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 품어왔던 말 / 정덕화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정덕화 님.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정덕화 님.

1.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1950년 유난히 추웠다던 그해 12월, 영일군(현재 포항시) 흥해읍 소한리에서 저는 태어났지요. 아주 먼 옛날, 이방원의 탄압을 피해 도망쳤다는, 정몽주 선생의 후손들이 자리 잡은 정씨의 집성촌입니다. 이름은 큰아버지께서 지어주셨지요.

전쟁터에 징집되신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도 돌아올 수 없었답니다. 전방의 포성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아비가 걱정되었던 것일까요, 저는 유난히 자지러지게 울었다 합니다. 포병으로 징집된 아버지는 깡마른 5척 단신이었지요.

어디선가, 아버지는 그 작은 체구로 포탄을 힘겹게 날랐을 것입니다. 전선 어디선가 아버지는 두고 온 가족 걱정에 그렁그렁 눈물을 흘리며 포탄을 쏘아댔을 것입니다. 포성이 울리고 파편이 튀길 때마다, 죽음이 자꾸만 어른거릴 때마다 아버지의 기분이 어땠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저의 자식이 저의 상처에 대해 알지 못하듯 저도 제 아버지의 아픔을 온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몸피는 작지만 마음은 컸던 아버지는 원체 말수가 적고 점잖으셨지요.

양식이 부족했던 그해 겨울, 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아 맏딸이자 핏덩이인 저를 어르고 달래느라 전쟁의 고난이 배가 되었다 합니다. 어머니가 무엇을 먹고 젖을 짜 저를 먹였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지요. 어머니는 전쟁에 나간 남편을 걱정하며 어떻게 양식을 마련하였는지, 어디 의탁할 곳은 있었는지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집성촌이라 다행이었지요. 정몽주 선생의 사당을 중심으로 전통사회의 미덕이 잘 보존되었던 그 동네의 인심은 전쟁 중에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제 고향 사람들은 조용하고 묵묵히 고통을 함께 견뎌냈습니다. 운명공동체처럼 멀든 가깝든 일가친척이 힘을 모아 민족의 시련기를 꿋꿋이 견디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4년이 넘어서야 겨우 귀가할 수 있었지요. 징집된 지 7년 만의 일입니다. 저는 얼굴이 시커멓게 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가 낯설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보면서, 그것이 저의 몸에 흐르는 피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어부셨습니다. 요즘처럼 엔진의 도움 같은 건 없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그랬듯 아버지도 노꾼이 되어 스스로 노를 저어 배를 움직였지요. 더 멀리 나가면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따랐습니다. 기상이 갑자기 악화되면 요즘처럼 엔진의 힘으로 금방 귀항할 수 있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해변에서 가까운 데서만 그물을 치면 놀래기처럼 작고 맛없는 고기만 구할 수 있었지요.

바다는 아버지의 또 다른 전쟁터였습니다. 출항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적병처럼 사납고 포악한 바다는 언제 어떻게 파도가 칠지 미리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매복해 있는 적병처럼 잠잠히 있다가도 순식간에 거친 파도를 일으켜 아버지에게 앙칼진 손아귀를 뻗었습니다. 아버지는 앙상한 팔뚝으로 포탄을 닦고 옮기고 쏘듯이 기다란 노를 밀고 젓고 당겼지요. 전쟁터에서 그랬듯 바다에서도 생환해야 했지요.

하루는 새벽에 출항한 아버지가 오후가 늦어도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돌아오시지 않는 아버지, 그건 저에게 큰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일곱 살이 되도록 뵙지 못한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의 부재를 저는 두려워했습니다.

"아버지 찾으러 가자."

열 살쯤 되었을 때였나, 저는 여동생 복화의 팔을 잡아당겼지요.

"언니야, 아버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복화가 물었지만 저는 대꾸 대신 뗏목을 묶어둔 노끈을 몰래 풀었습니다. 미역을 채취하는 집안 어른의 낡은 뗏목이었습니다. 낡았지만 질 좋은 통나무에 송진을 진득하게 먹여놓고 기다랗고 튼튼한 노가 달려 있었습니다.

60년도 더 된 일이라 제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나선 게 아니라 동생이 심심하다고 칭얼거려 놀아준 것일 수도 있지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심심해서 복화를 꼬드긴 것일 수도 있고요.

그렇게 어린 자매의 출항이 시작됐습니다. 가냘픈 손목이라 혼자서는 노를 저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어야 했지요. 아버지가 어떻게 되신 건 아닌지 저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구조하러 가야 했습니다.

"언니야, 내 힘들다."

복화가 칭얼거렸지만 저는 동생을 달래며 얼른 아버지를 찾아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땅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는 어떤 자력 같은 것이 있어서 그 구역을 사람 힘으로 벗어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힘겹게 노를 저어봤자 몰려오는 파도에 뒤로 밀리면 도로 제자리였습니다

"복화야, 힘들어도 더 세게 저어봐라. 내가 신호를 줄 때 힘 좀 줘라."

저는 파도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파도가 밀려올 땐 힘을 아꼈다가 다시 파도가 바다로 빠져나갈 때 노를 저어 파도를 타기로 한 것입니다. 인자한 영일만 바다는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바다는 저희를 쓰다듬듯 부드러운 파도를 보내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그 파도는 뗏목을 밀어 육지의 인력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지요.

아버지처럼 자그마한, 그래서 항구라고 말하기도 쑥스러운, 바위를 옮겨 조성해둔 작은 방파제에서 점점 멀어지자 저도 겁이 덜컥 났지요. 하지만 아버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모험을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언니야, 무섭다. 돌아가자."

"언니야, 내 배고프다. 밥 묵고 싶다."

복화는 계속 칭얼거렸습니다. 동생에게 미안했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지요. 아버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무사히 잘 계신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습니다.

"복화야, 신기하제? 하늘이랑 바다랑 똑같이 생겼다."

저는 훌쩍이는 동생을 달래려고 예쁜 그림을 보여주듯 수면을 가리켰습니다. 맑은 하늘이 환상처럼 바다에 그대로 비쳐 어디서부터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경계가 없는 듯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그 장면만큼은 아직 또렷이 기억납니다. 그날 바다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저에게 드러냈습니다.

그 깨끗한 바다 저만치에 어선들이 작은 섬처럼 떠 있었고, 그 작은 섬들은 이따금 잠시 결박이 풀려 떠돌 듯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영일만을 뒤덮은 뭉게구름이 산처럼 솟구쳐 모두를 감싸주고 있었습니다.

"어기여차!"

더, 더, 더 멀리 나아가자 그물을 끌어당기는 어부들의 기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멸치 비늘이 튀었습니다. 어부들은 밝은 햇살 아래에서 은빛 갑옷을 두른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보드라운 바람은 겁에 질린 저와 복화를 달래주듯 푸근하게 쓰다듬고 지나갔습니다. 그 바람 덕에 영일만에는 기다란 물비늘이 길처럼 기다랗게 났습니다. 물비늘이 햇빛을 만나자 이번엔 어부들이 그 금빛 윤슬에 물들어 황금빛 갑옷을 두른 듯했습니다. 배들 사이로 날치 몇 마리가 하얀 빛을 반짝거리며 날아오르다가 다시 추락하고, 또다시 날아오르기를 거듭했다. 저는 그 날치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어디 계시노? 언니야, 보이나?"

보일 리가 없었지요. 드넓은 영일만 바다에서 아버지를 어떻게 찾겠습니까. 저 멀리 장기곶이 영일만의 경계를 표시했으니 그 안쪽에 계신 건 확실했습니다. 이제 너무 멀리 와버린 듯했지요. 소한리 동네가 작고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불안해져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지요. 여기서 더 멀리 가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영일만 저 끝에 있던 하얀 뭉게구름이 먹구름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먹장구름은 바다에서 안 좋은 징조입니다. 날은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부드럽던 바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심술 난 샛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바닷물이 날치처럼 찰랑찰랑 뛰어올랐습니다.

"언니야, 내 진짜 무섭다. 이제 내캉 돌아가자."

"그래, 그라자. 아부지도 집에 가셨을 거다."

동생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가냘픈 손으로 뭍을 향해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천 개의 얼굴을 가진 바다는 어느새 노기를 띤 표정을 지었지요. 바다는 함부로 물로 나온 저와 복화를 꾸짖는 듯했습니다. 쉽게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니야, 와 뗏목이 안 나가노?"

복화 말처럼 아무리 노를 저어도 뗏목은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이러다가 풍랑이라도 만나면 끝장이었습니다. 저 멀리 장기곶 부근에서 벼락이 치는 게 보였습니다. 곧이어 우르르 우르르 성난 천둥이 우리 귓전을 때렸습니다. 저는 겁이 나서 부르르 떨었지만 동생을 책임져야 했지요.

"복화야, 미안타. 빨리 좀 젓자. 더 세게 젓자. 우리는 살 수 있다. 돌아갈 수 있다!"

저도 겁이 났지만 동생 복화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어차피 만난 위기라면 돌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왕 만난 불운이라면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맞부딪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아이들의 힘만으로 점점 난폭해지는 바다를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찰랑거리던 물은 이내 작은 파도가 되어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다를 비추던 해님도 사라졌고, 꽃처럼 예쁘게 반짝거리던 윤슬도 시들어버렸습니다.

힘이 빠졌지요. 저는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저였습니다. 아버지는 풀뿌리라도 삶아 먹여야 한다며 뒷산에서 이것저것 약초를 캐 저에게 먹였습니다. 그런 저가 바다에 맞설 수는 없었습니다. 바다가 술렁거리자 뗏목이 연약하게 종이배처럼 기우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복화는 울음을 터트렸다. 저도 울고 싶었지만, 지금 뗏목의 선장은 저였습니다. 선장은 어떤 순간에도 울어서는 안 됩니다.

"복화야, 집에 가자!"

저는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껏, 잘 짜지지도 않던 어머니의 젖을 먹었던 그 기운까지 모조리 쏟아냈습니다.

집에 가자는 고함을 어느 어부가 들었던 것일까요. 급히 귀항하던 어선들이 저의 뗏목으로 접근했습니다.

"느그 우영이네 알라들 아이가? 파도치는데 여서 뭐하고 있노?"

먼 친척뻘 되는 집안 어른이었습니다. 그분은 귀항하느라 급한 와중에도 배를 뗏목 쪽으로 붙여 저희를 태웠습니다. 저와 복화가 어선에 올라타자 주인 잃은 뗏목은 영일만 한가운데를 향해, 소용돌이에 빨려가듯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집에 가보니 아버지는 진작 귀가해 계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았고, 복화는 토끼눈처럼 빨개진 눈으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어머니에게 안겼지요.

바다는, 그리고 이 작은 소동은 앞으로 펼쳐질 저의 인생을 상징합니다. 그날의 일은 미리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온갖 풍파와 모진 고생을 감내해야 했던 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수밖에 없었고, 돌파할 수밖에 없었던 저의 인생은 바다를 닮았습니다. 바다에서 나는 것을 먹고 자랐기 때문일까, 저는 바다를 닮아갔던 것이지요.

2. 혼인과 짧은 단꿈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인근 동네 청년이었습니다. 체구가 크고 단단했고, 성격이 단순한 남자였습니다. 그만큼 무뚝뚝하고 궂은일도 털털하게 잘 잊어버리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해양경찰에서 순경으로 일하고 있었다. 작은 벼슬이지만 자긍심을 갖고 일하는 게 맘에 들었습니다.

"아버지도 바다에서 한 평생 고생하는데, 니는 혼인도 해경이랑 할라카나."

어머니가 슬쩍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들었지만, 험난한 바다에서 일한다는 게 영 불안했던 것이지요. 그래도 반대는 하지 않으셨지요. 적으나마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있으면 맏딸이 큰 고생은 안 할 듯싶었던 것입니다.

간소한 식을 올리고 곧장 남편이 발령 받은 속초로 갔습니다. 짧은 타지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신혼의 행복을 느끼고, 첫째 딸과 둘째 딸과 셋째 딸까지 낳았습니다. 연이어 딸만 낳은 저는 아들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아버지는 조상 제사를 엄숙히 모셨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차린 상은 부족해도, 제사가 있는 날에는 온 집안을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닦고 치우고 가지런하게 정돈했습니다. 제삿날은 아버지께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집안을 정갈히 하는 날인 듯했습니다. 제사가 아주 중요한 의례라는 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익히게 됐습니다. 어릴 때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장 먹을 것도 부족한데 왜 저렇게 제사에 집착을 하시는지.

제가 아이들을 낳고 시댁의 제사를 모시며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됐습니다. 자칫 제사를 소홀히 했다가 조상들이 노하실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재앙이 저희에게 닥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딸이든 아들이든 모두 소중한 자식이지만, 딸만 셋 낳은 저는 이제 그만 아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아들을 못 낳으면 장차 제사를 모실 손이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게 구시대의 인습 같고, 저를 옭아매는 포승이라 해도 저는 그런 인생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까지 감내했습니다. 장차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살아가는 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세 딸과 함께한 저의 짧고 달콤한 객지생활은 시아버지의 병환과 함께 끝이 났습니다. 속초에서 강원도 동해로, 다시 부산으로 이어지던 생활을 접어야 했습니다. 영일군 흥해읍 즉천리, 저의 시댁으로 가야 했지요.

3. 고무장갑이라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다면 이런 기분일까요. 저의 시아버지가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무뚝뚝하지만 효심 깊은 남편은 그 탐난다는 해경 본청 근무를 내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출셋길을 포기하고 일선 경찰서로 간 것입니다.

시아버지의 암은 간으로, 폐로 전이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려면 돈과 의사가 필요한데 시골에는 의사도 없었고, 집에는 돈이 없었습니다. 결국 몇 마지기 되지도 않는 땅을 팔아 돈을 마련했습니다.

세상일이라는 게 엎친 데 덮치는 일이 다반사일까요. 슬프고 힘든 일은 함께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힘든 와중에 남편의 조모께서도 중풍이 와 몸져누우셨습니다. 방 석 칸짜리 옹색한 시골집. 그 방 세 개 중에서 한 방에는 중풍으로 조모께서 누워 계시고, 또 방 한 칸에는 암으로 고생하시는 시아버지가 누워 계셨지요. 다른 방 한 칸에 저와 남편, 그리고 세 딸이 살을 맞대고 살았습니다.

저의 하루는 시조모의 대소변 묻은 이불을 빠는 것부터 시작됐지요. 70년대의 시골은 수돗물이 자주 끊겼습니다. 수돗물이 나온다 한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기에 함부로 이불 빨래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새벽 댓바람부터 저는 시조모의 이불을 들고 동네 냇가로 가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이불을 깨끗하게 빨았습니다. 저에게 닥친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해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지요 모두가 잠자고 있는 시간에 왜 자신만 깨어나 맨손으로 똥오줌 묻은 이불을 빨아야 하는지 구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이불이 제대로 세탁될 리 없었습니다.

얼음을 깨 양동이에 물을 퍼서 이불을 빨던 손은 고무장갑도 없는 맨손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고무장갑 하나 사주는 이도, 건네는 이도 없었지요. 그만큼 가난했고, 저의 고통에 모두가 무심했습니다. 모두가 고통 받는 중이었으니 저의 고통까지 함께 느낄 수는 없었다 생각합니다.

시어머니는 다리가 불편한 데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저와 대화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집에 더부살이하는 시동생들은 죽어가는 아버지와 한 방을 쓰며 형님인 내 남편에게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없는 집에 자식들만 늦여름 포도알갱이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었지만, 그들을 감당할 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새벽마다 동네 개울가에서 고무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똥오줌 묻은 이불을 빨고, 물동이에 차가운 물을 가득 담아 몇 번씩 집까지 왕복하며 물을 날랐습니다. 그러고서 얇디얇은 몸빼 바지 한 장 달랑 입고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야 했지요. 제가 가진 몸빼 바지는 고작 한 벌이었습니다. 그것을 저녁에 빨아 가마솥의 온기에 말려 새벽에 다시 입곤 했습니다. 나무하다가 몸빼 바지가 행여나 찢어질까 겁이 나 조심조심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마솥으로 밥을 하여 무수한 식솔들의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나면 셋째를 등에 업고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 했지요. 가스보일러는커녕 기름보일러조차 가질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도시가스가 들어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 제가 나무를 해놓지 않으면 온 식구가 추위에 떨어야 했고, 가마솥에 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송스럽게도 제가 해온 나무는 늘 충분치 못했습니다. 시아버지와 시조모의 방은 한겨울에도 서늘했습니다.

남편이 낡고 탈탈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포항해양경찰서까지 출근을 하고 나면 집안의 모든 대소사는 저의 몫이었습니다. 숱한 식솔의 세 끼 식사, 설거지, 빨래, 시아버지와 시조모의 병수발, 땔감 마련, 식수 공급, 딸 셋 돌보기…. 저는 새우잠을 자며 두 분 어른의 병수발을 들고 요강을 비워냈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해놓고 나면 논으로 밭으로 나가 논농사든 밭농사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지요. 그 모든 게 식솔들을 먹일 양식이었습니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집안에서 가장 미약한 존재인 며느리였지만,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려진 돌밭에서 돌을 드러내고 밭으로 일구어 정구지(부추)를 심었고, 버려진 높은 땅은 낮게 일구어 또 텃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낮은 땅은 흙으로 메워 봇둑을 만들고는 작은 논으로 개간했습니다. 저는 새벽 4시부터 자정이 넘도록 계속 일만 했지요. 힘들었지만, 누구에게 하소연하지 못했습니다. 힘겨움을 공감도 얻지 못했습니다. 식솔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못 낳아 괴로운 차에, 시누이는 혼인하자마자 아들을 낳았지요.

4. 고마운 영일만

좋은 날이 있으면 궂은 날도 있고, 흐린 날이 가고 나면 맑은 날은 또 오기 마련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리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원하던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날, 저는 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었지요. 동네 사람들은 "김가네에 아들 태어났다"라고 함께 기뻐해주었습니다. 병환 깊으신 시아버지는 손수 대문에 새끼줄을 걸어두셨습니다. 시아버지는 그토록 기다리던 손자와 함께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지요. 그리고 곧 돌아가셨습니다.

시어머니는 그 충격에 모든 걸 놓아버리셨고, 저에게는 더 많은 일감이 몰렸지요. 콩을 심어 메주를 쑤고 된장과 간장과 고추장을 담그는 일, 논에 파종을 하고 밭에 채소를 심어 기르고 수확하는 일, 증조부모까지 이어지는 제사와 두 차례 떠들썩한 시골 명절을 치러내는 일까지 모조리 제가 해내야 했습니다.

이를 악물었습니다. 물러설 곳도 없었고, 모두 해내야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위해 버텼습니다. 그러다 보면 좋은 일이 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궂은 날씨는 맑은 날씨의 예고이니 웃으며 견디고, 지금 맑은 날씨는 비구름의 예보이니 겸손히 대처하자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짐만으로 인생이 풀리는 건 아닌가 봅니다. 아들과 두 살 터울의 막내딸까지 태어나 이제 아이는 총 다섯이 되었습니다. 시동생은 총 넷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워 오빠에게 번번이 손 벌리는 시누이, 가정불화에 사고까지 겹쳐 큰형에게 손 벌리는 셋째, 전문대 진학을 원하는 넷째, 취직을 못해 집에서 더부살이 하는 막내까지, 몽땅 저와 남편이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습니다. 시아버지의 부재는 긴 그늘을 드리웠고, 그 모든 게 맏이 부부의 몫이었지요.

"이대로는 입에 풀칠도 못 하겠니더. 내라도 벌어야겠니더."

돈 많은 일본인들에게 성게알이 인기가 좋다 들었습니다. 성게양식을 하여 성게알을 수출업자에게 넘기면 얼마간의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일만으로도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하면서 성게양식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해본 일이라곤 집안일과 농사밖에 없던 저였습니다. 어떻게 해녀를 고용하고, 어떤 절차로 수출업체와 계약을 맺는지 아무것도 몰랐지요. 게다가 성게양식에 매달리면 자식들을 챙겨주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식들이 영영 밥을 굶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새벽부터 새벽까지 일을 했지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들은 종종, 사실 너무나 자주 혼자 라면을 끓여먹었습니다. 딸들도 보살필 수 없었습니다. 하는 데까지 했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돈도, 보듬어줄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용돈 한 푼 제대로 쥐어주지 못한 저는 그게 오늘날까지 마음이 참 아프고 미안합니다.

동네 공용 창고를 작업장으로 삼아 해녀 몇 명을 고용했습니다. 이게 잘될까 싶었지요. 두려웠습니다. 괜한 일을 벌려 그나마 몇 푼 모아둔 돈마저 날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두려운 만큼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몸을 놀렸습니다. 목욕탕에서 쓰는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 허리 한 번 못 펴보고 계속 성게 배를 갈랐습니다. 성게 배를 가르면 황금빛 성게알이 쏟아졌습니다. 영일만은 저의 노력에 후하게 화답했지요. 흔치 않던 성게가 바다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녀들은 힘들다고 입이 삐죽 나왔지만, 그것은 행복한 엄살이었지요.

그렇게 번 돈으로, 뼈가 빠지게 번 돈으로 시동생들 뒷바라지 하고, 다섯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길렀습니다. 첫째와 둘째가 고등학생, 셋째가 중학생, 넷째와 막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매일 새벽 도시락을 일곱 개씩 쌌고, 아홉 식구의 아침밥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전기밥솥도 들이고,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도 생겼지만, 저는 늘 여유가 없었다.

정신없이 일만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이를 악 물었습니다. 전방 포병부대에서 생환하신 아버지처럼 저도 이 전쟁 같은 팔자를 반드시 극복하리라 독하게 마음먹었습니다. 박복한 팔자라도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노력한 만큼 돌려주는 게 세상 이치가 아닐까요. 저는 성게 비린내가 온몸에 배고, 성게 내장이 온몸에 범벅이 되어도 무딘 식칼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다섯 아이들 중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다달이 시험을 쳐서 우등상을 받아오는 날, 신난 아들은 깨금발로 촐랑촐랑 뛰어서 작업장으로 왔습니다. 상을 받은 게 기쁜 게 아니라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어 기뻐한다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궁하고 삶이 스산해도, 아들이 받아온 그 종이 상장을 들여다보는 날에는 모든 고통이 녹아 사라졌지요. 그 상장 대신 똑같은 크기의 황금이라 할지라도 저는 아들의 종이 상장을 택했을 것이다.

먼 옛날, 아버지를 찾으러 나섰다가 죽을 뻔한 걸 영일만은 한 번 눈감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절대적으로 돈이 필요한 저에게 영일만은 넉넉한 소출을 약속했습니다. 저는 동네에서 풍어제를 지낼 때 진심으로 바다에 감사해 했습니다.

5. 장성과 이별

아이들이 자랄수록 저는 늙어갔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다가 늙어버린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큰 걱정거리 없이 지내고, 자식들 모두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첫째가 대학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딸을 객지에 두고 올 때 저는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는 한편 돈 걱정이 또 앞섰습니다. 성게 양식이 흥하여 몇 번의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부자가 된 것은 아니었지요. 여전히 형편은 쪼들렸습니다. 성게 양식 계약기간도 끝나 이제 돈 들어올 곳은 남편의 박봉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돈 들어갈 데는 많아졌습니다. 첫째의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했지만, 뒷일이 문제였습니다. 아이에게 돈을 전혀 부쳐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뭘 먹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걱정을 하면서도 저는 울며 애써 외면했지요. 무엇을 어떻게 먹고 뭘 입고 다니는지 뻔히 짐작이 가면서도 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걱정이 되어 딸이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딸은 하숙집에 없었습니다. 하숙집 여주인에게 물으니 아르바이트를 갔다고 합니다. 딸은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주로 대학생들이 노래만 부르는, 건전한 노래방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자칫 얄궂은 손님한테 험한 짓이나 당하지 않을까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딸은 그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느라 대학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 돈으로 아껴 살고 남은 돈을 되레 집으로 부쳐주었습니다. 죄인인 저는 그 돈으로 나머지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는 데 보탰습니다.

얹혀살던 막내 시동생이 돈을 벌어보겠답시고 우리 집 마당에 달팽이 양식장을 차렸습니다. 양식장이라 해도 조그마한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거기에 식용 달팽이를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마당에 꽉 차고 시야가 막혀 가뜩이나 갑갑한 가슴이 더 답답해지는 듯했습니다.

한국에서 식용 달팽이 양식이라니. 성공할 턱이 없었지요. 당연하다는 듯 실패한 막내 시동생은 농협에 어렵사리 취직을 하여 장가를 가며 따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좁은 집에 사는 식구가 아홉에서 여덟으로 줄어들 수 있었습니다.

둘째가 대구로 대학을 갔을 때, 어찌 사나 걱정이 되어 한 번 찾아가 보았습니다. 옷이라곤 한 벌밖에 없었고, 속옷만 달랑 세 벌 있는 게 전부였습니다. 저는 마음이 미어지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도 쉼 없이 부지런히 일했는데 저와 아이들은 늘 가난했지요. 둘째 딸은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버는지 얼굴이 새까맣게 타 있었습니다. 저는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셋째는 4년제를 못 보내주고 2년제에 보낸 일, 기대했던 아들이 대학 입시에서 쓴맛을 본 일 등은 저의 마음에 연거푸 생채기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궂은일은 기쁜 일의 예고편이 아니던가요.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기 마련이라고 마음을 편히 먹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저는 늙어 있었고, 첫째는 착하고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국어교사인 둘째도 듬직하고 탄탄한 직장을 가진 남자와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막내도 안정감 있는 남자와 결혼하여 예쁜 손녀들을 둘씩이나 낳아주었습니다. 가장 늦게 결혼한 아들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대학을 나온, 어질고 현명한 며느리를 만나 부산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인내였지만 이를 악 물고 버틴 세월이 값어치 없는 건 아니었지요.

셋째가 착한 사위와 결혼하기 하루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기절할 듯 슬펐지만 혼례를 앞두고 상을 치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초상에는 삼일장의 이틀째이자 셋째 딸의 결혼식을 끝낸 날 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례식장으로 가던 때, 아들과 함께 택시를 탔습니다.

"선린병원으로 가주소."

이 짧은 문장을 뱉던 저의 말이 파르르 떨리더니 결국 택시 안에서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비좁은 택시 안에서 몸부림치며 절규하고 울부짖으며 아버지를 불러댔습니다. 택시를 내려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저는 발을 뗄 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부축으로 겨우 아버지 영전 앞에 선 저는 털썩 주저앉아, 이제는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아버지를 불러댔습니다.

"제발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덕화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그날 셋째 딸의 결혼식에서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늦은 오후의 장례식장에서는 살아오며 가장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눈물로 아버지를 되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시다 가신 저의 아버지. 저는 시댁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작 아버지에게 고기 한 점, 쌀 한 톨 제대로 보태줄 수 없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뱃일을 놓으신 후에는 포항의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셨습니다. 왜소한 체구로 포탄을 날랐듯 자그마한 몸피로 벽돌과 시멘트를 짊어지고 공사판 계단을 오르셨지요. 그렇게 번 돈으로 외손자에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철없는 아들은 그 돈으로 비비탄 총을 사서 친구들과 총싸움을 했습니다. 그 장소는 아버지가 벽돌을 나르시던, 아들이 다니던 중학교 부근의 공사장이었습니다.

제가 시집오던 날, 아버지는 시댁까지 저를 데려다주었습니다. 시댁 부근에 다다라 저는 애써 웃으며 아버지에게 이만 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발을 떼지 못하셨습니다. 눈에 그렁거리는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아버지, 그만 가시소. 내는 괜찮니더."

아버지가 가시고 나면 저는 혼자가 되는 것입니다. 낯선 시댁에서 외롭게 버텨야 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 저까지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었습니다. 아버지는 발길을 돌리시다가도 계속 뒤를 돌아보셨습니다. 제가 가시라고 손짓을 해도 몇 걸음 못 가 또 뒤를 돌아보셨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제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함께 집으로 가자고. 가난하고 식구 많은 집 맏며느리로 들어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그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어찌 됐을까 그런 생각을 한 번씩 해봅니다.

어머니는 자애롭고 끈기 있고 참을성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저의 남동생이 반신불수가 되자 구순이 넘은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 안 남은 힘일망정 모든 노력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아들은 어머니와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였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숨결, 마지막 한 줌의 힘이 다하자 앞으로 고꾸라지셨습니다. 그때 저와 저 남편이 어머니의 집 현관문을 열고 막 방문한 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사위의 품에 쓰러지시며 길고 고단한 삶을 마치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남동생은 누운 채로 오열했고, 저도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기절을 할 것 같았지요. 어머니는 마침내 삶의 결박에서 풀려난 듯 무게가 가벼웠습니다. 앙상한 어머니가 식어갈수록 저는 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슬픔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늘 슬픔을 느끼며 살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슬픈들, 슬픈 일이 아무리 많은들 죽어버리면 그 무수한 슬픔과 눈물은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요. 아들을 걱정하여 눈도 제대로 못 감으신 어머니의 영면을 보며 저는 어머니의 슬픔과 눈물은 이제 대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싶었습니다. 이대로 증발해버린다면 그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6. 희미해지는 기억 그리고 펼치는 말

다섯 자식도 모두 장성하여 가정을 일구었습니다. 이제 저는 걱정할 게 없는 듯했습니다.

어릴 때 일은 거의 다 기억이 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최근의 일이 기억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알던 길도 헤맬 때가 있었고, 돈을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 돈을 어디에 뒀는지도 몰랐습니다. 방금 전에 아들에게 들은 말도 기억이 나지 않아 똑같은 말을 묻고 또 물어도 다시 잊어버렸습니다. 평생을 하던 주방일인데도 국 끓이는 게 여간 어렵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의사는 경도인지장애라고 진단 내렸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알츠하이머 치매로 악화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간 제가 겪은 일들은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저의 마음을, 소중한 기억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강적입니다. 그 어두운 그림자는 저의 머릿속을 어두컴컴하게 만들었습니다. 저의 기억을 앗아갔고, 저의 마음을 음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비관적인 때조차도 낙관적인 마음으로 버티던 저였지만, 이번만큼은 전에 없이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글을 쓰라고 했습니다. 약물치료는 기본적으로 하되,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배움이 짧아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는 글을 잘 쓴다고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뒤로 저는 배움 대신 노동으로 내몰렸습니다. 저 자신도 가난한 집의 맏이였고, 가난한 집의 맏이에게 시집을 간 탓입니다.

억울하고 슬프고 서러웠습니다.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하늘은 늘 흐르기만 한 것인지, 왜 언제나 고난만 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이제 조금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가장 무서운 병이 문지기처럼 제 앞을 막았습니다. 이런 게 인생인가 봅니다.

저처럼 배운 게 없는 사람이 이제 와서 글을 써본다는 게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제발 글을 쓰라고 성화를 부렸습니다. 글을 통해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기억과 상처를 끄집어내고, 잠시 아프더라도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도록 강권했습니다.

평생 말없이 묵묵한 저였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웅크린 말들은 입안에서만 웅얼거릴 뿐 종이 위에서는 정신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래도 쓰고 또 썼습니다. 소박한 글도 쓰고, 슬픈 글도 쓰고, 기쁜 글도 썼습니다. 쓴 것을 읽고 고치고 다시 쓴 후에 또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여태껏 박복한 팔자와 숱하게 투쟁해 왔듯 이번 파도도 넘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찾겠다고 뗏목을 타고 나설 때 파도를 역이용했듯 저는 이번 전투에서도 이 파도에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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