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 방탄복 / 이진희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이진희 님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이진희 님

"탄창 제거!" 

"노리쇠 확인!" 

"어깨 위로 총!" 

"격발!" 

예닐곱 명의 무장 군인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따닥 따닥 따닥 따닥... 

다행히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다들 수고했다. 방탄복과 수류탄, 탄창을 반납하고 들어가서 위장크림 깨끗이 지우고 푹 쉰다. 이상!" 

소대장의 짤막한 훈시를 끝으로 2시간여에 걸친 DMZ(비무장지대)의 수색 및 정찰 작전은 종료됐다. 

내 또래들이 군대에서 구경조차 못했을 방탄복을 처음 입어본 것은 1980년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휴전선의 철책 문을 열고 DMZ 안으로 들어가 적의 침투 여부를 수시로 확인하는 수색 및 정찰 작전에 처음으로 참가하던 날, 나는 방탄복을 지급받았다. 묵직한 느낌, 땀내 절은 퀴퀴한 냄새 그리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묘한 전율. 말로만 듣던 DMZ 안으로 진짜 들어간다는 흥분과 긴장감에 가볍게 손이 떨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에서 온 전화

'민정경찰' 명찰을 달고 매달 생명 수당을 받는 최전방 수색 대대의 군 생활을 다시 떠올린 것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간 지 한 달쯤 지난 1995년 12월 초였다. 중앙 일간지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갓 부임했을 때였다.

서울로 보내는 기사를 팩스 기기에 밀어 넣고 창밖을 내다보며 기지개를 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벽시계가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울과 모스크바 간의 시차는 6시간. 서울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신문사 편집국의 아침 부장 회의가 대충 끝날 시간이었다. 그때 서울과의 소통은 주로 팩스를 통해 이뤄졌는데, 밤낮이 애매한 시차와 연결이 툭툭 끊기면서도 값만 비싼 국제전화 때문이었다. 부임 후 서울 사무실과의 전화 통화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새벽에 전화기가 울린다는 것은, 신문사에 급박하거나 위중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뭐지? 지금 이 시간에? 어제 저녁까지 별일이 없었는데, 뭔 일이 터진 건가?" 

가벼운 떨림을 느끼며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혹시나 서울에서 걸려오는 급한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할까 봐 벨 소리를 최대한 크게 키워둔 상태였다. 지체하면 옆방에서 곤히 잠든 아이들이 깰 수도 있었다. 

"여보세요." 

"이특(이 특파원의 준말) 잘 지내?" 

역시, 서울에서 걸려온 부장 전화였다.  

기자들의 업무상 전화 대화는 여느 사람들에 비하면 엄청 짧은 편이다. 항상 마감 시간에 쫓기는 생활 속에서 생긴 직업병인지도 몰랐다.

현장에서 기자들이 사건의 개요를 좀 장황하게 설명할라치면, 데스크(사무실에서 주로 후배 기자의 기사를 챙기는 차장급 기자)는 "알았어, 근데 야마(山의 일본어 표기, 기사의 핵심 내용을 뜻하는 신문사 은어)가 뭔데? 어, 그래? 어, 알았어. 일단 (기사를) 보내봐"하고 툭 끊곤 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특파원들과의 통화에서는 좀 다정하게 안부도 묻고, 불편한 게 없는지 챙겨보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보통은 그렇지 않았다. "잘 지내?"라는 말 한마디로 안부는 끝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잘 알겠지만, 4년이나 끈 보스니아 내전(정확하게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이 곧 끝날 것 같아. 사라예보(보스니아의 수도)에서 당사자들이 데이턴 평화 협정(냉전 종식 후 유고연방의 해체 과정에서 발발한 보스니아 내전을 마무리 지은 협정)에 서명도 하고, 전쟁도 끝낸다니, 우리도 현장에 한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가야지요." 

"그지? 이특이 한번 가지." 

"제가요? 발칸반도는 파리 나와바리(영역을 뜻하는 일본어, 파리 특파원이 챙기는 지역) 아닙니까?"

설명은 간단했다. 특파원 생활 3년을 마치고 곧 귀국할 파리 특파원을 전쟁터로 내보낼 수 없으니, 모스크바에서 가면 안되겠느냐는 협박성 요청이었다. 

사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었다. 전쟁 취재? 멋있지 않는가? 모스크바로 나오기 전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요르단이나 파키스탄으로 취재간 선배의 후일담을 들으며, 한편으론 부럽고, 한편으로 나도 한번 가야지, 각오를 다지기도 했던 전쟁 취재였다. 생각지도 않던 순간에 그 기회가 나에게 온 것이었다.

◆ '인종 청소'의 현장, 사라예보 취재 준비

전화를 끊고 난 뒤 마음이 바빠졌다. 모스크바에서 전쟁 중인 사라예보로 가는 방법을 찾는 게 가장 급했다. 모스크바의 한국대사관과 서울에 있는 외무부 출입기자를 통해 알만한 사람들을 두루 수소문했다. 

다행히 민병석 주(駐)체코 대사가 보스니아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크로아티아 단장으로 1만 5,000여 명의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관장하고 있었다. 또 한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주로 경력을 쌓아온 송혜란씨였다. PKO 전문 요원으로 보스니아의 정세를 분석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보스니아 내전 현장에서 활동한 한국인은 그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보스니아 내전의 PKO 업무를 그 정도로 맡았다면, 대한민국의 국력을 웬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평화 협정의 서명이 추진되고 있지만, 보스니아 현지에서는 여전히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또 사라예보에는 유엔 PKO 관할의 수송기로만 갈 수 있다고 했다.

'흠, 아무나 갈 수 없고, 아주 위험한 곳이라면 바로 DMZ나 마찬가지인데...'

최전방 수색 대대의 군 생활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며 방탄복을 처음 입었던 10여 년 전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에이, 방탄복은 무슨? 여기서 어떻게 방탄복을 구해요? 설사 구한들 갖고 나갈 수 있겠어요?" 

러시아에 정착한 지 이미 4년을 넘긴 대기업 주재원 K형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랬다. '이 세상에서 못 하는 게 없다'는 모스크바의 마피아에게 알음알음 선을 대 방탄복을 구했다고 치자, 그걸 출국할 때 공항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반출할 수 있겠는가?

당시 러시아 내부 정세로 보면 불가능했다. 소련의 해체와 옐친 대통령의 시장경제체제 도입으로 러시아는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특히 소련 국영기업의 민영화 붐을 타고 일부 세력이 국유재산과 이권을 몽땅 차지하기 위해 마피아 조직을 앞세워 곳곳에서 경쟁자 암살에 나설 때였다. 방탄복은 그들에게나 필요한 장비였다. 러시아에서 그것을 찾는다는 건, "나는 마피아"라고 대놓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황(戰況)으로만 보면, 사라예보 취재는 종군 기자로 전투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나토(NATO)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보스니아 내전은 한 당사자인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공격 의지가 완전히 꺾여 '강제 휴전'에 들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언제든지 실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화약고(火藥庫)인 것만은 여전했다. 그래서 실제로 사라예보에 발을 디디게 된다면, 방탄복은 자동차의 안전벨트와 같이 꼭 필요한 장비였다. 

1980년대 초에는 전방에서 근무한다고 해서 모두 방탄복을 지급받는 건 아니었다.

훈련병 생활을 끝내고 GOP(General Out Post, 휴전선의 철책을 지키는 육군 경계부대) 경비 연대가 아닌, 매일 DMZ 안에서 작전하고, 교대로 GP(Guard Post,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최전방 감시 초소) 근무에 들어가는 사단 직할 수색대대에 배속됐지만, 실제 DMZ 작전에 투입되기 전까지는 방탄복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횡사한 1979년 10.26 사건이나 이후 12.12 사태, 이어진 1980년 5.18 광주사태로 전군에 데프콘(Defense Readiness Condition, 방어준비태세) 셋(3)이 발령됐지만, 방탄복이 지급되지는 않았다. 완전군장을 꾸린 상태에서 대기하다 여느 때처럼 DMZ 작전에 투입될 때 비로소 본부에서 수류탄, 탄창과 함께 방탄복을 나눠주었다. GOP 인근 지역에서 무장탈영병 수색에 나설 때에도 방탄복 지급은 없었다.

방탄복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작전에 직접 투입될 때만 제공되는 구명 장비였다. 적어도 최전방 수색 대대 요원이라면, 여름내 두꺼운 방탄복을 입고 DMZ 안으로 들어가 적어도 두어 시간, 길게는 밤을 꼬박 새우며 사정없이 달라붙는 모기떼와 싸워야 했다. 또 작전 중에 가끔 소리 없이 나타나는 야생동물에 턱하니 숨이 멎거나, 잠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다가 작전 조장으로부터 "야, 이 새끼야, 너 죽을래. 여기서 진짜 죽어나가고 싶어?"라고 한 소리를 들어야 했던 순간들을 함께 한 게 방탄복이었다.

◆자그레브에서 PKO 수송기를 타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떠나는 출발 날짜가 다가오자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적어도 방탄복은 챙겨야 할 텐데, 불안해하는 표정이 겉으로도 드러난 모양이었다.

"생명보험에 가입해야 하지 않나? 회사에서 들어준대?"

아내도 옆에서 안절부절했다. 그럴 만도 했다. 엊그제까지 치열했던 전쟁터로 가는 취재였다. 그렇다고 현지에서 도움을 줄 사람이나, 비상연락망 같은 필수 정보들을 모스크바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전쟁 취재의 매뉴얼조차 아직 언론사에는 없던 시절이었다. 

자그레브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인터내셔녈 헤럴드 트리뷴(IHT) 신문을 나눠주었다. 톱(Top) 기사부터 보스니아 이야기였는데, 사진 속 방탄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개 UN이나 PKO라고 쓴 방탄복 차림이었다. 심란해지는 마음을 "일단 가서 부딪쳐 보자"는 각오로 다잡았다.  

보스니아 내전은 유고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1992년부터 4년간 무려 20만 명의 희생자와 수백만 명의 피란민을 낸 민족·종교 분쟁이다. 같은 하늘을 이고 큰 불만 없이 살아온 이웃끼리 갑자기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 무슬림(회교도)으로 편을 갈라 박 터지게 싸운 전쟁이다. 여기에 정교회 대(對)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대립까지 포개지면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이후 '인종 청소'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인종 청소'라는 단어가 국제 사회를 제2차 세계대전의 악몽에 빠뜨리자 나토가 서둘러 군사 개입에 나섰다. 나토군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전폭기들이 유고연방(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와 사라예보 등 주요 도시에 폭탄을 쏟아부었고, 지중해에서는 전함들이 불을 뿜었다. 유고연방의 맏형 격인 세르비아는 우군을 찾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끝내 손을 들었다. 그 결과, 합의된 게 데이턴 평화 협정이었다.

내전은 전후(戰後) 유고연방을 구성해온 6개 공화국 중 5개 공화국이 냉전 종식 후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됐다. 세르비아는 소련 해체 당시의 러시아와 달리 기존의 연방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했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가 이에 힘으로 맞섰다. 특히 인구 및 종교 구성이 복잡한 보스니아에서는 사라예보를 중심으로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계 주민들과 다수를 점하는 회교도 간에 독립 전쟁을 넘어서는 살육전이 펼쳐졌는데, 무려 4년을 끌었다. 

자그레브의 12월은 조금씩 내리는 눈발 속에 연말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한가하게 이국의 정취에 취해 있을 틈이 없었다. 사라예보로 가는 유엔 PKO 수송기를 어디서 타는지, 필요한 서류가 있는지, 방탄복이 필요한지, 그럴 경우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등등 현지 정보를 수집하는 게 급했다.

그리고 처음 방문한 자그레브도 일단 눈에 담아야 했다. 혹시 사라예보로 가지 못한다면, 대안으로 크로아티아 방문기라도 써야 할지도 몰랐다. 자그레브의 도심은 별로 크지 않았다. 기마상이 우뚝 서 있는 반 옐라치치 광장을 중심으로 이방인이 볼 것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기마상에는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이끌어낸 영웅 반 요십 옐라치치 장군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광장을 벗어나 각종 상점들과 식당 등이 즐비한 거리를 따라 10여분 걸어가면 저 만큼에 성 마르코 교회가 보였다. 레고로 만든 동화 속 성당을 연상시키는 자그레브 랜드마크의 하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짐을 챙겨 공항으로 떠났다. 자그레브 공항 한 켠에 자리 잡은 PKO 섹터는 조용했다.

등록 센터에 명함을 건네고, 사라예보행 수송기 탑승이 가능한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담당 군인이 두말 않고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주었다. 수송기는 서너 시간 후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담당 군인은 "기다리는 동안 주변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핵심은 수송기 탑승 순서였다. 보스니아 정부 관리들과 PKO 업무 종사자들은 1순위, 일반 외교관들과 세계적인 언론사 등은 2순위, 뭐 그런 식이었는데, 보통 1, 2순위 그룹은 언제든지 탑승에 문제가 없을 성싶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는 맨 마지막 4순위. 아무리 먼저 등록을 했더라도 앞 순위의 사람들이 탑승을 원하면 예약한 자리도 빼앗기는 게 그곳의 원칙이었다. 탑승 순서를 굳이 안내한 이유였다. 또 맨 끝 순위가 감당해야 하는 서러움이기도 했다.

역시 첫날은 운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낭을 짊어진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시끌벅적하게 무리지어 들어왔다. 수송기 출발 시간에 맞춰 들어온 듯했다. 눈에 띄는 건 역시 손에 든 방탄복. 군인들이야 방탄복을 입는 게 당연하지만, 민간인들의 손에도 짐 꾸러미와 함께 방탄복을 들려 있었다. 실체가 불분명한 불안감이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등록 창구에서 "오늘은 탑승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서야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왔다.

'트렁크를 끌고 다시 호텔로 가야 한다고?'

'에이 뭐, 각오했던 일 아닌가? 이참에 방탄복 구할 데가 어디 없나 찾아보자.'

그렇게 스스로 달랬다. 

호텔에 다시 짐을 풀고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길을 택했다. 일부러 대로를 피해 골목길로 들어섰다. 총기류 등 위험한 물건을 취급하는 곳은 비밀스러운 뒷골목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영 눈에 띄지 않았다.

"저기요."

지나가는 남자를 붙들고 물었다.

그는 "독일어를 아느냐"고 되물었다. 영어도, 러시아어도 잘 통하지 않는, 냉전 시절 '제3세계'를 이끈 유고연방의 현주소였다.

두 번째로 향하는 공항 길은 전날보다 한결 쉬었다. 하지만 똑같은 질문, 등록, 기다림, 뒤늦게 들어오는 군인과 민간인들.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다시 PKO 섹터를 떠나야 했다.

"사라예보로 가는 유엔 수송기에 자리가 없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내일 아침에 또 나가봐야지요."

서울로 자그레브 상황을 보고했다.

"지금은 된다 안된다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어요. 운이 좋으면 갈 수 있다고 해서, 여기서도 메이비(Maybe) 항공이라고 한답니다."

즉석에서 만든 조어(造語)였다. PKO 섹터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는 maybe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는데, 한마디로 사라예보 공항의 안전이 확보되면 수송기가 떠나고, 아니면 못 떠난다는 뜻이었다. 모스크바에서 간 4순위 기자에게는 '운이 좋으면 타고, 나쁘면 못 탄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맞았다. '아마도 항공'이라는 조그만 박스 기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몇 번 헛걸음을 한 뒤에야 비로소 PKO 수송기에 오를 수 있었다. 사라예보로 떠나는 수송기는 가운데에 화물을 가득 싣고, 벽면을 따라 길게 나무의자를 배치한 구조였다. '옛날(1970년대 고등학교 시절) 입석 시내버스와 비슷하네' 생각하며 앉으려는데, "사라예보엔 무슨 일로 가느냐"는 질문이 들려왔다. 먼저 자리를 잡은 금발머리 젊은 친구였다. 그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동양인이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인데, 평화 협정 취재하러." 

"그래? 여긴 처음이지? 어디에 묵을 건가?"  

"아직.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모르니 예약을 할 수가 없었지. 방이 없을까?" 

"아, 근데, 방탄복은? 없어? 공항에 누가 마중은 나와?" 

"방탄복? 자그레브에서 못 구했어. 탑승을 막지도 않던데. 시내로 들어가는 교통편은 공항에 내리면 알아봐야지."

그 친구의 얼굴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곧바로 읽어낼 수 있었다. 사라예보 취재는 그렇게 대책 없이 시작됐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식 문화에 젖어 있는 한국 언론의 막무가내식 취재 관행 탓이었을 것이다.

그 친구는 더욱 겁을 줬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 길목에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방탄복도 안 입고 괜찮겠어?"

'아, 어떻게든 방탄복을 구했어야 하는구나.'

'현타'(현실자각 타임)가 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라예보 공항에 착륙할 때까지 심란한 마음을 채 가누지 못했다. 수송기가 착륙하기 위해 기수를 낮추자,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산악지대에는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공항에도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하루에 겨우 수송기 한두 대 정도 오르내리는 조그만 사라예보 공항은 그마저 반쯤 허물어진 상태였다.

트랩에 올라서니 먼저 내린 현지인들이 여기저기서 마중 나온 사람들과 힘껏 포옹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과 상봉하는 것 같았다. 멀리 입구 쪽에 세워진 차량에는 거의 유엔 소속 표시가 붙어 있었다. 내려오는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라예보의 운은 자그레브와 달랐다. 어떻게 하지? 멍하니 주위를 살피고 있는데, 옆자리의 금발 친구가 나타났다. 

"마침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같이 타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앗싸, 이건 또 웬 횡재?'라는 생각도 잠깐, "땡큐"를 반복하며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차량 탑승자들은 모두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나만 홀로 저격수 앞에 맨몸으로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저릿하게 떨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차량이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오를 때, 금발 친구가 '저격수들이 자주 나타나는 첫 번째 장소'라고 알려줬다. 순간, 몸이 움츠려졌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날은 더 어두워진 상태였다. 전방 군 생활의 경험상 아무리 뛰어난 저격수라도 어두운 곳의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조금 안도했다.

내심, '난 DMZ를 들락거린 놈인데'라는 오기도 없지 않았다. DMZ 수색 및 정찰 작전에 참가하고, 실전 훈련 중 수류탄 오폭 사건까지 겪은 10여 년 전의 군 생활(1979~1982년)을 억지로 떠올리며, "까짓것,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중얼거렸다.

◆사라예보는 취재 전쟁 중?

우리가 탄 차량은 1시간 가까이 달려 사라예보 시내 대로변에 있는 홀리데이인 호텔의 후문 쪽에서 멈췄다. 호텔 안으로 들어서니, 정문 쪽으로는 모래주머니를 쌓은 바리케이드가 높게 쳐져 있었다. 대로 반대편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공격으로부터 숙박객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로변에 접한 건물들은 제각기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의 총탄을 막기 위해 나름의 조치들을 마련해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뒤편에 조성된 일종의 안전지대에서 주민들은 일상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하룻밤 숙박비가 상상을 초월했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오늘 하루 생각지도 못했던 운과 무사함에 감사하며 침대에 몸을 눕히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제 뭘 어떻게 취재해서 기사를 쓰나?'하는 고민도 한순간, 긴장이 풀리며 곯아떨어졌다. 어느 순간, 총소리와 같은 날카로운 소음에 놀라 잠에서 깼다. '전쟁터에 오긴 왔나 보다.' 가슴을 졸이며 귀를 쫑긋 세웠으나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라예보의 아침 햇살은 차고 밝았다. 호텔 주변 지형이나 읽힐 겸 바깥으로 나가니, 현지인 두셋이 급히 다가왔다.

"딱시(택시)?"

"노, 땡큐."

호텔 뒤쪽에는 개인 차량으로 움직이는 임시 택시들이 서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이 집요하게 나를 쫓아왔다.

"베리 익스펜시브? 칩 호텔?"(비싸지? 싼 호텔?) 

보스니아식 영어인지 모르지만, 대충 그렇게 들렸다. 

맞아, 지금 내가 가장 급한 게 값싼 호텔을 구하는 거지.

사라예보의 회교도 안전지대에는 홀리데이인 호텔 외에 합리적인 가격의 호텔이 하나 더 있었다. PKO 수송기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금발 친구가 추천한 보스니아 호텔이다.

"혹시 호텔 보스니아 알아?"

돌아서서 현지인에게 물었다. 

"알지, 거기엔 방이 없을 텐데.. 가볼래? 데려다줄게."

전쟁터에서 이런 호의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려다준다잖아. 이번에도 "땡큐"를 연발하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라예보에서는 계속 운이 따른다는 게 비록 착각이더라도 일단은 좋았다. 

보스니아 호텔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방이 있나 가봐."

보스니아 호텔은 들은 대로 수수했다. 젊은 남자 프런트 직원이 고개를 들어 '어, 웬 동양인'이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역시 방은 없었다. 친절하게도 그는 홀리데이인 호텔로 가보라고 권했다.

약간 풀이 죽어서 나오는데, 현지인은 웃으며 더듬더듬 길게 말했다. 

"이제 알겠지? 보스니아 호텔에는 전 세계 기자들이 다 와있기 때문에 늘 방이 없다고. 한번 오면 보름 정도 묵으면서 취재하고, 후임자에게 그 방을 넘기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절대 방을 안 내놔."

주요 외신 기자들은 두세 명이 돌아가면서 보스니아 호텔에 묵고 있었다. PKO 측에서 왜 그들에게 수송기 탑승 2순위를 부여하는지 이해가 갔다. 그들은 사라예보에 처음 온 한국 기자와는 취재하는 방식이나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모스크바로 떠나던 날, 자그레브 공항에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숙소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의 제안을 듣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런 거였다. "친구 집이 전쟁 통에 비어 있다. 그 집을 싸게 빌려줄 테니, 거기서 묵어라."

"그래, 일단 가 보자, 보고 결정하자."

그의 차를 타고 허름한 어느 아파트 건물 앞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으로 올라갔다. 아파트는 비교적 깔끔했다. 물도 잘 나오고, 화장실도 깨끗했다.

하루 대략 50달러, 일단 닷새 치 돈을 그에게 건넸다. 홀리데이인 호텔의 하룻밤 숙박비보다도 쌌다. 그제야 우리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는 하루에 얼마씩 더 주면 차로 어디든지 안내하겠다고도 했다.

'아차, 미끼에 물렸구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이젠 모든 걸 운에 맡기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어젯밤에 총소리 같은 게 났는데, 지금도 저쪽에서 탕탕 총을 쏘는 거야?" 

"가끔."

"그럼 방탄복이 있어야겠는데, 방탄복을 구할 수 있어?"

"미스터 리, 진짜 총 쏘는 곳으로 갈 거야? 난 안 가. 위험한 곳으로는 절대로 안 가. 그러니 (방탄복은) 필요 없어."

그는 단호했다.

짐을 옮기고 아파트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 싶었다. 아니, DMZ 안으로 처음 들어온 것처럼, 주변이 안전한지 미리 수색정찰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사라예보 도착을 알리는 '기사 1보'(첫번째 기사)도 준비해야 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그와 헤어졌다.

이튿날, 그의 안내로 전쟁 중에 부상자가 여럿 나온 한 가정을 찾았고, 그 지역 유력자라는 분과도 만났다. 세르비아를 욕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순간도 자랑하듯 빼먹지 않았다.

사라예보 사람들과의 첫 만남은 현장 분위기 파악에 좀 도움이 될 뿐, 기사로 다룰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데이턴 평화 협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영자지라도 하나 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예보를 떠날 때까지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평양으로 연결하는 사라예보 국제전화

A4 용지에 펜으로 눌러쓴 사라예보 도착 1보를 서울로 전송하기 위해 전신 전화국으로 갔다. 

신청서에 분명히 서울, 사우스 코리아라고 적었는데, 들려오는 질문은 엉뚱했다. 

"피양(평양)?" 

"노! 노, 세울(서울), 사우스 코리아." 

한참 뜸을 들이던 여성 교환원은 서울로는 연결이 안 된다고 했다. 

"네? 왜요?" 

"국제전화를 연결하는 코드가 없어요."

황당한 일이었다. 냉전 시절, 제3세계의 애매한 외교 노선으로 서울보다는 평양과 교류가 더 잦았던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서울로 연결되는 국제전화 코드마저 없다니, 이해가 안 됐다. 사라예보는 우리나라 탁구계의 전설인 이에리사·정현숙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사상 처음으로 우승한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린(1973년 4월) 도시가 아닌가. 1984년에는 제14회 동계 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다. 그런데 왜? 전쟁 중이어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사를 일단 모스크바로 전송하고, 모스크바의 집에서 다시 서울로 팩스를 보내는 것이다. 

자그레브에서 갑자기 소식이 뚝 끊겼으니, 서울에서도 내 소식이 무척이나 궁금할 터였다. 사라예보로 무사히 갔는지, 잘 갔다면 왜 여태 아무런 연락이 없는지.

홀리데이인 호텔에 들어간 도착 첫날, 프런트에 국제전화를 쓸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내일 전신 전화국으로 가라"고 했다. 어차피 사라예보 도착 1보를 전송해야 하니, 그때 서울과 통화할 요량으로 굳이 전화 통화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로 통화할 방법이 없다니,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일단 모스크바의 집으로 국제전화를 연결해 '사라예보에서 서울로는 국제전화가 안 된다'는 사실을 전해 달라고 했다. 기사는 모스크바를 통해 보내겠노라고 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울컥했다. 아내가 "몸은 괜찮으냐?", "방탄복은 구했느냐?"는 등 안부를 묻고는 "여기는 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때, 전화기 부스 너머로 아내의 눈물을 본 듯했다.

"나도 다 괜찮아, 여기서 방탄복 입을 일은 아직 없고. 총소리는 들었지만, 뭐 그리 위험하지는 않아. 걱정 마." 

아내를 그렇게 달랠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계 점령 지역을 돌아보기로 한 날, 차는 회교도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사라예보 공항 쪽으로 달리다가 방향을 꺾어 작은 다리를 건넜다. 햇살에 빛나는 붉은색 작은 표지판들이 눈을 찔렀다. 페인트가 살짝 벗겨져 글자를 다 읽을 수는 없지만, 해골바가지 그림이 들어 있는, DMZ 안에서 늘 보고 살았던 지뢰지대 표지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전석에서 그가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여기서부터 세르비아계 지역이야.'

홀리데이인 호텔 앞 대로를 건너면 바로 세르비아계 점령 지역에 닿았지만, 그 길은 너무 위험했다. 저격수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지목된 건물도 여럿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한참 돌아 세르비아계 점령 지역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10여 년 전, DMZ 안에 있는 GP로 부식을 공급하기 위해 차를 타고 철책 문을 지나갈 때의 팽팽한 불안감을 몸이 먼저 감지한 듯했다. 나도 모르게 양손이 가슴께부터 몸을 아래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방탄복이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입고 온 두꺼운 외투가, 무릎 사이에는 M16 소총이 아닌 작은 가방이 만져졌다. DMZ 안 소롯길 양쪽의 철조망에 매달려 있던 지뢰밭 표시의 해골바가지가 차창 위로 어른거렸다. 문득 땀에 절은 방탄복이 그리웠다.

'진짜 괜찮을까? 여기는 안전한 곳이라고는 했는데.' 

억누를 수 없는 불안감 속에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은 전쟁의 황폐한 흔적들뿐이었다. 한쪽이 무너져 내린 건물, 벽 곳곳에 새겨진 포탄과 총탄 자국, 곳곳이 패인 도로. 작은 마을 하나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있었다.

30분쯤 돌아다녔을까? 어디선가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놀라는 기색이 전혀 아니었다. 계속 앞으로 차를 몰았다.

"뭐지?"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이야."

4년여를 숱한 폭발음 속에서 살아온 그는 소리만 듣고도 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쉬지 않고 달리다가 다리를 건너 세르비아계 점령 지역을 빠져나왔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만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 통에 폐허가 된 마을들만 여럿 지나갔을 뿐이다. 차에서 내려 마을을 살펴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어땠느냐?"고 그가 물었다.

나는 "무서웠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회교도든, 세르비아계든 오래전에 이미 다 떠나 버린 곳이야. 주변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지."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PRESS라고 쓴 차량을 만났다. 전방 사단의 수색 대대 1호 차에서나 볼 수 있는 긴 안테나를 달고 있었다. 위성 전화였다. 외신 기자들은 기사를 송고하기 사라예보 전신 전화국을 찾아가는 게 아니었다. PKO 수송기 탑승 2순위와 4순위의 차이였다. 

◆1회용 가스라이터가 비상등

사라예보의 겨울 해도 일찍 떨어졌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향했다. 자동차 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길거리 어둠을 몰아내는 듯했다.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하니, 사방이 온통 암흑천지였다. 등화관제를 위한 두껍고 검은 커튼 때문이 아니었다. 주변 전체가 정전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했다.

"노 라이트(불이 없는데)."

차에서 내리면서 걱정스럽게 말하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라이트 이즈 아웃(불이 나갔어). 11층이야"라고 말해줬다.

건물 입구에서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어두컴컴한 계단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 발자국 소리에도 신경이 거슬렸다. 어둠 속 공포가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든 1회용 가스 라이터가 생각났다.

'그래, 그거라도 켜서 올라가자.'

1회용 가스라이터는 아쉽게도 자주 꺼졌다. 깨진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훅 날아가 버리기도 했고, 엄지와 검지로 작은 버튼을 눌러 불길을 계속 잡아두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막판에는 거친 숨에 라이터가 제구실을 못하기도 했다. 그래도 비상등 역할을 해준 1회용 가스라이터 덕분에 별 탈 없이 11층에 도착했다.

전기 불도, 난방도 없는 방에서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웠다. 깜깜하고 무서운 밤이었다. 세르비아계 지역을 돌아본 르포 기사를 써서 내일 아침에 모스크바로 보내야 하는데, 불이 없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새벽녘에 너무 추워 눈을 떴다. 턱이 다 떨렸다. 손발과 얼굴은 언 것 같았다. 탁자 위 전등 스탠드의 스위치를 누르니, 앗싸, 불이 들어왔다. 정전이 끝난 모양이었다. 가방을 뒤적이는데 손끝에서 뭔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진짜 손이 곱았나?'

얼른 부엌으로 가 전기 레인지를 켰다. 까만 판이 붉은빛을 띠며 조금씩 달아오르자, 손을 갖다 댔다. 따스한 온기가 온몸으로 천천히 번졌다. 그러나 검지의 불편함은 여전했다.

자세히 보니, 엄지 끝과 검지 앞쪽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아~, 머리를 때리며 지나가는 그 이유는, 분명했다. 11층까지 걸어올 때 어둠을 몰아낸 1회용 가스라이터가 남긴 불의 흔적이었다. 불길은 약하지만 자꾸자꾸 켠 라이터 불에 엄지 끝과 검지가 덴 것이었다. 펜을 쥐고 기사를 쓰는 데에도 조금은 불편했지만, 그만하기 다행이었다.

그날 약속시간에 맞춰 차에 오르니, (데이턴 평화 협정 체결을 위한) 무슨 중요한 회의가 열린다고 그가 알려줬다. 

"거기 한번 가보자."

"미스터 리, 거긴 못 들어가. 무슨 문서라도 있어야지."

설사 그렇더라도,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분위기라도 챙겨봐야 하는 게 기자의 숙명이다.

"일단 가보지, 뭐."

회의장 출입이나 고위 인사와의 접촉을 섭외해 주는 소위 '픽서'(중간 알선책)도 없는 상태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현장에 접근할 엄두는 처음부터 내지 않았다. 그냥 멀찌감치 눈으로 보고 돌아가는 분위기라도 느껴볼 참이었다. 그것으로 르포 기사는 쓸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다. 회의 내용은 서울에서 데스크가 잘 알아서 기사에 녹여주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가 탄 차량은 마을 공회당 비슷한 건물이 보이는 도로 한곁에 일단 멈췄다. 방탄복 차림의 군인들과 무장 차량, 유엔 표시 차량들이 건물 주변에 몰려 있었다. 한눈에도 중요한 인물들이 모이는 회의가 열리는 게 분명했다. 자동차 검문검색을 거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다.

차에서 내려 작은 가방을 메고 건물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쭈뼛쭈뼛하면 더 이상할 것 같았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신분을 밝혔다. 의외로 쉽게 들어가라고 길을 터줬다.

건물 입구는 1차 검문에 불과했다. 뒤이어 2차, 3차 검문이 기다리고 있었고, 목에 ID 카드(출입증)를 단, 혹은 유엔 조끼를 입은 사람들만 출입을 허가해 주었다. 혹시나 안이 보일까 봐, 열고 닫히는 문 사이로 기웃기웃했다.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러나 어떤 상황인지는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회의 중에도 브레이크 타임(휴식 시간)이나 식사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나오겠지.'

현장 기자들의 장기인 '뻗치기'(원하는 대상이 나타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일)에 들어갔다. 오가는 사람들도 유심히 살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시락 같은 게 반입되는 걸 보고는 '뻗치기'도 포기하고 말았다. 한심했다. 데이턴 평화 협정의 사라예보 서명식을 취재하기 위해 어렵게 날아왔는데, 그 근처에도 못 가보다니 아쉽기만 했다. 

◆자그레브 공항의 PRESS 룸

사라예보의 뒷골목이 눈에 익을 즈음, 자그레브로 돌아가는 유엔 PKO 수송기에 다시 올랐다. 한국 언론사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사라예보에 들어온 건 기적 같은 일이었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기내에서도 찜찜함을 털어버리지 못했다.

자그레브에서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말이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겼다며? 진짜 고생했다"는 부장의 위로를 듣고서야 사라예보 현장 취재의 찜찜함을 좀 털어낼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보다 훨씬 여유로운 마음으로 자그레브 시내를 다시 걸었다. 붉은 조명이 번쩍이는 섹스 숍에도 들렀다. 얼굴을 뜨겁게 달굴 만한 '밤의 기구'들이 각각의 쓰임새대로 진열돼 있었다. 플레이보이 잡지보다 더 생생하게 여성의 몸을 담은 잡지들도 많았다. '저런 여자에게 방탄복을 입혀 놓으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실없이 웃음이 삐져나왔다. '방탄복 안에는 여성 속옷을 입어야 목숨 끈이 길어진다'던 L 병장님의 짓궂은 웃음이 떠올라서였다.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한 자그레브의 마지막 밤을 기대하며 그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는 후련함이 마음 한구석을 들뜨게 만들었다. 공항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구경도 하고 선물도 골랐다. 공교롭게도 그때 방탄복을 손에 든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었다. 덕분에 발견한 놀라운 장소, 공항 내 프레스 룸이었다. 자그레브를 통해 오가는 보스니아 내전 취재 기자들을 위해 마련된 방이었다.

프레스룸의 한쪽 벽에는 지난 수년간 이곳을 다녀간 전 세계 기자들의 명함이 꽂혀 있었다. 그 수많은 명함 위에 한국 기자로는 또 처음으로 H일보 명함을 꽂았다. 비슷한 시기에 보스니아 내전을 취재한 모 신문의 취재팀은 육로로 사라예보에 들어갔으니, 이곳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다른 벽면에 걸린 커다란 사진이다. 무장한 군인이 총구를 돌리는 모습에 카메라를 든 많은 사진기자들이 동시에 땅에 엎드리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었다.

무장 군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기자들은 이미 땅바닥에 엎드린 상태이지만, 그 뒤의 기자들은 거의 무릎을 꿇었고, 그다음 열은 허리라도 굽혔으나 맨 뒤 열의 기자들은 아직 어정쩡하게 선 자세로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자들이 위험을 감지한 순간, 동시에 엎드렸지만, 그 속도에 차이가 나 마치 '도미노의 패'처럼 앞으로 연이어 무너지는 듯한 모습을 담고 있었다. 가슴이 뭉클한 그 순간에도 PRESS가 선명한 방탄복이 나의 눈을 찔렀다.

만약 저 총구가 불을 뿜었다면, PRESS 방탄복이 흉탄(兇彈)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무장 군인의 총구가 진짜 두렵지 않았을까?

◆체첸 전쟁 취재를 포기한 까닭

사라예보의 아슬아슬한 기억들이 잊혀질 즈음, 서울 데스크에서 전화가 왔다.

"어이, 이특. 지난번 사라예보 좋았어. 이제 다 잊었지? 사라예보 2탄 한번 할까?" 

"예? 사라예보를 또 가라고요? 왜요?"

"아니, 사라예보 말고. 이특도 이미 기사 썼잖아. 러시아 정부와 체첸 반군이 평화 협정을 맺으려고 한다는데, 체첸 한번 갔다 오지." 

"체첸요? 진짜 위험하다던데"라며 잠깐 뜸을 들인 뒤 "알았습니다. 가지요, 뭐"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좋아, 좋아. 준비되면 연락해. 기대하고 있을게. 한 번 더 하자고."

제1차 러시아-체첸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체첸전 참전 병사들의 어머니들이 길거리로 나와 빠른 종전과 평화 협상을 촉구하면서 러시아 여론은 협상으로 크게 기운 상태였다.

전쟁이냐, 협상이냐의 갈림길에 선 체첸 전쟁 취재는 기자적 본능을 자극했다. 모스크바 특파원으로서 체첸전 현장에 대한 호기심도 없지 않았다.

H일보와 다양한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러시아 국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사 측에 협조를 요청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온 이 통신사의 이반(우리는 서로 이반, 리로 불렀다)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말렸다.

"체첸은 너무 위험해. 우리(리아 노보스티 통신사)도 많이 죽거나 다쳐. 리가 원한다면 러시아 정부군과 체첸 반군 측으로부터 프레스 카드는 받아줄 수 있는데, 목숨이 아깝다면 가지 마라."

가장 먼저 방탄복이 떠올랐다. 사라예보에선 결과적으로 방탄복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체첸은 그 중압감부터 달랐다.

"프레스 방탄복은 구할 수 있는 거지?"

"그럼, 현장에서 우리 기자들이 프레스라고 쓰인 방탄복을 줄 거야. 리, 그건 잘 때도 벗으면 안 돼. 벗는 순간 탕탕.." 

반쯤 농담이 섞여 있었겠지만, 이 말에 솔직히 겁이 났다. 내가 처음 방탄복을 입고 군 생활을 한 곳은 휴전 후 30년 가까이 지난 비무장지대였다. 또 멋모르고 겁 없이 뛰어든 사라예보는 사실상 전쟁이 끝난 상태였다. 

체첸은 완전히 달랐다. 방탄복이 있고 없고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총알이 날아오고, 포탄이 펑펑 터지는 곳이다. 이반이 결사적으로 말릴 만큼 위험한 지역이라는 것은 현지 TV의 화면만 봐도 분명했다. 리아 노보스티 통신사도 내가 체첸에서 어떤 변고라도 당하면 도덕적으로 책임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주변의 만류를 이유로 체첸의 현장 취재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서울에 통보했다.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체첸의 전투 현장으로 갔다면, 살아남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반은 그 후에도 리아 노보스티 통신사의 누가 죽고, 누가 크게 다쳤다고 알려주곤 했다.

보스니아와 체첸, 그리고 방탄복. 되돌아보면 모든 건 나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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