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늘은 뭘 해 먹고 살지?"
요즘에 와서야 먹는 것과 사는 것이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멋있어 보이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아내가 있어서 먹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내가 없는 지금 나에게 절실한 것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아니었다. 배부른 돼지까지는 아니라 해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은 필요했다. 식당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조미료 일색인 식당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임계점에 달할 즈음 나는 식당 대신 미숫가루나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어떤 때는 아예 그것마저 귀찮아 거르는 횟수가 늘어났다. 몸이 눈에 띄게 축나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마트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 없이 마트에 장보러 가는 것,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5분 끓이고 다시마 건져내고 멸치는 5분 더 끓여서 합쳐서 10분 끓인 다음에 사용하겠습니다."
나는 다시마를 건져냈다. 셰프는 도마 위에 대파 1대를 가지런히 놓았다.
"오늘은 대너지게 3-4인분 끓이기 때문에 대파 1대 사용합니다."
대너지게라는 말은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투리였지만 푸지게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나는 셰프를 따라가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셰프의 말은 언제나 나의 행동보다 한 박자 빨랐다. 셰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나는 자주 화면을 되돌리며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얼른 재생속도를 표준보다 약간 느린 0.75로 조정했다. 그러자 셰프의 목소리가 노인처럼 힘없이 늘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 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뜨거운 김이 코를 찔렀다. 목에 무언가 울컥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끓어오르는 국물 위에 엉기는 불순물을 셰프가 시키는 대로 국자로 걷어내며 말했다.
"여보야 너무 힘들고 괴롭네."
그러나 아내는 말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여전히 아내는 말이 없었다.
"여보야 나도 어서 당신이 있는 천국으로 가고 싶네요."
나는 위를 향해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두 손을 높이 들듯이. 그때 하늘에서 아내의 차분하고 조용한 말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우리 춘돌씨. 조금만 더 힘내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기업이자 자랑스러운 우리 딸을 위해서라도 씩씩하게 살아가요."
아내는 가끔 나를 기분 좋게 놀리거나 칭찬할 때면 내 이름의 끝 글자를 비틀어 춘돌 오빠 혹은 춘돌씨라고 불렀다. 그러면 나도 아내의 순남 이름을 사랑하는 우리 순돌 공주 혹은 순돌양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고는 우린 서로를 쳐다보며 깔깔 웃곤 했다.
"그렇지 여보야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지요. 홀로 남을 딸을 위해서라도. 그렇다면 여보야. 이렇게라도 내가 살아야 한다면 천국에서 하나님이 나를 부를 때까지 나한테 힘을 좀 주세요."
나는 터지려는 울음을 애써 삼키며 두 팔을 위로 벌리며 혼잣말을 했다. 언제부턴가 아내는 요리할 때마다 유튜브를 켰다.
"여보야, 자긴 요리 박사인데 유튜브는 왜 봐요? 자긴 아무렇게 뚝딱 만들어도 비싼 한정식보다 더 맛있는데."
그랬다. 아내가 해준 음식은 다 내 입맛에 맞았다. 아내는 피식 웃으며
"나이는 어쩔 수 없네요. 이젠 늘 하던 요리도 어떻게 하는지 까마득할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건 아내는 쉽게 피로를 느꼈다. 깜빡하는 횟수도 늘어갔다. 자주 몸에 열이 나고 가끔 식은땀도 흘렸다. 병원에 가보자고 해도 아내는 손사래를 치며 별거 아니라고 했다.
"지난 건강검진에서 아무 이상이 없었잖아요."
아내는 약국에서 약만 지어다 먹으면 된다고 했다. 아내의 말대로 해열진통제 몇 알을 먹으면 거짓말처럼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내는 병원 가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웬만하면 약국에서 처방전이 필요 없는 약을 먹고 해결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아내의 암 발병 사실을 안 것은 2022년 봄에 수검한 건강검진에서였다. 2년 마다 받아온 건강검진이었지만 그해는 검진 후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두 살 터울인 아내와 나는 짝수 연도에 태어나 늘 같이 검진을 받았다. 그날따라 유독 아내는 건강검진 내내 무척 힘들어했다. 수면내시경에서도 정한 시간이 훨씬 지나도 깨어나지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의사는 가끔 그럴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불길한 징조를 암시하는 전조증상 같아서 밀려오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 해처럼 검사결과통지서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수검 후 병원으로부터 별다른 언급 없이 검사결과통지서만 달랑 받았다. 그러나 그해는 달랐다. 수검병원에서 조속히 내원해 달라고 전화가 온 것이다. '무슨 안 좋은 결과라도 나온 걸까?'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아무래도 큰 병원으로 가서 조직검사를 해야 할 것 같네요. 저기 보이시죠. 저 덩어리가 아무래도…"
의사는 X선 결과지를 가리키며 말끝을 흐렸다. 직접 암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의사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 보니 아내의 왼쪽 가슴 깊은 곳에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 보였다. 의사가 말하는 '아무래도…'는 암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해졌다. '암 입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돌아올 대답이 겁났다.
주위의 조언을 참고하여 창원에 있는 큰 병원 두 군데를 찾아갔다. 일단 암 진단까지는 여기서 할 참이었다. 그 정도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방암을 전문으로 진단하고 치료한다는 의사의 이력에 약간 안심이 되었다. 아내는 CT, MRI, 조직검사까지 받았다. 결과는 우려한 대로 유방암이었다.
"날을 잡아서 제거 수술해야 합니다. 당장 입원하셔야 합니다."
의사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네, 의논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우리는 병원을 나왔다. 이제 어느 정도 믿을만한 답을 얻었으니 치료할 상급 병원을 찾아야 했다. 처음부터 이 병원에서는 암 여부를 판단하는 진단만 할 작정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나도 어서 천국에 갔으면…"
평소 아내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특히 요 몇 년 사이에 천국이라는 말을 자주 내뱉었다. 언젠가 TV 프로 인간극장에서 주인공이 암에 걸려 죽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도 그런 말을 했다. 그렇지만 뉘앙스는 약간 달랐다.
"나도 천국 갔으면 좋겠네요. 그렇지만 저분처럼 암으로 가긴 싫네요. 자다가 편안히 천국 가는 그런 거요. 천국은 아프지도 않고 아웅다웅 다투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도 않고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정말 좋겠죠?"
아내의 죽는다는 말.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아내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제발 그 말이 허언이거나 그냥 해보는 말이기를 바랐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쉽게 죽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하는가. 평소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의 숨겨진 내면에는 나는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아내가 이런 반어적인 어법으로 농담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의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내의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제발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말 대신 나는 하나님 핑계를 대며 에둘러 말했다.
"사람이 죽고 싶다고 마음대로 죽나요. 하나님이 불러야 가지. 그리고 저 사람은 필리핀에서 의료 봉사하다가 암에 걸려 죽은 건데 당신은 저 의사하곤 틀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을걸요."
아내는 천성적으로 몸이 허약했다. 태어나서도 언제 죽을지 몰라 출생신고를 3년이나 늦게 했다고 했다. 어릴 땐 어머니가 다른 형제자매 몰래 입이 짧은 아내에게만 따로 아내가 좋아하는 갈칫국 같은 걸 먼저 해 먹이곤 했다고도 했다.
아내가 천국으로 떠나고 난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내가 쓴 일기를 보았다. 일반 대학노트에다 쓴 거였는데 어떤 쪽은 일기를, 어떤 쪽은 성경 말씀을 필사해 놓았다.
'보고 싶은 나의 어머니.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풍경을 보니 오늘따라 엄마가 더 생각나네요. 보고 싶은 울 엄마 왜 그리도 빨리 가셨어요. 좀 더 오래 사시지.'
그다음 글은 얼룩으로 지워져 판독이 어려웠다. 아내의 눈물 자국이었다. 어머니는 아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암으로 떠나셨다고 했다. 어릴 때 무릎 꿇고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독한 유교 집안이었지요. 아버지의 반대에도 어머니가 하나님을 믿게 된 후부터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새벽 기도하러 교회에 따라가곤 했지요."
그래서인지 권사가 된 아내는 어머니가 자신을 무릎 위에 앉히고 불러주던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라는 찬송을 즐겨 불렀다. 아내는 그 어머니가 보고 싶어 천국에 빨리 가려고 한 걸까? 아내는 언제부터 가슴에 살구씨를 키우고 있었을까? 갱년기 후유증 때문일까? 코로나 접종 후유증일까? 오만가지 의문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숙고 끝에 부산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택했다. 서울의 소위 빅5병원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김해 장유에서 서울을 오가며 약 2년의 치료 기간을 버티기에는 몸이 무리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술로 실천했던 장기려 박사가 설립한 기독교 병원이라는 점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다는 점도, 부산에 사는 딸이 오기 쉽다는 것도, 주치의로 정한 의사가 서울 빅5 중 하나인 병원에서 근무한 경력도 한몫했다.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에서 다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유방외과에 접수한 지 두 달만이었다. 유방암 환자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최종 결과를 확인하던 날.
"암이군요."
의사의 진단은 이 한마디였다. 내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자 의사는 내 의중을 간파했다는 듯 한마디 보탰다.
"작은 살구 만합니다."
의사는 역시 그 전의 의사들처럼 암의 크기만 말할 뿐 몇 기인지 먼저 말하지 않았다. 나도 몇 기인지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돌아올 대답이 겁났다.
"항암 치료하고 수술하면 완치는 가능한지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이 말만 겨우 했다.
"고약한 놈인데…"
의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고약한 놈이라고만 말했다. 그날 아내의 유방암이 삼중음성유방암(TNBC)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보야, 요즘 암은 불치병이 아니라네요.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웬만한 건 다 치료 가능하다네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건강하게 살다가 잠결에 천국 가야지 이까짓 암이란 놈에게 굴복당하다 가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어서 낫고 건강하게 살다가 같이 손잡고 한날한시에 잠결에 같이 천국 갑시다."
나는 아내에게 유방암은 암 중에서도 착한 암이니까 쉽게 회복될 거라고 거듭 안심시켜 주었다. 얼마 전 유방암 수술 후 건강하게 회복되어 TV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여자 연예인을 예로 들면서. 더욱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도 하면서.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나 항암 받지 않을래요."
이번만은 아내의 뜻을 따를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발병 사실을 주위 친척들에게 알렸다. 아내를 위한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요즘은 유방암에 걸린 사람들도 치료받고 잘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모두 지나가는 말투였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말기 유방암 환자가 완치되어 사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영상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의사로부터 삼중음성 유방암이라는 걸 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유방암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유방암이 한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 7가지 유형의 유방암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았다. 대부분의 유방암 환자는 생존율이 높은 착한 암, 즉 호르몬 수용체 양성 유방암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지인들이 요즘 유방암은 암도 아니라고 말하던 그 암, 바로 그 착한 암이었다.
아내가 걸린 삼중음성유방암(TNBC)은 유방암 중에서도 가장 예후가 좋지 않은 악성이라고 했다. 전체 환자 중 10%에서 15%를 차지하는 이 암은 다른 착한 암처럼 맞춤형 치료제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암 진행 속도가 빠르고 공격적이어서 치료가 까다롭다고 했다. 의사가 왜 고약한 놈이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고약한 놈이네요."라는 의사의 이 말. 나는 의사가 우리를 최대한 안심시키기 위해 찾아낸 말이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유방암 카페에 가입해 환우들의 단계적 증상을 공유했다. 거기서 아내의 암이 현재 어느 단계인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살구만큼 자란 아내의 암은 어쩌면 말기를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내에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다만 열심히 기도했다. 아내의 암을 낫게 해주신다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뭐든 다 하겠다고 맹세했다.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매일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기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적을 바라기에는 인간적으로 나의 믿음이 약했던 건 사실이었다. 울면서 기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입버릇처럼 천국에 가고 싶다던 아내. 항암 같은 거 필요 없다던 아내. 아내는 천국의 계단에 한 발을 들여놓은 것을 알았을까? 다시는 되돌아 계단을 내려올 수 없는 그곳.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아내에게 여러 긍정적인 완치 사례들만 언급하며 안심하라고 말해주었다. 아내는 수십 번도 더 반복되는 내 말의 의도를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아내도 대충 눈치는 챘을 것이다.
2022년 8월 11일의 달력에 그린 붉은 동그라미. 지금도 내 방에는 빨간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진 8월이 걸음을 멈춘 채 걸려있다.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 날이었다. 의사는 항암 화학요법 복약안내문에 줄을 그어가면서 향후 치료 계획을 설명했다. 올해 안에 항암 주사 치료를 마치고 2023년 2월 20일에 암 제거 수술, 수술 한 달 후부터 방사선을 30회 시행, 방사선을 마치면 예후를 봐가며 항암 약을 복용. 그리고 최종적으로 2023년 9월 8일에 CT, MRI 등 종합 검진을 한다는 거였다.
의사는 수술을 뒤로 미루고 먼저 항암 화학요법을 시행하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했다. 암 덩어리의 크기를 줄인 다음 제거수술을 하고 연이어 시행할 방사선 요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나는 모든 것을 의사에게 의탁했다.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카보플라틴 성분이 들어있는 네오플라틴 주사를 3주에 1번씩 총 4회하고 파클리탁셀 성분이 들어있는 네오탁스를 매주 1번씩 총 12회, 독소루비신 성분이 들어있는 독소신을 3주에 1번씩 총 4회. 사이클로포스파미드라는 성분이 들어있는 엔독산을 3주에 1번씩 총 4회, 그러니까 총 24회의 항암치료제를 투여할 겁니다."
그러면서 일단 앞의 두 가지 약을 먼저 병행해 치료하고 뒤의 두 가지 약을 병행해 순차적으로 치료하자고 했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의사는 약의 부작용을 설명했다.
"백혈구 감소로 인한 발열, 혈소판 감소로 인한 출혈, 멍, 검은 변, 적혈구 감소로 인한 빈혈, 피로감, 어지럼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심한 오한이 들거나 38도 이상 고열이 지속되면 즉시 응급실로 오세요."
의사는 한약 등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도 삼가라는 당부도 했다. 나는 암 진단을 받은 첫날 겁이 나서 의사에게 묻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얻어들은 삼중음성유방암에 대한 것들도 신뢰할 만한지 그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완치가 가능한지 확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도 끝내 묻지 못했다. 혹여 '장담할 수 없습니다'같은 부정적 대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내처럼 죽음 앞에서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몇 기입니까?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시한부라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처럼 환자 가족이 물어볼 수 있는 정당한 권리행사마저도 주저했다. 나는 부정적인 대답을 스스로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서웠다. 나는 그 뒤로도 내가 먼저 의사에게 묻지 않았다. 간에 전이되어 손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내 몰래 나와 딸을 불러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라고 먼저 말해줄 때까지.
본격적인 항암치료 전에 아내는 오른쪽 가슴 위쪽에 케모포트를 심는 수술을 받았다. 작은 동전처럼 둥글게 생긴 케모포트를 왜 몸에다 삽입하는지 의아했지만 곧 그 의문이 풀렸다. 수십 회의 항암주사와 수혈, 전해질, 포도당, 진통제 등 각종 약물을 일일이 팔뚝에 주사한다면 팔뚝이 성하지 않을 것이었다.
유방외과 대기실에는 앉을 의자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예후를 점검하려고 오는 사람, 아내처럼 항암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 암 진단 차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옆자리에 앉은 환우가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말을 걸어왔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여기서 완치되었다며 힘을 내라고 말했다. 그녀의 경험이 도움이 될까 싶었다. 내가 항암 치료가 24회, 그리고 방사선 치료가 30회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8회 치료 받았다고 했다. 순간 나는 아차 이건 아닌데 싶었다. 그녀보다 몇 배나 많은 횟수로 치료해야 하는 건 역설적으로 아내의 병세가 위중하며 치료가 난망하다는 뜻이 아닌가.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완치 경험담을 자랑하듯 자꾸 말을 걸어오는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닫았다.
1차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했다. 환경이 바뀌는 것에 민감한 아내를 위해 1인실을 원했는데 바로 입실하지 못했다. 유방암 병동은 1인실, 2인실과 6인실이 있었다. 1인실은 2개뿐이었는데 비어있는 병실이 없어 당장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1인실 환자가 오후에 퇴원한다기에 일단 2인실에 임시로 들어갔다. 마침 침대 두 개가 다 비어있었다.
창가 쪽 바다가 보이는 곳을 택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바다를 쳐다보았다. 창 너머 케이블카가 줄지어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8월의 휴가를 즐기려고 일찌감치 부산 송도 해변으로 놀러 온 사람들은 하늘 위에서 환호했다.
"여보야, 내년 이맘때면 자기도 거의 나을 테니까 딸이랑 셋이 저거 한 번 타요."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병실에 들어온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젊은 부부가 병실로 들어왔다. 많아야 30대 초중반쯤으로 보였다. 벽 쪽에 있는 침대 옆에 짐을 풀더니 여자가 침대에 앉았다. 그 옆에서 남편이 그녀의 손을 잡고 뭐라고 위로의 말을 했다. 시한부지만 룸메이트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잠시 뜸을 들이는데 갑자기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죽기 싫어, 나 죽으면 어떡해."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을 거야."
남자는 우리를 의식해서인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남자가 다시 '괜찮을 거야, 걱정마…'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두 사람이 같이 울기 시작했다. 옆 침대에 어쩌면 자신들보다도 더 위중한 암 환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위중한 환우인지 몰랐다. 그녀는 입원한 유방암 환자 중 제일 나이가 어려 보였다. 유방암 환자들의 병실 문 앞에는 명패들이 붙어 있었는데 40대 50대 60대 70대가 다수였다. 30대가 제일 적었다. 간혹 80대도 있었지만 30대보다 많았다. 두 사람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슬며시 병실을 나왔다.
"여보야, 힘내."
암과의 기약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따스했다. 침대 옆 링거거치대에는 붉은색, 노란색, 흰색의 약이 든 비닐팩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걸려있었다. 비닐팩에서 얇은 관을 타고 내려온 약물들이 한 방울씩 케모포트를 통해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저 항암제가 가냘픈 아내의 몸을 겨우 지탱해주는 정상 세포까지 죽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간호사는 어떤 것은 3시간 마다, 어떤 것은 24시간마다 비닐팩을 갈아 끼웠다.
첫 항암을 마치고 퇴원한 아내는 구역질을 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서서히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발톱도 빠지기 시작했다. 항암 주사 치료를 받으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한 달이 지나자 아내의 머리카락이 더 심하게 빠졌다. 처음에는 몇 가닥씩 빠지더니 나중에는 뭉텅뭉텅 빠졌다. 나는 인터넷으로 가발 2개를 주문했다.
"차라리 머리를 빡빡 밀어버릴래요."
집 근처에 있는 단골 미용실에 같이 갔다. 미리 원장한테 전화해 사람이 없는 시간을 잡았다. 빡빡 민 아내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아내는 준비해 간 가발을 쓰고 모자를 덮어썼다. 아내는 울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여보야, 나도 빡빡 밀까?"
진심이었다. 아내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집에서 노는 사람도 아닌데. 남한테 혐오감을 주면 안돼요. 자긴."
항암 주사의 후유증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아내의 체온이 38도를 넘는 날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대략 2개월 주기였는데 1개월로 당겨졌다. 그때마다 아내는 해열제로 버티려고 했다.
"병원 가기 싫어요."
아내는 병원 특유의 냄새에 진저리쳤다. 그러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고열이 심할 때면 응급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8월에 시작한 항암주사 치료가 4개월 만에야 겨우 끝났다. 혈소판과 백혈구 수치가 위험수치로 나올 때마다 항암치료를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나는 그때마다 축산도매시장에서 선지를 샀다. 아내에게 좋다는 것은 뭐든지 해야 했다. 그러나 아내는 잘 먹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입이 짧은 데다 항암 부작용이 더욱 입맛을 떨어뜨렸다. 식욕촉진제도 별 소용이 없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돼요. 그래야 항암도 할 수 있죠. 어서 나아야 내년부턴 언니하고 카페도 다니고 맛난 것도 대접하고 그럴 수 있잖아요."
우여곡절 끝에 항암을 다 마치고 예정대로 수술했다. 나는 수술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아내의 이름이 위에서 5번째 칸에 있었다. 아내의 이름 옆에 수술 중이라는 자막이 보였다. 수술을 마친 환자들 이름 옆에는 회복 중이라는 자막이 보였다. 환자 가족들이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환자를 맞으러 갔다. 아내는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예정 시간이 넘어도 모니터 자막에는 여전히 수술 중으로 적혀있었다. 지금쯤 회복 중이라는 자막이 보여야 했다. 조금 있으니 보호자를 찾는 방송이 들렸다.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근데 크기는 약간 줄었지만 크게 줄지는 않은 거 같네요 그리고 임파선 쪽 겨드랑이 부근에 조그만 종양이 두 개 새로 생겼는데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닙니다. 물론 다 제거했지만요."
결과적으로 암 크기를 줄여 수술하겠다는 당초의 계획은 약간 어그러졌다. 이제 아내의 왼쪽 유방은 없어졌다. 의사는 유방 복원 수술을 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지만 아내는 '칠십이 낼 모렌데 무슨…'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의사도 나도 아내도 가을에 있을 최종검진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수술 후 약 1개월 정도 몸을 추스른 아내는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치료 전 방사선 전문의는 아내의 납작해진 가슴에 붉은 특수 펜으로 선을 죽죽 그었다. 그리고 주의를 주었다.
"선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내가 방사선실로 들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보며 기다렸다. 아내 말고도 8명의 대기자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 환자가 뒤섞여 대기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저 남자들은 어떤 암으로 이곳에 온 걸까 궁금했다. 유방암은 아닐 테고 혹 대장암일까? 전립선암일까? 10분 쯤 지났을까. 낯익은 젊은 부부가 들어왔다. 여자는 민머리를 감추려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기억이 났다. '죽으면 어떡해'라며 울던 그 30대 여자였다. 아직 죽지 않고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왔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30분 정도 지나자 아내가 나왔다.
"여보야 이제 8부 능선을 넘었네. 구 장로 말처럼 금방 지나가네. 이제 9월에 다 나으면 언니랑 많이 놀러 다녀요."
나는 아내를 응원했다. 구 장로는 같은 교회 교인으로서 만날 때마다 아내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힘을 주곤 했다. 투병 중인 아내에게 소원이 있었는데 낫기만 하면 언니와 좋은 시간을 많이 갖는 거였다. 음으로 양으로 자신을 도와준 언니에게 진 빚을 그렇게나마 갚겠다는 것이었다.
최종 검사일이 한 달 후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아내의 배가 불러오고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의사도 고개를 갸웃했다. 한 달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우리는 서둘러 검사를 받았다.
"이상하네. 수술 당시 사진에는 별 이상이 없었는데…"
딸과 나만 따로 부른 의사는 판독지에 있는 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자기도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간에 전이되었습니다. 간 기능이 거의 상실되어 황달이 오고 복수가 차는 겁니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한 달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딸과 나는 망연히 허공만 바라보았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그날 이후 딸과 나는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했다. 여수에 가서 짚라인을 타기도 하고 유명한 간장게장집도 갔다. 동해안에 있는 간절곶에 가서 해변을 거닐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차도 마셨다. 맛집도 찾아다녔다. 부산 다대포 해변에서 맨발로 걷기도 했다. 그러다가 상태가 악화되면 다시 입원하고 호전되면 퇴원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아내는 점점 기력이 떨어졌다.
아내는 입원할 때마다 링거거치대에 최소 서너 개의 비닐 팩을 달았다. 그 중 빠지지 않는 게 있었다. 점점 심해지는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진통제였다. 날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졌고 진통제의 농도도 짙어졌다. 나는 아내가 침대에 누울 때나 일어날 때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비닐 팩에서 가슴에 박힌 케모포트로 연결된 선이 꼬여 애를 먹었다. 특히 화장실에 갈 때는 내가 항상 옆에 있어야 했다.
아내가 화장실 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나는 불침번을 서듯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새벽 1시건 3시건 아내가 일어나려는 기척이 있으면 아내를 도와야 했다. 잠이 부족해지자 나도 모르게 지쳐갔다. 그날은 아마 깜빡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느낌이 이상해 눈을 떠보니 아내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우리 병실 쪽 복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중간 통로를 가로질러 맞은편 복도로 뛰어갔다. 아내가 보였다. 아내는 하의가 반쯤 벗겨진 줄도 모르고 링거거치대를 질질 끌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눈은 반쯤 초점을 잃었다.
"여보야."
나는 흐느끼면서 아내를 끌어안았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병실에 와서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다행히 아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내가 천국으로 떠나기 나흘 전부터는 휠체어로 이동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정리를 하셔야 합니다."
일반병동에서 퇴원하던 날 의사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우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내를 육신의 고통 없이 보내주고 싶었다.
"여긴 어디에요?"
아내가 몽롱한 얼굴로 말했다.
"자기가 너무 아프다 하니까 안아프게…"
나는 호스피스 병동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내가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다고 했다.
"자기랑 딸한테 짐만 되어서 미안해요."
아내가 울음을 터트리며 어린애처럼 말했다. 기도할 때 말고는 살면서 여간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내였다.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자기 통해 이쁘고 착한 딸도 주시고 우리 가족 모두 예수 믿고 천국 갈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아내를 꼭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여보야. 정말 고마워. 내겐 영원히 자기밖에 없어."
내가 아내에게 해줄 마지막 약속이었다. 딸이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왔다.
"아빠. 제대로 못 주무셨을 텐데 오늘은 집에 가서 주무시고 아침에 오세요."
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몇 시간이라도 푹 자고 싶었다. 얼마나 잤을까. 휴대폰 소리에 잠을 깼다. 딸이었다.
"아빠, 엄마가 이상해요."
병원에 도착하니 새벽 4시였다. 아내는 내가 올 때까지 버텼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했다. 아침 안개가 걷히고 천국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순간임을 나는 직감했다.
"여보야."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
"엄마 가지마."
딸은 엄마 손을 잡고 흐느꼈다. 나도 아내의 손을 잡고 울었다. 문득 아내가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아침 안개와 같이 잠시 왔다 가는 인생길, 100년을 사나 50년을 사나 천국의 시계로 보면 다 똑같은 한 점, 같은 시간이 아닐까요?"
이럴 줄 알았다면 아내의 말대로 항암치료를 하지 말 것을 그랬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가슴 한쪽을 도려내고...... 고통만 당하다 떠난 아내. 하나님을 사랑했던 아내는 분명 천국에 갔을 것이다. 더는 아프지 않은 그곳에서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어머니도 만났을 것이다.
"홍고추 1개 사용합니다."
재생속도를 0.75에서 표준인 1로 끌어올렸다. 갑자기 셰프의 말이 빨라지고 억양이 한 옥타브 높아졌다.
"애호박 1개 사용합니다. 양파 반 개 사용하는데요. 반은 마지막에 넣고 반은 볶을 때 사용할 겁니다. 청양고추 3개 사용합니다."
탁탁탁탁탁탁탁- 대파를 써는 셰프의 칼소리가 일정 간격으로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나는 손이 베이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재료들을 썰었다. 눈이 찡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대파나 청양고추를 썰었기 때문인지 좀 전에 썰어두었던 양파 때문인지 아니면 혼자 요리하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서 흘리는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차돌박이 150그램 사용합니다. 4인분에 150그램이 딱 적당합니다. 이렇게 잘잘하게 썰어가꼬 사용해야 합니다. 안 그라면 드실 때 굉장히 사이즈가 커가꼬 먹기가 불편하거든요."
셰프는 가위로 차돌박이를 잘게 잘랐다. 나도 따라했다.
"이 차돌은 냄비에 바로 부어줍니다. 가스 불을 좀 약불로 시작합니다. 처음엔요, 달라붙어부니까 약불로 시작해서 천천히 볶아주면 됩니다. 타지 않게 약불로 꼭 해주세요. 뚝배기가 있는 분들은 뚝배기에 해도 맛있거든요. 이렇게 살짝 볶아졌으면요 여기다가 양파 사분의 일 쪽만 넣어줍니다. 그리고 된장 3스푼 넣습니다. 다진 마늘도 1스푼 넣습니다. 천천히 볶아줍니다. 된장이랑 같이 볶으면 짠맛이 어느 정도 날라가면서 더 깊은 맛이 됩니다. 가스불을 중불로 해놓고요 천천히 볶아줍니다."
나는 처형으로부터 얻은 토종 된장과 마트에서 산 된장을 반씩 섞었다. 볶는 내내 차돌박이에서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군침이 돌았다. 오늘 요리는 성공할 것 같았다. 나도 셰프가 된 기분이었다.
"양파 들어가면 차돌박이의 느끼함을 더 잡아주니까요. 환상의 맛이 되는 거죠. 이렇게 한 2분 정도 볶았으면 이때 인자 멸치 다시마 육수를 바로 부어줍니다."
나도 육수를 부었다. 열심히 셰프 뒤를 쫓아가는데 셰프는 늘 저만치 먼저 가 있었다.
"애호박 썰어놓은 거 바로 넣어줍니다. 호박이 익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요. 먼저 넣어주세요. 이렇게 거품이 올라 오며는요. 살짝 한 번 걷어내 주세요. 이렇게 거품을 걷어내 줘야지 깔끔하거든요."
나도 거품을 걷어냈다. 세프보다 거품이 더 많이 생겼다. 걱정이 많으면 거품이 더 많이 생기는 법이라고 아내는 농담을 하곤 했다.
"고춧가루 1스푼 넣습니다. 그담에 오늘의 신의 한 수 청국장 1스푼 넣습니다. 이 청국장만 들어가면요. 구수하니 이루 말할 수가 없죠. 한 번 저어주고요. 그담에 청양고추 넣고요. 양파 아까 사분의 일 쪽 남은 거 마저 넣습니다. 여기다가 버섯 좀 넣어도 좋고요. 감자도 좋고 냉이 같은 거 무 한 조각 넣어도 좋고 국물이 더 진하고 굉장히 맛있어집니다."
나는 감자, 무 냉이는 생략했다. 미처 준비가 안 된 것들이었다. 대신 여동생으로부터 얻은 깻잎을 넣었다.
"이 정도 끓여졌을 때 아까 대파 썰어 놓은 거 바로 넣고요. 홍고추 바로 넣어 줍니다. 대파가 들어가면 또 시원해 불죠. 마지막으로 두부 150그램 넣습니다. 드디어 차돌 된장찌개가 맛있게 완성되었습니다."
셰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의 된장찌개도 완성되었다. 야-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치칙-하는 잡음과 함께 셰프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나는 '좋아요'를 꾹 눌러 셰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다음 유튜브를 껐다.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완성된 차돌박이 찌개에서 올라오는 김 사이로 아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아내의 생전에 왜 이런 된장찌개를 만들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인생은 연습이 없다며 늘 내게 잘하라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단 하루라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내가 병실에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을 해 줄 걸.
나는 차돌박이, 된장, 청국장, 두부, 애호박과 팽이버섯 그리고 표고버섯이 잘 어우러진 차돌박이 된장을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카톡으로 아내와 처형에게 자랑할 작정이었다.
"제부, 식사는 잘 챙겨 먹습니까?"
아내보다 열 살 위인 처형은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묻곤 했다. 아내는 틈만 나면 나에게 언니에 대해 말했다. 언니는 자신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라며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냥 그럭저럭 먹고 삽니다."
"그럼 안돼요. 어떻게든 잘 챙겨 먹어야 해요. 그래야 천국에 있는 순냄이가 걱정을 안 하지."
처형은 아내를 언제나 경상도식으로 순남이가 아닌 순냄이로 불렀다. 그게 더 정감이 갔다.
"제부, 직접 요리하기 어려우면 반찬가게나 재래시장에서 사다 먹고요. 삼시 세끼 식당 밥만 사 먹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내가 만든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처형은 내가 만든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제 끼니 문제로 내 걱정은 안 하겠지.
아내는? 내게 어떤 말을 해줄까? 나는 하늘을 보았다.
나는 가장 먼저 천국에 있는 아내에게 내가 만든 차돌박이 된장찌개 사진을 카톡으로 전송했다.
"여보야 안녕, 내가 만든 차돌박이 된장찌개야. 어때?"
잠시 후 내 휴대폰에서 카톡카톡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보낸 카톡이었다.
"오구오구, 우리 춘돌씨. 짱이네 셰프 뺨칠 정도네. ♥♥♥♥♥♥♥."
하트 모양을 여러 개 날리는 것은 기분이 좋을 때 하는 아내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그 버릇을 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나를 춘돌씨라고 부르는 것 또한 우리 가족의 단톡방에서 늘 보았을 터였다.
"엄마 휴대폰은 제가 간직하고 싶어요."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후 딸이 말했다. 무남독녀로 오랜 기간 객지 생활을 한 딸은 엄마와의 추억이 더 애틋했을 것이다. 나는 아내의 휴대폰을 딸에게 양보했다. 아마 엄마의 휴대폰을 고이 간직하고 싶다는 딸의 말이 없었더라면 내가 아내의 휴대폰을 간직했을 것이다. 아내의 휴대폰은 예전 번호 그대로 우리와 함께 잘 있다. 나는 아내의 휴대폰으로부터 온 카톡을 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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