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이 없는 자는 외롭다. 그러나 그만큼 자유로운 삶도 없으리라.
자유, 나는 여태 자유인이었다. 자유를 누리는 만큼 외롭지는 않았다. 답사를 위해 사찰이나 성당에 들리면 본능처럼 기도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내게 믿음은 강요되지 않은 의지대로 펼친다는 의미다.
나는 그동안 남들과 살짝 다른 여행을 하였다. 역사가 내게 던지는 교훈과 우리 문화재가 주는 진실에 사색하고 사고하며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보약을 즐겼다. 그런 까닭에 어느 시각으로, 어떤 모습으로 얼마만큼 보느냐가 더욱 중요한 내 마음 순화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참 오래되었다. 삶의 유목민에겐 여행이란 필연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하는 마력이 있다. 여행은 자아라는 퍼즐을 맞추기 위한 시간, 내 삶도 그러하였다. 인생은 종착역보다는 그 자체를 즐기는 과정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결과가 빤하다면, 길을 벗어날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현실이 암울하고 넌더리 날 때 도망치듯 훌쩍 떠나곤 하였다. 어쩌면 아내가 휘두르는 묵언의 폭력에 맞서는 비장의 카드였다. 패배의 조각을 모아 괴나리봇짐에 쟁여 넣고 상황을 벗어나곤 했던 것이다. 예봉을 피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간극의 마력이 주는 아쉬움과 허전함에 대한 미련을 극대화하기 위한 까닭이다. 어쩌면 그녀에겐 해당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외로워도, 아무리 외로워도 혼자 걷는 발길은 절대고독도 녹이는 마법이 발휘되곤 한다. 누군가 깨끗이 쓸어놓은 길을 감사하며 그렇게 밟고 간다. 때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갈 때도 있다. 먼 길을 돌아갈 때도 있고, 험한 길을 헤치고 갈 때도 있다. 상상하며 길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길이 아닌 길도 갈 때도 가끔 있다. 구닥다리 카메라 둘러메고, 어쩌다 솜씨 없는 터수에 스케치북 하나 있으면 그만이고, 산문집 한 권 넣고 나면 가슴엔 행복한 포말이 몽글 솟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오는 땀방울이 기분 좋게 하는 이유란, 가끔 생각지도 못했던 횡재수가 있어서다. 산길에서 반기는 이름 모를 야생화 몇 송이 가냘프게 피어 있다거나, 답사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석탑 부스러기를 발견했을 때 들려오는 가슴의 환호성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실 더 한 것은 오다가다 만난 사람의 인연에 짙게 배 있는 삶의 진실이 숨어있어서다. 인연에는 세상사 고달픔을 잊게 하는 숨은 지혜가 담겨 있으며, 사람의 진솔한 향기는 머리와 가슴까지 맑게 해 주곤 한다.
어린 시절, 여명이 밝기도 전에 멀리 산사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를 들으며 힘겹게 단꿈을 밀어내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해 오던 신문 배달을 위해서였다. 사찰의 종소리는 나의 아침을 깨우는 소리이자, 어린 소망과 함께 하루를 여는 소리였다. 그래서인가, 굽이친 길을 돌아설 때 불어오는 단맛의 바람은 청량한 범종 소리로 변화되는 신기로 몸의 고단함을 잊는다. 자작자작 걷는 발걸음에 사색이 묻어나고, 삶에 힘겨웠던 시간도 맑게 정화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김없이 우리 옛사람들의 숨결이 담긴 이야기가 산길 끝에서 반긴다.
이 모든 게 문화재와 역사의 현장 답사쟁이로 살아온 삶이 이토록 행복한 까닭이다. 역사와 선현의 삶을 거슬러 오르면 종교의 편협함도 없으며, 강요하지 않은 자유로움이 널려있다.
"그거 찾아다니면 밥이 나와요, 술이 나와요?"
오래전 아내가 미련한 애착을 보다 못해 하는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술도 얻어 마시고 밥을 얻어먹는데….'
입에서 우물거릴 뿐 정작 대꾸는 할 수도 없다.
나는 답사 작가로 시작해 스토리텔링으로 입에 풀칠하는 프리랜서다. 나이가 많은 자에게 이 말은 곧 실업자란 뜻이다. 규모의 경제가 뚜렷한 지방 도시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일감이 그리 많지 않아서고, 머리에 서리 내린 필자가 젊은 친구들과 경쟁하기도 지친다. 그러나 여전히 서드 에이지(Third Age)라고 확신한다.
10여 년 몸과 마음이 자유롭게 지내다가, 만 10년 직장에 다녔다. 하지만 이도 출퇴근이 내 마음대로인 조건으로 쥐꼬리 급여를 선택하였다. 급여를 덜 받더라고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이후 재차 프리한 몸이 되길 올해로 5년째다. 이쯤 되면 나도 모르게 아이들이 뱃살공주라 부르는 아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알아서 기어야 한다는 뜻이지만, 추호도 자존감을 죽일 생각이 없었던 나는 필연적으로 아내와 팽팽한 긴장 상태가 유지되었다.
연애 5년, 결혼 34년 차 부부가 애증의 관계로 변한다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곤하긴 나도 마찬가지라 좋은 게 좋다고 알아서 처신할 때가 훨씬 많다. 집에 키우는 고양이 두 마리 치다꺼리는 온전히 내 몫이다. 싱크대 밀린 설거지는 기본이고, 아내 침대 정리는 옵션이다.
그동안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새로운 삶과 마주하였다. 이 말은 항상 초보 인생이었다는 뜻이다. 초보 회사원, 초보 신혼, 초보 사위, 초보 아버지, 초보 중년, 초보 장년, 초보 노년(?)에 접어들었다. 과거 경험이 지혜라고 하더라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른 살 전에는 두려워 말고, 서른 살 후에는 후회하지 말라고 하지만, 돌아보면 후회뿐인 삶은 변치 않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풍류를 핑계로 과거를 허비하였던 삶은 이제 낡고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변했고, 돈을 목적으로 살아왔던 과거는 삭막한 정서에 먼지만 폴폴 날리는 주머니가 된 지 오래다. 남보다 앞서 달리려 애쓰던 기억은 조급증만 키웠으며, 쾌락을 문화 향유라며 자위하던 때가 살이 되어 돌아와 흉년으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편률 된 시선으로 세상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아침에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린다. 내 과거로 인해 존재의 무게추가 그만큼 기울었다는 뜻이다. 필연이겠지만, 아내가 돌아올 때가 되면 내 가슴이 두근댄다. 이처럼 '두 근 세 근' 리듬을 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온몸의 피가 질량을 높이면서 긴장 상태에 돌입하고, 머리에 보이지 않는 촉수에는 빨간불이 켜진다.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 나는 오늘부터 공리주의자가 되어야겠다. 내 정체성의 핵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최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할 일이다. 시간의 실향민이 되어서야 어디 될법한 말인가. 선험적 경험이 지혜라니 어디 한 번 믿어보기로 한다. 기적을 믿지 않는 자는 현실주의자가 아니다. 결과가 이따위라서 그렇지 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고 오니 아내가 집을 나갔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행복을 만들고, 어떤 이들은 떠날 때마다 행복을 만든다.', 또 그가 한 말이다. '미인을 아내로 둔 남자는 범죄자다.'
"너는 너밖에 모르고, 나는 나밖에 모르고 우리는 똑같은 길을 걷지…"
범죄자는 '평행선'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아내 침대를 정리한다. 이제 이 집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물론 그리 길진 않겠지만….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하였다. 달도 차면 기울게 마련,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이 있다. 소파에 몸을 의탁하고 싶었으나 여느 때처럼 싱크대를 확인하였다. 하늘과 땅이 영구히 변함이 없듯, 빈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식탁 위에 제법 큰 플라스틱 통이 놓였다. 뚜껑을 열자, 뭔가 가득 들었다. 옆구리 터진 김밥과 주둥이 갈라진 김밥 꽁지가 비빔밥처럼 뒤섞여 비웃는다. 정녕 남편 먹으라고 해둔 것이렷다? 온전한 김밥은 어디로 가져간 것일까.
라면 반 개 삶고, 파 송송 썰어서 투입한 후 패잔병처럼 된 김밥 무더기를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시야가 흐릿한 것이 본인에 대한 자애로움이 넘치자 자기연민이 도를 넘었다. 목이 조이듯 말랐다. 라면 국물까지 남김없이 흡입하였다.
설거지를 위해 고무장갑을 찾는 순간 휴대전화에 노란 알림이 떴다. 돈이 들어올 일은 없고, 나갈 일이 많은 삶에서 은행 소식은 반갑지가 않다. 그런데 웬?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그것도 내게는 거액이다. 아침에 김밥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간 아내가 돈을 보냈다. 동시에 카톡도 알림이 떴다. 아내다. 불길한 톡이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따로 살아요.'
훅 치고 들었다. 거금을 입금하면서 인연을 매듭짓자는 말이다. 등줄기서 머리 뒤 꼭지까지 벼락에 맞은 듯하다. 옆구리 터진 김밥이 떠올랐다. 남들처럼 '졸혼'이란 거 해보자는 거였다. 순식간에 권총의 격철을 세우듯 상대를 향한 촉수가 안테나처럼 솟았다.
예상도 하지 못했고, 힌트도 어떠한 예고편도 없었다. 배신감이 몰려들었다. 아마 기억력이 일천한 나와는 달리 케케묵은 과거까지 소환하는, 귀신처럼 달라붙는 질긴 과거가 자해를 거듭하며 시시때때 건드려왔음을 짐작하였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침전물을 한 번씩 휘저어가며 자가발전 해오고 있었다.
온 신경은 주변을 장악하며 본능을 넘어 이성, 이성을 넘어 감성을 깨우면서 비상사태로 돌입해 귀청을 통과하며 모여들었다. 위기 상황이라고 하여도 품성에 합리성을 부여하되, 수단과 방법을 가려 결과보다 덕목을 구현하라는 이성적 이상을 잊지 말자고 다독였다.
'흥분하지 말라. 판단이 흐려진다. 적은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공격한다. 너의 속을 다 드러내 상대에게 노출 하지 마라 공격의 포인트가 된다.' 이 모두 마리오 푸조가 쓴 '대부'에 나오는 대사다. 상대의 약점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상황판단이 우선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벌어야 한다. 시간 끌기…, 한때나마 정치 광고에 밥을 먹었던 기억을 살려냈다. 후보 간 토론에서 상대 후보가 묻는 말에 일일이 성실하게 대답하는 후보는 바보다. 침묵은 나를 감추기에 멋진 도구다.
짧은 시간이 지났다. 의도와는 반대로 몸이 긴장했다. 명치끝이 아파왔다. 위장이 뒤틀리는 듯하다. 신경을 건드리며 위경련이 가동된 것 같다. 급하게 비상약을 찾아 넘겼다. 눈을 감았다. 한쪽에 톱니처럼 불이 번쩍이며 돌아다닌다. 편두통이 시작되었다는 신호다. 정말 대단한 그녀다. 짧은 명문으로 60대 중반을 초주검 상태로 몰아넣다니. 그러나 빈손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버틴 저력의 나다. 하층민 인생은 마냥 버티는 것!
소파에 몸을 던졌다. 냉정하게 나를 돌아다보았다. 내가 어떤 처지인지,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가 중요했다. 그러나 정작 눈앞에 빙판길이 끝없이 펼쳐진 느낌? 해는 저무는데 기력도 떨어지고, 굶주린 늑대가 숨죽인 채 소리 없이 따라오는 상황이라, 맨발로 차안(此岸)을 건너야 하는 가련하기 짝이 없는 중늙은이가 광야에서 울부짖고 있다.
찌푸린 하늘이 살갗을 파고드는 냉한 바람을 부르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서릿바람이 휘감는다. 메마르고 휑한 광야에 비틀비틀 걸어가는 나그네는 정처(定處) 없다. 검은 아가리를 벌려 어서 오라 포효하는 암굴 속으로 자발적 순종자가 되어 기어든다. 세상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단언컨대 구더기 밥이 되고 거룩하기 짝이 없는 미생물의 힘으로 이승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 살았던, 어떤 신성한 목적과 뜻을 세우고 시간을 알뜰하게 보냈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너의 쓸쓸하고도 가련한 주검에 누구도 책임지는 이 없을 것이다.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이 더더욱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열락만을 추구하던 너의 결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자에게 기생하면서 굴종도 마다치 않은, 그따위 삶만 살지 않았다면, 그만하면 됐다. 앙상한 슬픔의 뼈만 남았더라도 멋진 주검이라고 찬사를 늘어놓으리라.
뜨거운 기운이 솟는다. 낙엽이 층층이 쌓인 그 아래서 외로운 주검이 흙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참 장엄한 광경이다. 이른 봄날이 되면, 너도바람꽃으로 태어나리라.
독백이 끝났다. 이렇게 큰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다행이다. 먼지가 떨어지는 소리 대신 오만가지 환청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혜를 모으려 애썼다. 폭력의 본능을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을 이성이 개입되면서 절제의 미덕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서두를 일이 아니다. 설거지를 끝내고, 씻은 빈 그릇은 마른행주로 물기를 닦아 제자리에 차곡차곡 쟁여 넣었다. 싱크대에 물기 하나 없이 만든 후 안방 아내 침대 정리도 끝냈다.
뇌도 쉬지 않았다. 따로 살아도 그리 슬플 일 없다. 지금보다 혼자 깔끔하고 멋스럽게 살 자신이 있다. 외로움을 견딜 재간은 있더냐? 고독을 즐길 자신은 있으나,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외로움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
돈을 보냈다는 것은 남편 네가 집을 나가란 뜻이다. 단언컨대 쫓겨나듯 나갈 수 없다. 격을 떨어트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통장으로 들어온 돈을 돌려준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펼쳐질 갈등에서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꼴이다. 얼마간의 돈과 몇 마디 단어에 몸과 정신이 감전당했던 순간을 없던 일로 할 생각도 없다. 자문자답을 마쳤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백번 묻는 놈은 개만도 못하다.
잊는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이 진기하고 진부하고 낯설고 생소한, 기막힌 사연과 과정을 떠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침묵에 들 것이다. 더불어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 뒤에 새싹을 기다리는 것처럼 인내와 희망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재차 용기를 북돋웠다. 이름을 포기하는 순간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나의 욕망덩어리 미래를 포기하는 순간 자유의 바람을 유영하며 하늘을 나는 새가 된다. 집착하던 현실의 끈을 놓는 순간 나는 새로운 자유와 마주할 것이다. 사회에서 눈곱만큼 차지했던 입지를 버리는 순간 나는 광야를 내달리는 길들지 않은 야생마가 된다.
마취시키듯 용기백배. 자유를 만끽하며 콘크리트 밀림을 내달리자. 꿈꾸듯 탁한 회색빛 하늘을 날자, 가슴에 품었던 청춘의 건배는 고사하고, 늙어 추함에서 발버둥으로 벗어나 야생으로 돌아가자. 겉치레 따위야 품위를 위장하려는 것뿐, 도시 남자의 갑옷이라는 허영의 껍질 양복 따위도 벗어버리자.
일 단계, 침묵은 금이다. 일단 소낙비는 피하고 보는 거다. 저녁 모임에 참석해 수다를 동반한 식탐에 이어 음주를 즐겼다. 그리고 온전하지 않은 정신으로 집에 왔다. 비틀대는 꼴을 두고 볼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뭐라고 하여도 거실 바닥에 모래성 허물어지듯 드러눕는 인간을 상대로 대화하려는 것 자체가 미련한 짓이다. 나는 잠에 빠진다. 아내의 유리잔 깨는 목소리 자장가 삼아 심연 속에 든다.
이 단계, 비틀기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떴다. 아내가 집을 나갔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 전날 밤, 천하를 호령하던 만용이 바닥을 긁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문제는 여전히 혈중알코올농도가 면허정지 상태라는 뜻이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아내에게 톡을 보냈다. 만용과 객기가 뭉쳐 자가발전을 거듭한 까닭이다. 내용인즉슨,
'내가 뭘 잘했냐? 내가 뭘 잘했는데 이렇게 야단이냐?'
치졸하지만 하여튼 이따위 내용으로 이모티콘을 섞어 보냈다. 평화가 우선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뒤꿈치까지 바람이 통과하는 듯하다. 마지막 버팀 자존감이 허물어지는 느낌, 하체에 힘이 풀려버린다.
일단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대가리 떼어낸 콩나물, 고추장까지 칼칼하게 풀어 넣고 해장라면을 끓였다. 김장김치와 함께 우걱우걱 씹어 밀어 넣고 나니 이마에 좁쌀만 한 땀이 맺히면서 좁쌀만큼 세상이 드러났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후루룩 넘겼다. 설거지 후,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서 어젯밤 기고만장했던 허욕의 표피를 벗겼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를 반성하면서, 자기연민이 도를 넘자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낙엽처럼 긁어모아 낙서처럼 두드렸다. 그 순간 톡이 떴다. 변수가 생긴 것이다.
그린피스 부산 행사 참석 확정 통지가 도착했다. 3일 뒤, 토요일 오후다. 몇 달 전에 아내와 함께 다정하게 신청했던 터였다. 악마의 문자인가, 사랑의 큐피드인가? 아니면 반목과 불화의 신 에리스가 때를 맞춘 것인가.
이를 잘만 이용한다면 반전의 미학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이 내 편인지 아닌지 실험해 볼 기회였다.
그날 밤은 긴장 속 어둠의 평화가 지속되었고, 초긴장 상태의 정신은 잠을 방해하였다. 뒤척뒤척 애먼 쿠션만 몸살 내고, 물마시고 화장실을 들락댔다. 고양이랑 놀다가 결국 새벽 두 시에 맥주 캔 하나를 목구멍으로 들이부은 후에야 어찌어찌해서 새벽잠에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에 등을 붙인 채, 병든 들개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다. 거실에 불이 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내 달그락대는 소리도 들리지만, 바위에 짓눌린 듯한 몸은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이 느낌, 경험이 있다. 잠과 죽음의 경계! 지옥으로 통하는 뚫린 구멍에 빠져드는 느낌!
공포가 엄습했다. 깨어나야 했다. 그러나 도무지 눈을 뜰 수 없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가슴에 바늘구멍조차 남김없이 숨구멍을 막아버린다.
눈은 아교로 붙여 놓은 듯 틈이 벌어지지 않는다. 발버둥을 치려고 했지만, 기침은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다. 몸은 더 깊게 빠져든다. 밤인지 새벽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회색빛 어둠, 인간의 흔적조차 사라진 텅 비어버린 재래시장,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달린다. 앞을 가로막는 정체불명의 쓰레기 더미, 주위를 돌아봐도 넓은 도로에 아무도 없다. 고요가 소름이 된다.
지옥 같은 공포와 어둠, 벗어나기 위해 달리지만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다 어디론가 빨려드는 몸, 반갑게도 버스 한 대가 달려온다. 버스가 섰다. 버스 속은 이미 만원이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인간들에 떠밀려 떨어진다. 검은 먼지를 일으키며 버스는 멀어져갔다. 달렸다. 숨이 차오른다.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생각뿐이다.
악몽을 꾸고 있다고 경험으로 알았다. 재차 꿈이라고 단정 내린 후 정신을 차리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때마침 집을 나서려던 아내가 들어와 '아직 자요?' 하며 손을 잡는다. 아내 목소리가 반갑기 짝이 없다. 평소처럼 로션을 바른 손이 부드럽다. 매끈한 감촉은 물론, 온기까지 전해왔다. 기를 세운 채 서로를 향해 팽팽한 시위를 날리던 기억, 그래선지 더 반가웠다. 화해까지 할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을까.
잠과 죽음의 중간,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서 허덕이는 나를 살리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다가온 그녀가 고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뜰 수가 없다. 아내가 손을 놓으려 했다. 내가 그랬다.
"눈을 뜰 수 없어, 손 놓지 마요."
그렇지만 눈은 여전히 강력 접착제로 붙인 듯하였다. 재차 잠이 달려든다. 잠들지 않으려 안간힘으로 버텼다. 아내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힘주어 잡았다. 아내도 심각성을 느꼈던 것인지 함께 힘을 준다. 그러나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잠은 물러서지 않는다. 다시 잠에 빠진다면 영영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점차 이러다 정말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살아야 했다. 머리를 흔들었다. 팔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눈을 벌렸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희미하게 아른댄다. 순간 재차 눈을 꼭 감고 다시 힘주어 눈을 떴다. 천장에 둥근 등이 보인다. 아…, 살았다! 눈을 감으면 다시는 뜰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켰다. 창을 통해 본 세상은 더없이 밝다. 태양이 편견 없이 골고루 세상을 비춰주고 있음을 알았다.
몸은 지금까지 애써 버티던 에너지가 빠져나간 듯 허물어질 것 같았다. 재차 잠에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 목을 뒤로 젖혔다. 방금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아내가 없다. 손을 잡아준 것도 꿈이었나? 아내가 날 살리려고 와준 것인지, 내가 살려고 아내를 찾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손의 감촉이 기억하고, 아내 목소리까지 똑똑하게 살아났다. 이내 실망감이 몰려들었다.
아무렴, 현실을 직시하자. 죽음을 유혹하는 침대에서 벗어나야 했다. 비틀대며 거실로 나오자, 벽시계가 9시를 훌쩍 넘기고 있다. 그렇다면 아내는 절박한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 분명하였다.
요 며칠 날카로운 심정이 되어 몸을 함부로 굴렸더니 에너지 고갈을 맛본 뒤에 꾼 꿈이었다. 한 번뿐인 생애, 무턱대고 살아가며 낙담과 실의에 빠진 채 내일을 꿈꾸는, 이상이란 환각제를 심하게 들이킨 것이다.
생수에 얼음을 가득 넣어 벌컥벌컥 마셨다. 마음이 밝아지려면 집안을 밝혀야 했다. 거실 커튼을 걷자, 햇살이 들어와 밤새 숨죽이던 화초에 닿는다. 오늘도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태양이 건너편 아파트 건물 창문에 비춰 내방 창을 통해 눈으로 들어왔다. 창문도 열었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친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염치없는 뱃속이 허기와 속쓰림으로 반항한다.
석양을 등지고 까닭 없이 나선 길, 놋그릇 대폿잔에 막걸리 석 잔을 마신 후 집으로 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 두절 콩나물을 샀다. 몸통 실한 콩나물 씻어서 삶아 채반에 받쳐 놓았다. 콩나물 향이 밥에 잘 베어 들게 콩나물 삶은 물로 밥솥에 밥을 안쳤다.
이때면 그 옛날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소환된다. 어머니처럼 아랫입술을 살짝 문 채 호두 조림 잘게 부수고, 잔 멸치조림 가위로 난도질했다. 시각적으로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 당근은 채 썰어 볶고, 대파 잘게 송송 썰어 준비했다. 밥이 다 되자 큰 프라이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준비해 둔 콩나물을 넣고 물러지지 않게 열기를 가해 몸에 기름을 입혔다. 고슬고슬한 밥을 주걱으로 퍼서 넣고 준비한 당근, 호두, 멸치와 함께 골고루 익히도록 잘 비벼주었다. 끝으로 파를 뿌려 한소끔 더 비볐다.
파 향. 진한 참기름이 섞인 콩나물밥 향기가 거실 가득 퍼졌다. 나도 모르게 입속에 침이 고였다. 빨리 먹고 싶은 욕심에 마음이 급해졌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콩나물밥을 그릇에 담았다.
때마침 집으로 돌아온 아내가 손발을 씻고 거실로 나왔다. 이때 누구라도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보면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식탁에 마른 김이나, 김장김치를 준비하거나, 참기름병이나, 비빔장, 고추장을 종지에 담아내면 얼마나 기특할까. 그런데 무슨 생각에선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뒤이어 베란다에 냄비를 들고 와 싱크대에 넣고 뚜껑을 열었다. 지난 주말 아들과 함께 만들어 먹다 남은 생선찌개인 듯했다. 순간 음식이 발효되어 가는 역한 냄새가 콩나물밥 향과 뒤섞여 묘한 기운을 토한다. 뒤이어 커피포트에 물이 끓자, 냄비에 붓는다. 뜨거운 김과 함께 피어나는, 발효되다 못해 거품과 흰 막이 장악한 상한 찌개가 내는 냄새는 가위 압권이다. 유기물이 썩어서 생기는 예술적 공감각의 해감 냄새였다.
그러나 대충 냄새만 풍기게 반쯤 붓고 만족했다는 듯 국자로 바닥을 달달 긁자 더 진한 향이 거실과 식탁까지 점령하였다. 냄새가 색으로 표현되어 가라앉는 환상을 느꼈다.
상황을 파악하였다면 최소한 냄비 뚜껑이라도 덮을 일이다. 손만 헹구고 식탁에 앉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뚜껑을 덮었다. 그런데 냄비 속 영상이 잔상이 되어 김치를 꺼내는 동안, 고추장을 들어내는 동안, 김을 챙기는 중에도 역한 냄새와 함께 따라다녔다. 결국 몇 술 뜨다가 숟가락을 놓아야 했다.
문제는 이러한 행동이 전혀 의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저 냄비를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녀로 하여금 프로그램에 오작동을 일으켰다. 빨래하다가 설거지하고, 중간에 멈춘 후 바닥 청소하다가 화장실 청소하다가, 재차 나와서 화분 분갈이하던 중, 깍지벌레 잡는다고 집중한다. 난장판은 순식간이다. 하나씩 차례로 끝을 낸다는 것, 그녀 사전에는 있을 수 없다.
문득 포커페이스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무표정이 아니라 감정이 표백된 상태라니. 무섭다!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자니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로부터 카톡이 왔다.
"언제 나가?"
아무리 생각해도 질문에 답이 없을 때는 질문이 잘못된 것이다. 답은 톡을 보낸 그녀에게 있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환동(還童)의 경지, 즉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철없는 늙은이, 키덜트(Kidult)가 되어서야 안 될 일이다.
새벽녘에 잠든 탓에 해가 중천에 오르고서야 일어났다. 싱크대가 평소와 다르게 너무나 깨끗해 긴장했다. 커다란 냄비에 내가 좋아하는 토란 줄기와 콩나물, 무, 대파, 마늘 다진 것을 아끼지 않고 듬뿍 넣은 쇠고기 국이다.
심장이 쿵쿵 북소리를 울리며 정수리에 닿는다. 너무 쉽게 해결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쩌면 네게 주는 마지막 동정이라는 가진 자의 알량한 아량일 수 있다.
스포츠 채널을 찾아보면서 식사를 마쳤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맑다. 간접 햇볕을 받은 창 쪽의 화분들조차 푸르다. 빨강 꽃잎이 웃는다. 오늘 하루가 아니라 최소 며칠 동안은 즐거울 것이라는 보증수표 같았다. 물 조리를 찾아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 반신욕으로 마음의 찌꺼기를 배출해 낸 후 표피의 때를 벗겼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태양이 떠오르리라.
만 하루가 지났다. 부산 그린피스 행사가 있는 토요일, 오후 2시 행사라 느긋하게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가는 중간 더 심심할 것도, 그렇다고 더 가까워질 일도 없는 시공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몇 번이고 아내 눈치를 보았다. 부디 그녀로 하여금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들어 주시옵기를 어느 신이든지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고 행사 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다. 남들이 보았을 때 하등 문제가 없는 부부가 참여한 가장 이상적인 시간이었다. 그린피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이다. 배가 고팠지만, 타지인 터라 마땅히 먹고 싶은 것과 먹을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가 원한다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위기는 상대가 가장 안심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어느 순간부터 아내 표정이 싸하다. 들숨날숨이 어긋남을 느꼈다. 상대성이다. 심정에 변화를 일으키면서 비상사태를 미리 대비하고 있던 내 촉수가 순식간에 솟아났다. 바싹 긴장하라는 방어본능이 머리를 통해 심장으로 전달되었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하고도 애절하게 바랐던 내 심정과는 아랑곳없이 상대가 판을 펴고 있다. 집으로 가는 내내 둘만의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딱 그것이었다. 나는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작금의 시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미치고도 환장하고픈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OOO 씨…."로 시작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이 이처럼 살 떨리게 들리다니? 그런데 낯설게도 서정적으로 풀어가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이 생경한 사연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의 고삐를 당겼다. 제법 긴 시간이었다. 마치 순정 소설 속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독백을 들려주고 있다. 결론은 애초에 없다. 결국은 애증의 관계란 뜻이었다.
그 정도 사연이라면 내가 더했으면 했지, 덜하지 않았다. 물러설 곳을 제거하고 반격을 위해 나의 어린 시절을 약간의 허구를 섞어 늘어놓았다.
슬프고도 고독한, 시리고 아픈 기억들, 먹은 것이 없어 게워 낼 것 없던 어린 시절 지난한 사연을 늘어놓자, 나 자신이 슬퍼지기 시작하였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스스로 분위기에 휘둘리면서 아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물러서기로 작정하면서 당신 뜻대로 하겠노라 선언했다. 과거를 포기하면 자유가 온다고 확신하였다. 방향을 틀면 색다른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사람은 살기 위해 태어났지,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얼마간 방황이 따르겠지만, 얼마가 남았건 미래를 위해서는 이것이 명징한 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낸 후 텅 빈 가슴에 허기가 진 것인지는 몰라도 약간 미련의 틈을 내보였다. 나는 바위틈에서 고난을 이겨내고 피어난 진달래꽃을 떠올렸다. 40여 년 인연을 무 자르듯 할 수 없지만, 상대로 하여금 한발 물러서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릴 수도 없고, 곁에 있자니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을 나는 안다. 단언컨대 부부 싸움에서는 승자가 정의가 아니라 패자가 정의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치 본인은 절대 선, 상대는 절대 악이라는 이분법에 싹을 잘라야 했다. 절대 악에 희생당한 절대 선으로써 비련의 여주인공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할 따위의 의도였다면 애초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생각할 시간을 두지 않고 재차 반격에 나섰다.
"당신이 순정 소설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착각하지 마소. 어쩌면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비웃음을 섞어 내뱉었다. 그리고 추가로 나를 대입하였다.
"내가 무협지에서 복수에 불타는 정의의 주인공이 아니듯 말입니다."
추가로 잘라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기억하던 절대로 잘못한 적이 없어! 있다면 내 능력 밖이었을 거야!"
선거 전략 중 후보가 답이 궁색할 때 하는 잡아떼기가 아니라 정말로 기억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케케묵은, 기억도 없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대거리도 생각나지 않는, 진실과 허구를 구분할 자료는커녕 백지상태인 나를 몰아붙인들 답은 하나다. 침묵뿐이다. 상대도 침묵이 필요했나 보다. 2~30여 분이 지났다. 생활 터전에 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렇게 말한다.
"밥 먹고 갈래요?"
훅 치고 들어왔다. 이 말에 소인배라면 쌍수를 들어 순식간에 표정 변화를 일으켜가며 환영하였겠지만, 진정 반갑지 않았다. 짧은 침묵 뒤, 착한 나는 동참하기로 한다. 그래도 한 마디 덧붙여야 했다.
"병 주고 약 주십니까?"
이로써 나는 일단의 승리자로 기록되리라. 여전히 내 통장에 들어온 돈은 고스란히 숨을 죽이고 있다. 마치 백악기에 눌어붙은 화석처럼 말이다.
덧붙이면, 자기주장이 강하면 대화에서 다툼으로 번지곤 한다. 말은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눌언(訥言), 눌변(訥辯), 눌헌(訥軒), 눌문(訥文) 이 모두가 스스로를 낮추는 단어들이다. 달변가의 날랜 혀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이치다.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요,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 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우환은 입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우리 집 오드리 될뻔 아니라, 내 영원한 연인 오드리 햅번이 그랬다.
"행복은 건강과 짧은 기억력이다."
주말에 정신적 물질적 고문을 당한 터라 몸도 정신도 바닥을 치면서 건강을 되찾으라는 본능이 작동했다. 자기감정에 솔직하다 보니, 맹목적인 순종자에 불과한 미련한 인간이 적극적 사고력이 발동하면서 전력투구에 기력이 달렸던 것이다.
물론 그 결과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반전에 성공하였으며, 통장의 돈 역시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팽팽한 간극을 유지한 채 일주일이 흘렀다. 금요일 저녁 간단하게 칵테일 한잔하고, 남은 커피 아깝다고 홀짝 털어 넣은 뒤에 잠자리에 누웠다. 그래선지 평소보다 맑은 머리에서 이런저런 사연들이 붙잡아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러길 한 시간, 몇 번을 뒤척이다 깜박 졸았다. 작은 고양이 호두 놈이 울어서 일어나니 새벽 두 시다. 물을 마시고 재차 잠자리에 들었지만, 불면의 영혼은 나를 끈질기게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컴컴한 거실이 무서웠던 것인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인간의 침묵이 불안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호두 놈이 아들아이 방문을 긁으며 울기 시작한다. 거실로 나오자, 종종걸음으로 반갑게 맞는다.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안심한 듯 제자리에 앉아 잠을 청하는 모습을 보고 침대에 들었지만, 여전히 잠을 이룰 수 없다.
저처럼 작은 동물도 어둠에 외로움이 더해져 사람이 그리운데, 인간이 어찌 늙어가며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말이 좋아 고독이지, 외로움에 몸서리치면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이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더 외롭다. 이불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천장에 별자리 조명등이라도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동심의 꿈이 아롱지며 용기를 북돋워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어둠을 휘젓고 다니며, 애먼 쿠션만 끌어안은 채 불면과의 투쟁 중이었다. 나와는 달리 세상이 심연에 잠긴 시간, 살짝 열린 안방 문 사이로 아내의 코골이가 들린다. 그야말로 새 아침을 비상하기 위한 충전 과정의 작동 소리가 은밀하게, 혹은 힘차게 박동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다 잠잠해지는가 하면, 마치 어둠에 점령당하지 않겠다는 듯 재차 시동을 켜며 공간을 지배한다. 존재를 증명하는 우렁찬 콧소리다. 더불어 휘파람 소리까지 연주하며 화음을 넣는다. 재주가 무궁무진하다.
두 분 수녀님 좁은 어깨 사이를 비집고 은빛 햇살이 내려앉는다. 확고한 종교적 신념이 담긴, 이보다 더 경건할 수 없는 발걸음을 따라잡았다. 멀리서 목회자 주술 같은 소리가 나뭇잎 사이로 가늘게 들린다. 신을 향한 간절함이 남 같지 않다. 실골목을 벗어나 편도 2차선 인도에 올라섰다.
차라리 골목이 좋았다. 타인의 무심한 눈길이건만 아무리 반복되어도 그때마다 제 혼자 한기를 느낀다. 그러니 내가 죄 없는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일밖에….
오늘따라 더 좁은 인도, 울퉁불퉁 서덜길처럼 튀어나온 블록 모서리가 심장까지 치댄다. 짧게나마 편의점 의자 신세를 진다. 괜히 담배를 끊었다. 다들 분주한데 나만 가뭇없다. 가없는 영혼의 고요.
마치 일에 쫓기는 사람인 양 횡단보도를 바쁘게 건너고 휴대전화기를 들어 시간도 확인한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매끈하게 빠진 얼음장 같은 사각의 건물이 자본의 위용을 자랑하고, 넓은 배를 드러낸 10차선 도로를 위세 좋게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저마다 바쁘다.
토막토막 하등 의미 없던 지난 순간을 이어 붙이자, 도무지 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깨닫고 보니 목적은커녕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천국에 가자는 인간의 유혹을 허세 좋게 뿌리친다.
역시 골목이 제격이다. 예수 천국을 뒤로하고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으로 생소한 발걸음을 옮겼다. 한밤의 잔재들이 어렴풋이 남아 시선과 코를 비릿하게 만든다. 시멘트 담장 아래 한 줌 흙에 삶을 지탱한 노란 민들레가 자연의 경이로써 계절을 알린다. 깨진 간판 사이로 딱 고만큼 골목으로 햇살이 비친다. 태양이 주는 알량한 축복 같다.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냉소를 머금은 채 마주 보고 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거짓말이다. 몸이 가까이 있어 마음이 가까워져야 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쯤 되면 마음을 비집고 냉기가 든 것이고, 그 틈에 몹쓸 바이러스가 정신을 갈라놓았다는 의미다. 바람 부는 가지에 앉은 참새 신세라도 꿈이 있었으면 좋겠다.
골목의 끝 여행사 간판이 길 잃은 자를 가로막는다. 파란 하늘 아래 짙푸른 바다 그림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다. 부딪치고 부딪쳐도 지치지 않는, 젊고 건강한 파도, 가슴에 끓는 불신의 앙금이 가라앉을 것 같다.
어쭙잖은 사치, 알량한 자기연민, 얄팍한 지적 허영, 싸구려 혼돈, 낡은 영혼의 소리와 함께 어설픈 사색을 흉내 내며 버스에 올랐다.
분리수거도 힘든 난삽한 삶을 실은 버스가 외롭다 흔들린다. 의미 없는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려주니 그저 좋다. 숨죽이던 세포에 생동이라는 리듬이 빠르게 들려왔다. 창밖 풍경처럼 음과 박자가 정신없이 바뀐다. 망망대해를 품었던 가슴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에 빠진다.
마음의 소음을 벗고 잠을 청한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기적보다 더 힘든 일임을 이내 깨닫는다. 침묵이 쌓이고 절대고독이 엄습한다. 벗어날 방법이 없다. 창밖은 빈틈없이 화창하다. 게으른 놈이나, 놀기 좋아하는 백수가 딱 좋아하는 날씨다. 외로움에서 출발한 고독은 익숙해지기 마련, 가슴에 물기가 스며든다. 아마도 햇살에 습기가 차서 일 게다.
기억 속 풍경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흡족했다. 고향에서 떠밀려 굴러떨어진 바위가 모래사장 가운데 놓였다. 파도는 물결을 타고 기세 좋게 밀려와 온몸을 내던져 부딪친다. 쉬는 법이 없다. 한 번 버림받은 바위는 꿈쩍하지 않는다. 햇살에 물보라가 순식간에 피어났다가 사라진다. 영상 화면을 정지해 머릿속에 각인한다. 화해의 빛인가?
나아갈 용기도, 뒤돌아 오를 능력도 없는 바위를 가늠자로 해 언덕에 앉았다. 저 멀리 하늘과 바다는 경계를 잃었다. 온통 파란 세상에 흰 등대와 빨간 등대가 마주 보고 섰다. 더 멀어질 일도 더 가까워질 사연도 없다. 간극의 아름다움, 그 사이로 애지만 한 배가 가늘고 흰 선을 그으며 나아간다. 마음속 갈등의 음양이 뭉개지는 듯하다. 그간 형체에 집착하며 사유화하려던 과거가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둠을 뿌리며 잘도 달린다. 창밖은 풍경은커녕 삶에 찌는 중늙은이가 어둠 속에서 마주 본다. 꿈을 많이 꾸어서 더 빨리 늙어버린 영혼이 세상을 향하고 있다. 절대 무위 고독 속 심연의 잠에 빠진다. 꿈인가 환영인가, 온통 파란색에 더없이 희고 빨간 등대가 서로를 향해 빛을 나눠주고 있다.
거실이 더없이 밝다. 눈이 부시다. 아내가 돌아왔다.
토요일, 여느 때처럼 아내가 아닌 남편인 내가 집을 나갔다. 내가 보기엔 그냥 두어도 살아가며 하등 상관없는 일들을 편하게 처리하라는 배려, 또 두 시간 이상 같은 공간에 있다면, 팽팽한 긴장 상태로 돌입하면서 집안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강바람을 맞으며 다리에 푹푹 힘이 솟는 느낌을 받아 가며 눈맛까지 시원한 풍경을 즐기며 달렸다. 그러다 "펑!" 소리와 함께 자전거 뒤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벌써 두 번째 경험이다. 체감온도 37도를 넘나드는 한여름 정오에 5km를 끌고 왔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 펑크 난 곳에 찢어진 타이어가 벌어지면서 재차 바람구멍을 낸 것이다.
그때 비하면 이나마 다행이다. 날씨도 선선하거니와 하늘에는 태양이 구름 사이를 들락대고 있었다. 지도를 열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과 12km 거리다. 좌절하기보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정신 승리로 물러터진 타이어의 자전거를 끌고 걷기 시작하였다. 지나가는 자전거가 동정의 눈길을 보낸다. 시선을 돌려 길섶에 난 꽃이나, 이름 모를 풀과의 대화를 나누며 걷는다. 중간에 식당에 들려 막걸리 한 사발로 해갈하고, 정구지전으로 배를 달랬다.
그리고 해거름에 집으로 돌아와 해삼 퍼지듯 몸져누웠다. 아내의 시선은 여전히 냉랭하다. 그러나 내 꼴을 본 터라, 시비 걸 생각은 없는 듯하다. 반신욕으로 정신을 차렸다. 냉장고에 맥주 캔을 하나 따서 들이켰다. 식탁 위에 아내가 먹다 남은 치킨 안주 삼아 배를 채운 후, 화장실에 다녀와 내방 침대에 누워 책을 펴자 눈이 감겼다. 꿈이 아주 뭣 같다.
비몽사몽 이른 아침에 일어나니 여전히 꿈꾸는 집안이다. 백수도 일요일은 설렌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신용카드를 챙겨 집을 나섰다. 걸어서 40여 분이 걸려 시내 백년식당에 도착했다. 선지해장국 포장해 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집은 여전히 침묵에 싸였다. 냄비에 국을 넣고 재차 끓었다. 대파 송송 썰어서 준비하고, 깍두기까지 대령한 후 아내를 깨웠다. 아침 겸 점심인 셈이다. 우리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 4시, 강가로 운동을 하러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아내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소 닭 보듯이 아니라 눈빛에 뭔가 담겨 있다. 문득 부부가 함께 운동하거나 식당에서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떠올라 "같이 갈래?" 했다. "응!" 한다. 가슴 한구석에서 불안한 기운이 샘솟았지만, 함께 길을 나섰다. 한편으로 저처럼 부드럽게 변한 것이 아침에 국을 준비한 보상인가 했다.
나의 촉은 틀린 적이 없다. 대화가 소통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었다. 대화는 새로운 단절의 시작임을 경험으로 알아야 했다. 내, 이 밴댕이 속이 문제를 일으켰다. 내 특유의 반어법이 상대 심장을 긁었다. 두 마디 말에 아내의 발작 버튼이 작동되며 기억을 거슬러 40여 년 전까지 소환한 뒤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재차 시작된 우리의 이 지옥과도 같은 시간의 강을 또 건너야 한다는 작금의 현실에서, 삶에 대한 회의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5분 전 평온했던 상황이 너무나 그리웠다.
나는 몸을 돌려서 오던 길을 내달렸다. 강을 건너 반대편 길을 택해 걸었다. 하도 서글퍼 고개를 들자, 하늘은 어둠이 먹고 있었다.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아내가 두 손을 스웨터 주머니에 넣은 채 낭창낭창 걸어가고 있다. 나를 돌아다봐 주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표정이 궁금했다.
청국장에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걸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대략 18,000보를 걸었지만, 운동 나가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나는 긍정의 힘을 믿기로 한다. 우리 부부는 늘 '도돌이표'니까.
안방 문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텔레비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불은 켜져 있다. 이것은 성질 버튼이 여전히 작동 중이라는 의미다.
냉랭한 표정으로 찬바람을 일으키며 앞을 스치는 아내, 우연히 지하도에서 만난 아내와 내가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나친다. 몸살로 몸져누웠는데 짭짭거리며 음식 먹는 아내가 나를 슬프게 한다. 무엇보다 아내가 이혼하자며 통장에 돈을 보내왔을 때 나는 가장 슬프다.
펑크 난 자전거를 끌고 오다 만난 사위어가는 폐가, 앞마당을 점령한 풀, 스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 아래 떨어져 나간 문짝, 그 앞을 스치는 건조한 바람….
집에 다 왔어도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공원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는 데 하늘에서 초승달이 슬프게 웃는다. 가슴이 쓰려 콘크리트 바닥을 쪼아대는 까마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한다. 함께 늙어가고, 함께 노을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듣고 싶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함께 팝콘을 먹고, 하나의 빨대로 콜라를 마시며 너무나 인간적인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낙서처럼 써 놓았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아내가 읽은 듯하다. 좀체 없던 일이다. 저녁에 들어오니 컴퓨터에 글이 진심이냐고 따지듯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은 평온하다 못해 불안정한 행복을 즐기는 중이다.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만, 따로 살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해 입을 막아버렸다. 설령 각서를 작성하더라도 한꺼번에 돌려주는 우를 범하진 않겠다. 훗날 안전핀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리라.
살얼음을 걷는 내 삶은 이제 황혼을 바라보며 빠르게 달린다. 하늘이 그동안 나를 실험에만 던졌으니, 이제는 하늘이 존재를 증명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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