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으로 들어가는 정원에 국화가 피어 있다. 서리에 얼어 하얀 꽃이 붉게 물들어 간다. 늘 보는 꽃이라도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 내가 담당하는 102호 병실 할아버지 같아 걱정이 앞선다.
병실 문 앞에서 노크했다. 모두 바라보는데 그 할아버지만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기억을 도난당한 다른 병실에 할머니들보다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는 그다. 그런 모습에 안쓰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70대 위암 말기 환자로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는 상태로 병원에 입원 해 있다. 그는 대구 근교 시골에서 농사만 지어 자식 둘 다 명문대에 보냈다고 했다. 아들은 항공 우주학을 전공해 미국 NASA에 근무하고 있고, 딸은 호주에서 국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지어 서울로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식 농사는 풍년이고 알곡이었다. 장학금에 국비유학까지 했다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병원에 오기 전부터 그에 생각은 혼자 남을 아내 걱정뿐이었다. 자식들은 전부 외국에 살고 있고 친척들조차 딱히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처지였다. 치매기가 있는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은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 미묘한 감정이 얼굴에 표표히도 나타나 있고, 가끔은 병실 침대에 혼자 누워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검버섯이 가득 핀 촌로에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말수가 없는 그를 기분 전환이라도 할 요량으로 말도 시키고 농담도 걸어보지만, 그저 핏기 없는 웃음만 지울 뿐 TV도 잘 보지 않는다. 옆 침대에 있는 환자분 자식들이 면회를 왔다 가면 돌아누워 전화기만 만지작거린다. 혹시나 자식들한테 전화가 올까 봐 하루 종일 기다리는 눈치다. 그러나 입원 내내 전화 한 통화 없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잘난 자식들은 모두 외국에 살고, 차라리 못난 자식이라도 곁에 같이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한 것 같다. 늙고 병들어서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뒤돌아 누워, 소리 없는 눈물만 커렁거리고 있다.
그가 입원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갑자기 외출을 신청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그냥 정리 할 것이 있다며 시골집에 갔다 온다고 했다. 담당 의사에게 허락을 얻어, 먹는 약 속에 진통제도 함께 챙겨 드렸다. 그러나 결국 사고는 터지고 말았다. 하룻밤도 자지 못하고 경주에서 119에 실려 다시 병원으로 이송 되어왔다. 위 점막이 터져 출혈이 심한 상태로 응급처치를 한 다음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하루가 지나자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고 대중적 요법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 사건의 전말은 외출을 허락받아 아내와 마지막 여행을 한 것이었다. 가난했던 옛날, 신혼부부는 신혼여행을 제주도에 가지 못하고 등산 겸 경주에서 허니문 시간을 보냈다. 부부가 손을 잡고 경주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구경했다. 토함산 쪽으로 가는 들녘 차창에는 늦가을 들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석굴암 가는 비탈길에는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50년이 지난 늙은 할아버지가 아내의 손을 잡고 경주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있다. 토함산 가는 길에는 흐드러진 들국화도, 바람에 흔들리던 억새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커렁거리는 눈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그대로 있었다. 오후 늦게는 황리단길을 걸어서 대능원 천마총으로 갔다. 천마총에 누워있는 이름 없는 왕이 그를 보고는 많이 기다렸다는 듯 빨리 오라고 손짓하며 천마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픈 몸으로 잘 먹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속으로는 치매에 걸린 철부지 같은 아내를 두고 어찌 가야하나 하는 생각에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왔던 것이다.
안정을 찾은 지 며칠이 지나고 하루는 밥맛이 없다고 했다. 치매기가 있는 아내는 매식 배달되는 병원식을 두고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하는 남편을 위해, 칼국수 집에 배달시켜 칼국수를 먹었다. 한 그릇을 다 먹기도 전에 칼국수가 쏟아지고 피를 토하며 혼절하고 말았다. 너무 뜨거운 국물이 위에 자극이 되었는지 위암에 상처가 악화가 되었던 것 같았다. 급히 응급수술을 했지만, 그는 다시는 병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퇴원 수속 하기 전, 아내가 병원 장례 절차를 위해 나에게 건네준 봉투 속에는 할아버지의 유언장이 들어 있었다.
당신을 만나 고생을 시켜 너무 미안했고 미안하오. 차마 당신을 두고 내가 먼저 가려 하니 앞이 보이지 않는구려. 그래도 어찌하겠소. 언제 갈지 모르지만 가야 하는 게, 세상 이치가 아니겠소. 여기 보통 예금통장에 들어 있는 현금을 내 장례비용과 당신 병원비에 쓰시오. 누가 산소에 벌초하러 오겠소. 나를 화장을 해서 고향 선산 부모님 산소 밑에 뿌려주시오. 다른 통장에는 술 담배는커녕, 국내 여행도 한번 하지 못한 내가, 구두쇠 짓밖에 할 수 없는 내가, 평생을 모은 통장이요. 농사짓고 소 키우고 감을 따며 모은 내 피 같은 돈이요. 정기적금에 00억 정도가 들어 있소. 이 돈은 병원에 기부하고 싶소. 특히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사용되어 지면 좋겠소. 중략….
경상도 사투리에 맞춤법도 맞지 않는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유서 속에 구두쇠 같은 단어에 나도 모르게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고인이 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생활방식이 같았으리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릴 때 용돈 한번을 주지 않던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8남매를 키우려면 어떻게 구두쇠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때는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다. 오르지, 성실과 열심히 라는 단어밖에 유산이 없었던 나였다. 봉제공장의 미싱사로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던 내 젊은 시절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유서를 복사해서 전자 차트에 올렸다. 직업적으로 많은 환자들을 보내지만 언제나 익숙치 않은 것은 떠나보내는 마음이다. 내가 보내드린 그 많은 사람 중에. 돈 많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학문을 가진 사람도 하지 못한 오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인생 마무리를 생각하니,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사 빈부 귀천에 상관없이 인생무상을 생각하지만, 뜻있는 마무리에 내 가슴이 뭉클해졌다.
병원 사회복지 담당자에게 전화하여 고인의 유지를 설명하고 유서를 파일로 보냈다. 또한 퇴원 서류처리로 간호사실 한편에 서 있는 인공지능 챗GPT에 고인의 투병기와 사망진단서 발행을 위해 병력지 정보를 입력했다. 진단서는 잘 발행되었다. 그러나 투병기는 차트에 기록된 정보로는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보고서 같은 내용을 모니터 화면에 보여주고 있다. 아직은 AI가 쓰는 투병기는 무리였다. 투병기는 포기하고 차트를 정리했다. 할아버지 얼굴이 컴퓨터 화면에 중첩되어 모니터에 글자가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이 자꾸 눈 위로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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