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대상] 천 원짜리의 비밀 / 박성근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작 '천 원짜리의 비밀'. 일러스트 김재경 작가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당선자 박성근 님.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당선자 박성근 님.

1. 프롤로그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지구대장님, 지금 막 철거촌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기상청 예보와는 달리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이 선생님이 무척 걱정 되네요."

"네, 동장님, 그래서 저도 큰 수건과 여벌로 우산 하나 가져갑니다."

23년 전, 서울 어느 달동네 동장이던 나는 철거촌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가을비답지 않게 비가 수직으로 내렸다. 비에 젖은 바람의 입자들이 철 늦은 부겐빌레아 꽃잎의 언저리를 동그랗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 마음의 빈 방에도 그 연한 빨강들이 삐뚤빼뚤 번져갔다. 그 바람은 아까 동 주민센터 앞에서 봤던 소나무 잎사귀 주변을 겅중거리던 바람과는 사뭇 달랐다.

그 동네의 재개발 사업은 여러 이해관계인들의 갈등으로 무한정 지체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엄청난 양의 잔재 쓰레기와 악취로 몸살을 앓았다. 설상가상 화재 등의 재난 위험도 늘 똬리를 틀고 있었다.

젊고 이권 빠른 사람들이 썰물처럼 떠난 자리에 남은 것들은 모두 낡고 허름했다. 점심 무렵 몇몇 노인들이 좁은 골목에 모여 우산을 받쳐 들고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철거촌 담장 플래카드에 걸린 '축, 재개발 인가!'라는 오래 된 활자가 '정말 재개발인가?' 의심스럽다는 듯 마구 나부꼈다.

대부분 구십 세쯤의 노인들은 뻔히 다 아는 친구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매번 후렴처럼 똑같은 젊은 시절의 무용담 조각들을 꿰맬 자기 순서만 엿봤다. 노인들의 웃자란 추억은 절대 지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를 보더니 민망스럽게 1940년대식 호칭인 "동회장님!"이라 부르며 반가워하셨다. 순간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아득해졌다.

2. 어느 노숙인과의 운명적 만남

"동장님요, 마 천 원짜리 한 장만 주이소. 이번이 마지막입니데이."

"네네…"

철거촌 입구에서 오른 팔이 없는 이 선생님이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왔다. 시계탑 꼭대기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정북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둘기 떼는 초라한 그분의 머리 위를 평화롭게 날아다녔다. 너무나 슬픈 역설의 풍광이었다. 나는 슬픔을 숨기려고 일부러 과도한 웃음과 몸짓으로 반겼다.

이 선생님은 평소 이상하게 내게만 손을 내밀었다. 철거촌 쓰레기들도 그 노숙인처럼 길을 잃고 이리저리 함부로 흘러 다녔다. 매일 아침이면 모든 노숙인들은 불분명한 희망을 품고 사람들이 많은 시내 중심가로 떠났다. 그러나 팔다리가 불편한 그분은 종일 그 철거촌 안에서만 헤맸다.

젊은 날, 나는 내 목표와 가족들의 밥만을 위해 치열하게 도전했다. 정당한 경쟁과 역경 끝에 얻은 성취는 내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도덕 시간에 감명 깊게 배웠던 타자의 아픔을 가늠하는 일은 점차 무뎌갔다.

그러나 이 선생님의 쓰라린 인생사를 듣고 나서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긴 세월 내 마음 밭에서 이기심을 먹고 돌연변이로 자란 양심이 쿡쿡 나를 찔러댔다. 나는 진심을 다 해 그분을 돕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 선생님은 잔뜩 비에 젖어서인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호리호리한 지구대장님이 얼른 미리 준비한 수건과 우산을 건넸다.

백지에 그려진 아주 작은 사각형의 안팎을 색칠할 때 사각형 안쪽이 바깥 쪽보다 훨씬 쉽게 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생님도 그 사각형 모형의 철거촌 안에 머무는 것이 더 편한 것 같았다. 그분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갈 곳이 없어 그 터에 남아 있는 늙은 병사 같았다.

그 시절 내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는 매일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일기예보를 파악할 방법이 없는 이 선생님에게 다음 날의 날씨를 알려주곤 했다.

다음 날 일기가 궂으면 노숙하는 그분의 잠자리가 걱정 되어서였다. 사실은 그보다는 날씨에 따라 이 선생님의 동전 통에 쌓여가는 동전의 높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가끔 지켜본 바로는 날씨가 맑은 날에는 동전 통에 동전이 대략 두어 줄 정도 쌓였다. 그러나 일기가 고르지 않으면 공식처럼 거의 빈 채 빗물이나 눈송이만 찼다. 그런 날은 행인들이 주변을 살피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종종걸음하기 때문이다. 역시 그날도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동전 통이 텅 비어 있었다.

매일 밤하늘이 천정인 이 선생님에게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은 그토록 힘겨웠다. 사실 내게 궂은 날씨는 조금 거추장스러울 뿐 일상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선생님의 동전 통 높이와 날씨에는 예전에는 내가 상상도 못했던 놀라운 상관관계가 숨어 있었다.

이 선생님은 나보다 다섯 살 위의 형님뻘이었다. 내가 1년 전 그 달동네 동장으로 발령 받아 처음 순찰을 할 때였다. 나는 우연히 거리에 휑하니 앉아 운명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는 한 노숙인을 만났다. 나는 그분에게 다가가 성함을 여쭸지만 돌아온 대답은 성씨뿐이었다. 나는 그 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이 선생님이라 불렀다.

외아들인 이 선생님은 오래 전 울산에서 서울로 떠나왔다고 한다. 그분의 부모님은 울산 방어진항 인근에서 가자미 잡이 남의 집 배를 타시던 어부셨다. 그러던 어느 날 일기예보와는 달리 거센 풍랑을 만나 기관실의 큰 화재로 선장과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하필 그날따라 이 선생님도 선장님께 어렵게 허락을 받고 부모님을 따라 나섰던 터였다. 그 난리 통에 이 선생님은 오른 팔의 중간쯤이 잘리고 다리에도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그나마 천운인지 혼자 신속하게 구조되었다.

이 선생님은 먼 친척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몇 푼의 보상금까지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열두 살 소년에게 진실과 정의는 가려졌다. 시간이 흐르자 그동안 따뜻한 보호자 행세를 하던 그 친척은 마각을 드러냈다. 과거 그 소년의 꿈은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는 것이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그 친척은 소년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며 은근히 꾀었다.

결국 영등포역에 버려진 빈털터리 소년의 영혼은 폐허가 되었다. 소년의 서울 생활은 차가운 퇴짜가 일상이었다. 낮에는 중국 음식점에서 허드렛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고 늦은 밤이면 홀로 거리에서 절뚝거렸다. 가로등과 달빛만이 한 손으로만 빈병을 줍는 가련한 소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잠시 후 나와 지구대장은 약속처럼 이 선생님과 함께 근처 식당으로 갔다. 다음 행보에 늘 익숙한 이 선생님이 앞장서서 삐걱거리는 2층 계단으로 올라섰다. 슬프도록 앙상한 그의 등에 늦가을이 너덜거렸다.

이 선생님은 간경화로 부풀어 오른 배를 살짝 비틀어 식당 벽에 기대어 앉았다. 우리의 착잡한 얼굴과는 달리 벽에 붙은 2002년 10월분의 달력 여성모델이 지나치게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얼마 전 월드컵 때 우리 모든 국민들의 환호성을 많이 닮아 있었다.

"우거지 백반 세 그릇 주세요. 한 그릇은 간을 세게 하지 마시고요."

나는 식당 주인에게 큰 소리로 음식을 주문했다. 그 옛날 이 선생님의 어머니께서는 식구들에게 우거지 백반을 자주 끓여줬다고 하신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부터 그 음식은 우리들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물론 그 식당 주인은 처음부터 내 부탁으로 이 선생님의 음식은 따로 짜지 않게 세심하게 조리했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 불편함을 무릅쓴 그 식당 주인의 배려는 늘 따뜻하게 데워놓은 그 식당의 방만큼 포근했던 것 같다.

"조금 천천히 드세요."

나는 왼손으로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이 선생님이 걱정되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나 너무 허기져서인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식사에 더 속도를 냈다. 그때 지구대장이 이 선생님 몰래 살그머니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냥 편히 드시게 하자는 표시로 고개를 살짝 모로 저었다.

식사를 다 마친 이 선생님이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나는 그때마다 그가 장애 노숙인에 대한 세상의 차별과 짓밟힌 인권을 서럽게 꿀꺽꿀꺽 마시는 것 같아 늘 가슴이 아렸다.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는 일에만 익숙한 이 세상에서 타자를 위한 따스한 사랑이 아직 남아는 있을까?

3. 방어진을 향한 꿈, 그 쓸쓸한 희망가

"요즘 부쩍 방어진항에 가보고 싶네에."

"이 선생님, 제가 꼭 모시고 갈게요."

"가자미 떼도 만나고 싶네에. 그 바다에서 그리운 부모님도 꼭 뵙고…"

이 선생님은 내게 가끔 고향 울산 방어진항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그 애원조의 하소연을 할 때마다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도 그때마다 울컥한 마음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멀지 않아 다가온 갑작스런 작별로 그 약속은 끝내 무산되었다. 지금도 좀 더 일찍 서두르지 못한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아프고 후회스럽다.

4. 사회적 약자들의 배회, 그리고 내 단단한 다짐

그 후로도 나를 향한 이 선생님의 천 원짜리 한 장 요청은 도돌이표였다. 나는 유독 내게만 부탁하는 그 천 원짜리 레퍼토리의 이유가 조금은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내 부질없고 이 선생님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가능한 이 선생님과 일주일에 두어 번은 점심을 같이 했다. 그 일은 나와의 실팍한 약속이었다. 이 선생님도 나와 점심을 먹는 날이면 늘 우리가 약속한 철거촌 주변에서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점심 전이라 철거촌 주변 골목을 순찰했다. 그 때 멀리서 이 선생님이 그 동네 유명한 생선구이 집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다가갔다. 이 선생님은 의외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화창한 날씨 덕분에 동전 통에 백 원짜리 동전이 그 한 장소에서만 두 줄 정도 쌓이는 행운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여기는 손님들이 들어오는 입구예요. 다른 곳으로 가주시지요!"

그때였다. 그 식당 주인이 밖으로 나와 이 선생님을 조금은 언짢게 대했다. 물론 그분의 언행은 거칠지 않았고 비난할만한 처사도 더욱 아니었다. 그분은 매년 연말이면 독거노인 분들을 돕는 등 인품이 좋은 분이셨다.

이 선생님은 하릴없이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구운 생선 냄새 진동하는 그 식당을 몇 번 뒤돌아보더니 힘없이 돌아섰다. 바람에 그 냄새마저 곧바로 신기루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선생님의 깊은 허기는 컴퓨터 자판의 백스페이스처럼 몇 번 클릭하는 것만으로는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의 단풍잎도 숨죽이며 이 선생님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 식당 주인은 가끔 동 행사 관계로 안면이 있는 분이셨다. 그분은 나를 보시더니 우물쭈물 목례를 한 후 급히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그분은 평소 따스한 분이라 내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처음에는 그 식당에 들어가 이 선생님이 그토록 드시고 싶어 했던 생선구이를 대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주인분이 조금 민망해하실 것도 같아 근처 단골 백반집으로 향했다.

"동장님, 아무리 철거촌에서 발생한 쓰레기라지만 공익과 주민들의 위생을 위해서라도 구청에서 급히 치워줄 예산을 다시 부탁해보시지요."

"저도 계속 보고하는 중인데 조금은 어렵네요."

재개발 사업은 지자체 소관이다. 지구대장이 신경 쓰지 않아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지구대장은 가끔 나를 찾아와서 쓰레기 처리 예산에 대한 확보를 건의했다. 그러나 그 예산 배정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 쓰레기를 치울 예산에는 사적인 영역도 얽혀 있었다.

"동장님, 가능하시다면 슬픈 영화 한 편만 보고 싶네에."

단풍도 거의 다 져버린 만추의 어느 흐린 날이었다. '슬픈 영화?' 나는 슬픈 영화를 보고 싶다는 이 선생님의 다소 생뚱맞은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선생님의 지나온 삶과 시간 자체가 이미 슬픈 영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본청에서 우리 동네를 선정해서 추억의 야간 영화 관람 프로그램을 개최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 후 나는 이 선생님과 함께 영화가 상영될 동네 하천 주변 가설무대로 이동했다. 별이 냇가에 쏟아질 것 같은 맑은 늦가을 밤이었다.

이 선생님은 소풍 가듯 앞장서서 걸어갔다. 이윽고 막이 오르고 서정적인 음악과 함께 대형 화면 자막에 굵은 글씨로 '삼포 가는 길'이 떴다. 다행인지 우연인지 이 선생님이 그토록 원하던 그 슬픈 영화였다.

"저 비렁뱅이 아직도 살아 있네!"

"선생님,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당장 사과하세요!"

달동네 분들은 모두 각자의 깊은 추억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잘 모르는 동네 분이 이 선생님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심한 말을 내뱉었다. 이 선생님의 얼굴에 분노보다 패배가 배어나왔다. 그 동네 분은 강한 내 질책에 잠시 후 주춤주춤 자리를 떴다. 다행히 날씨는 좋아 꽤 많은 주민들이 이 선생님의 동전 통에 동전을 쨍그랑 넣어주었다. 가을밤이 째깍째깍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설원에서 이리저리 쫓기는 극중 '백화'를 보며 찔끔 눈물이 났다. 갈 바를 몰라 이리저리 배회하는 '백화'는 그대로 영원한 디아스포라 이 선생님이었다.

"이 선생님, 백화가 좀 안 됐지 않았어요?"

"……"

나는 문득 대학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작가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을 소환했다. 확실히 문장이 화면으로 치환되자 더욱 감동적인 이야기로 바뀐 것 같았다. 이윽고 나는 이 선생님께 내 어쭙잖은 영화 감상평을 전했다. 그러나 대답이 없어 궁금한 마음에 흘끔 곁눈질을 해봤다.

이 선생님이 조용히, 그러나 컥컥 울고 있었다. 눈물을 삼킨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평소 거리에 내동댕이쳐져도 울지 않았던 산전수전 다 겪은 분이었다. 그의 눈물에서 슬픔의 냄새가 났다. 아차 싶었다. 그러나 그분이 서럽게 울기 위해 슬픈 영화를 보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마을의 불량배인 한 알코올 중독자가 이 선생님 앞을 가로 막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 남자를 그냥 최 씨라고 불렀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그 최 씨의 호칭에서 '씨'자 대신 '가'자로 바꾸고 그 앞에 '못 된'이란 관형어까지 붙였다. 최 씨는 이 선생님보다 열 살 남짓 어렸다. 거친 성품의 그는 오래 전 이혼 후 그 철거촌 주변 지하 셋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나름 씩씩한 이 선생님도 이상하게 그 최 씨 앞에서는 말대꾸도 잘 못했다.

"동장님, 알코올 중독은 뇌와 관련된 신경정신질환입니다. 따라서 중독자의 인격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뇌의 전두엽 이상으로 저절로 발현되는 공통적 증세인 거죠. 기침감기도 의지를 갖고 참으려 해도 공통 증세인 기침이 저절로 나오는 증세잖아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그 환자가 비인격적으로 기침한다고 비난하던가요? 그러나 알코올 중독은 질환일 뿐인데도 인격파탄자라며 큰 비난을 하죠. 그래서 불쌍한 거죠. 최 씨도 치료와 함께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에도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곳은 오랜 세월 전 세계에서 의학적으로도 검증된 알코올 중독 회복 자조모임입니다."

나는 전부터 잘 아는 동네 한방병원 원장님께 최 씨의 알코올 중독을 무료로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었다. 그러나 최 씨는 온갖 핑계를 대며 그 원장님의 상담을 피했다. 나는 처음으로 원장님 덕분에 최 씨가 알코올로 인한 뇌질환 때문에 거친 행동을 저절로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도 그간 순찰 도중 무례한 그가 보이면 가능한 피했었다. 그러나 질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측은한 마음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알코올 중독에 대해 심도 있게 공부하리라 다짐했다.

5. 숲 치유, 아리 아리랑

어느 날 나는 이 선생님에게 동네 뒷산 산행을 제안했다.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진 이 선생님의 경우 깊은 숲의 산소를 마시면 일반인들보다 건강에 더 큰 효과가 있다는 한방병원 원장님의 조언 때문이었다. 이 선생님은 내 산행 제안에 의외로 소풍 가는 것처럼 크게 반겼다. 우리는 휴일인 토요일에 맞춰 점심을 함께 한 후 산행을 시작했다.

조붓한 숲길을 따라 구절초와 어수리 풀이 누가 더 하얀지 서로 시합하고 있었다. 나는 곁에 주저앉아 그 꽃들의 힘찬 겨루기를 눈도 떼지 않고 심판 봤다. 그러나 차마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줄 수 없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러나 이 선생님은 혼자 남아 그 꽃들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나는 이 선생님의 끈질긴 집중과 감성적인 면모에 내심 놀랐다.

우리가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는 잠시 분위기를 띄우려고 손나팔을 만들어 야호를 크게 외쳤다. 이 선생님도 곧바로 따라 했다. 우리들의 외침에 놀란 호랑나비 한 마리가 급히 날아갔다. 처음에는 멀리까지 날던 그 나비가 조금은 안심이 되었는지 차츰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날갯짓을 일순 멈추고 바람에 기대는가 싶더니 이내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아까 우리들이 보낸 야호의 메아리가 늑장 대답을 보내왔다.

숲의 작은 꽃과 풀들은 점묘화처럼 여기저기 물결무늬를 만들었다. 우리가 탄성을 내지르자 그 풀꽃들도 반갑다는 추임새를 보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몇몇 꽃잎들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그 꽃잎들은 숲길에 누워 있어도 풍경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꽃들은 거꾸로 내게 내년에도 다시 보자는 따스한 위로를 보내는 것 같았다. 숲 사이로 기어 다니는 풀벌레들도 우리에게 근황을 물었다. 우리들은 차츰 그 풀벌레들의 배경이 되어갔다. 여우볕을 피해 머리카락 보일세라 꽁꽁 숨은 꽃무리들도 여럿 보였다. 빛과 꽃의 알싸한 숨바꼭질이 따로 없었다. 그때 바위 아래 숨어 가장 안심하고 있던 꽃잎들이 우리 반대쪽에서 비추던 햇발들에게 들켰다. 뒤늦게 놀란 그 꽃잎의 그림자들이 우리 쪽으로 그 발을 길게 내뻗으며 도망 왔다.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작 '천 원짜리의 비밀'. 일러스트 김재경 작가

6. 인간 내면의 이기적인, 슬픈 이중성

가끔 지인들 중에는 내가 이 선생님과 함께 다니는 것을 언짢게 여기시는 분들도 계셨다. 심지어 대놓고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분들도 있었다. 물론 나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마다 두루뭉술하게 넘기며 그냥 웃었다. 내겐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 겉모습보다 이 황량한 시대, 상처 받고 있는 그 연약한 이 선생님이 더 소중했다.

누군가에게 천 원짜리는 계륵일 것이다. 요즘 그 천 원으로 어른들이 살 수 있는 물건은 거의 없다. 더구나 아무도 천 원짜리 인생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천 원짜리는 이제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가 되어 밀려다닌다. 그러나 이 선생님에게 그 천 원은 무려 백 원짜리 동전 열 개였다.

얼마 후 내 의지는 결실을 맺어 그 해 겨울 초입에 쓰레기 정비 예산이 우리 동에 교부되었다. 그날은 눈발이 환장하게 나부끼던 날이었다. 달동네 골목은 조붓하여 작은 트럭들이 여러 대로 나뉘어 들어왔다.

언덕을 넘어 일제히 돌진해오는 탱크들의 습격 같았다. 나는 오래 전 탱크 부대에서 근무했던 내 군 생활을 어슴푸레 떠올렸다. 아침 일찍 동네 아이들이 트럭들을 따라 환호하며 내달렸다. 나도 이상하게 설렜다. 잠시 후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살수차에서 거대한 물 폭탄이 분사되었다. 내 오랜 불안을 씻어주는 그 물줄기에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그래, 지금 우리는 무지개 같은 희망을 보고 있는 거야!'라고 되뇌었다. 그 감탄을 뒤로 한 채 작업은 워낙 쓰레기가 많아 종일 이뤄졌다.

"동장님요, 마 천 원짜리 한 장만 주이소. 이번이 마지막입니데이."

점심 무렵이었다. 나는 이 선생님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그가 아까부터 멀리서 나를 지켜봤는지 눈발을 뚫고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궂은 날씨여서인지 여전히 천 원짜리 한 장을 외치는 그의 동전 통이 텅 비어 있었다. 이 선생님이 말하는 '천 원'과 '마지막'은 자존심과 획득 가능성의 경계쯤에서 선택됐을 것이다. 그날따라 이 선생님이 유독 초라해 보였다. 작년에 내가 선물한 외투가 여기저기 파이고 찢겨 너덜거렸다.

그 순간 한 지인이 이 선생님을 향해 역정을 냈다. 그리고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이 선생님에게 내던지듯 건넸다. 평소 내가 이 선생님과 다니는 것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던 분이었다. 찢긴 가운데를 빨간 테이프로 길게 붙인 헌 지폐가 잘려나간 이 선생님의 인권처럼 팔랑팔랑 땅에 떨어졌다. 나는 그 분이 평소에는 나름 수더분한 분이라 더욱 놀랐다.

"뭐라꼬! 다시 말해봐라!"

지폐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를 지르는 이 선생님의 눈빛에 슬픔과 분노가 섞여 나왔다. 점차 들숨보다 날숨이 거칠어졌다. 흐르는 그의 눈물이 바람에 심하게 구부러졌다. 평소 차분하던 그분이 아니었다.

나 외에는 이 선생님의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지폐가 나뒹굴어 살얼음이 진 작은 도랑으로 툭 떨어졌다. 이 선생님이 순식간에 몸을 날려 그 차갑게 물 묻은 지폐를 집어 얼른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까 그 지인분이 크게 웃었다. 나는 그 지인에게 너무 화가 났지만 겨우 버텼다. 나는 지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이 선생님과 함께 그 자리를 떴다.

우리는 우거지 백반 집으로 들어섰다. 그때까지도 그 겨울의 바람처럼 냉랭했던 아까 그 지인 분의 송곳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동장님 고맙습니데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줘가…"

그의 발음은 갈수록 받침이 사라져갔다. 그런데 우리가 막 식당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하필 우리 동 직원들이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은 고개를 들어 손차양을 하고 우리를 관찰하더니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동장과 노숙인 사이를 말로만 듣던 직원들이 우리를 직접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는 직원들에게 괘념치 말라는 손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뒤돌아 앉아 이 선생님과 식사를 마쳤다. 마침내 오후 늦게 쓰레기를 잔뜩 실은 트럭들이 내 불안을 싣고 떠났다.

7. 쓰러진 노숙인, 그리고 입원

다음날은 겨울비와 눈이 섞여 내렸다. 나는 이 선생님을 급히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내 손에는 이 선생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두꺼운 겨울 외투 한 벌이 들려 있었다. 나는 잔뜩 걱정이 되어 다음 날에도 아침부터 이 선생님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진 나는 온 동네를 정신없이 쏘다녔다. 그 동네 골목길은 경사진 길이 많아 눈비가 내리면 위험하긴 해도 평소 익숙한 내 순찰 길이었다. 그러나 나는 경황이 없어서인지 빗길에 미끄러져 두어 번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그때 뜻밖에도 최 씨가 달려와 이 선생님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 선생님은 엉뚱하게 옆 동 후미진 골목에서 기력을 잃은 채 휑하니 내버려져 있었다. 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왼 손에 비 묻은 천 원짜리 지폐를 쥔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일전에 모욕을 겪었던 그 천 원짜리였다. 쇠약한 그에게는 그 천 원짜리도 무척 무거워보였다. 이 선생님은 그 천 원이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며 댓돌처럼 단단히 믿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날 최 씨는 이 선생님에게 형님이라는 호칭까지 써가며 걱정을 했다.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최 씨의 변덕에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일전에 한방병원장님의 말을 들었던 터라 그의 들쑥날쑥함이 이해가 되었다.

다행히 최 씨는 그 후 그 원장님의 끈질긴 설득으로 치료와 함께 단주 모임에도 참석했다. 덕분에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더구나 가끔 우리 동에서 민관 일제 대청소를 할 때면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내 순찰 중에도 어디선가 달려와 공손하게 절을 했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나는 그 엄청난 변화에 알코올 중독의 오묘한 정체를 더욱 연구하고 싶어졌다.

궂은 날 때문인지 이 선생님의 동전 통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전보다 더욱 부풀어 오른 그의 배를 바라보며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리고 며칠 후 평소 가까운 시립병원장에게 연락하여 이 선생님을 급히 입원시켜드렸다. 여전히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얼마 후 폭설이 내리던 날, 철거촌 내부 폐건물에서 큰 화재가 났다. 나는 부랴부랴 화재 현장에 도착했다. 가장 연로한 노숙인 한 분이 빨리 피하지 못해 다리에 2도 화상을 입었다. 좁은 철거촌에서 만취한 노숙인들이 밤새 술을 마시며 강추위를 이겨내느라 불을 피우고 잤다고 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불꽃들이 불규칙하게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결국 그 노숙인들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삽시간에 위험에 처한 것이다.

"며칠 전에 미리 쓰레기를 치우지 않았으면 인명사고가 컸을 것입니다."

소방서 관계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게 빠르게 설명했다. 노숙인들은 재난의 중심에 자주 노출되면서 점점 무감각해졌을 것이다. 그들은 딴청을 피우며 누구도 재난의 경고등을 먼저 켜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 동네 분들도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어 민원을 제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이 선생님이 떠올랐다. 만약 몸이 불편한 이 선생님이 입원하지 않고 예전처럼 그 쓰레기 더미 가운데 있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나는 진저리를 쳤다. 재난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짧은 순간 피었다 지는 벼꽃처럼 우리들 삶의 터전을 예기치 않게 급습하는 것 같다.

8. 마지막 인연

나는 문득 이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하여 퇴근 후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우리 부처의 폭설 대책반들이 밤새 내린 폭설을 종일 치웠지만 교통 상황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 선생님이 이런 날씨에 노숙 대신 그나마 병실에 누워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이 선생님은 안타깝게도 퀭한 눈빛으로 힘없이 내 손을 잡았다. 움푹 파인 광대뼈 사이로 우리 두 사람의 마지막 인연이 바스락거렸다. 나는 이 선생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 선생님을 잡고 있는 내 손이 덜덜 떨렸다.

"동장님, 마지막으로 우유 한 팩만 사주이소."

평소 습관 같았던 그의 마지막이란 말이 이번에는 유언처럼 들렸다.

"간호사님, 환자분이 우유를 마셔도 되나요?"

"환자분이 제게도 똑같은 부탁을 했었습니다. 우유가 환자에게 투약하고 있는 약 성분과 충돌할 가능성은 있지만 입을 축이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나는 애원하는 이 선생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갈팡질팡했다. 그러나 그 간호사의 말에 힘을 얻고 이 선생님의 입에 조심스럽게 우유를 아주 조금씩 축여 드렸다. 이 선생님의 마지막 우유였다. 잠시 후 그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보호자님, 환자가 매우 위급합니다. 지금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나흘 뒤 막 퇴근 무렵이었다. 이 선생님이 위중하다는 병원의 급한 전화가 왔다. 뼈만 남은 이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 가까스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의식이 희미한 가운데서도 자꾸 자신의 왼쪽 호주머니를 가리키더니 눈을 감았다. 나는 울지 않았다. 사내들의 조용한 작별법이다.

"보호자님! 돌아가신 분께서 며칠 전부터 계속 자기 왼쪽 바지 호주머니에 넣은 유서를 꼭 보호자님께만 보여 드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선생님은 이미 죽음을 예감한 것 같았다. 간호사의 이야기에 나는 황급히 그의 왼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찢어진 퇴계 이황 선생님의 오른쪽 어깨에 빨간 테이프가 붙은 천 원짜리가 보였다. 일전에 급히 도랑에서 다시 주웠던 그 천 원짜리는 이리저리 깁고 퇴색한 이 선생님의 생을 닮아 있었다. 이 선생님은 그 돈으로 평소 참 좋아하던 우유를 사 마시지 않고 참았으리라. 그러나 유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평생 상처뿐인 천 원짜리 인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천대도 힘겨웠지만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보라와 비바람 부는 날씨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다행히 동장님은 조건 없이 저를 지지해주신 따뜻한 까치밥 같은 분이셨습니다. 고백하지만 제가 천 원짜리를 달라고 했던 것은 돈을 받겠다는 것보다 동장님과 저의 인연이 끊어질까봐 두려워서였습니다. 이제 저도 동네 시계탑 위를 언제나 평화롭게 스쳐가는 비둘기들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겠습니다. 이승에서 너무나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못난 이** 배상."

나는 천 원짜리 지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폐 앞뒤에 써내려간 아주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그 가볍고 좁은 천 원짜리 지폐에는 그의 묵직하고도 긴 인생의 목록이 꽉 차 있었다. 나는 이 선생님의 깊고 두꺼운 정신에 많이 놀랐다. 그리고 언젠가 어린 시절 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이 선생님의 말을 우스개로 들었던 나를 많이 나무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이 선생님의 천 원짜리 비밀이었다. 사실 나는 단순히 이 선생님이 빵 하나라도 구입할 돈이 필요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순수한 절박감이었다는 고백에 목이 메었다. 더구나 이 선생님은 처음으로 유일하게 내게만 자기 이름을 밝혔다. 살을 에는 혹한의 날씨에 모든 사람들이 급히 들어가는 따뜻한 방은 빈 동전 통을 들고 헤매는 이 선생님의 처절한 바깥이었을 것이다.

"00 형님, 다시는 아픔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이제 그 하늘 주소지에서는 장대비가 오거나 폭설이 내려도 걱정 없으시겠지요."

가늘어진 햇발의 잔해가 창틀을 비집고 들어오느라 비명을 질렀다. 벌겋게 물든 그 노을이 내 마음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왔다. 나는 그렁거리는 눈물을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며 어둔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00 형님!"을 반복해서 불러보는 내 말을 따라 하늘 멀리 이름 모를 새떼가 작별의 첫 자음을 닮은 'ㅈ'자를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계속 눈물을 참아냈다.

그러나 누군가 까치발을 하고 조심스레 살강의 그릇을 꺼내도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는 피할 수 없는 법이다. 내 참았던 울음도 미세하게 새어나왔다. 마침내 나는 이 선생님과의 짧았지만 질박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눈물이 줄줄 흐르도록 그 굵은 슬픔을 내버려두었다.

곁에서 함께 안타깝게 지켜보던 담당 간호사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간호사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 분도 처음부터 아무런 피가 섞이지 않은 우리 두 사내의 깊고 특별한 우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은 그간 병실에서 숱한 죽음을 목격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가장 처절하고 비극적인 작별이라 씌어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뜨거운 손으로 이 선생님의 차디찬 왼손을 데워주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했지만 가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본청의 노숙자대책반과 자원봉사단체와 연결해 그분이 비둘기처럼 그토록 자유롭게 날고 싶어 하던 하늘로 보내 드렸다.

돌아보면 이 선생님은 그동안 내게 무언가 부탁할 때마다 '마지막'이란 말을 수없이 끄집어내셨다. 마지막이란 말은 참 슬프고 절박하다. 그 형님은 늘 한순간 한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사셨으리라. 아무도 자신의 처지에 귀 기울여주지 않을 때 그 '마지막'이란 말로 타인들의 가슴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었을 것이다.

9. 내 삶의 작은 기록

"동장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동안 동장님을 지켜보면서 제 가슴에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동장님께서 그냥 불쌍한 노숙인에 대한 동정을 하시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긴 실천의 현장을 보면서 앞으로 제가 수급자분들에게 어떻게 복지를 나눠드려야 할지 가슴으로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냥 선배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선배님."

장마철로 접어들어 내가 상급부서로 전출하기 전날이었다. 신입 사회복지직 여직원이 내 사무실 방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쭈뼛거리며 들어오더니 듣기에 너무 민망한 말을 꺼냈다. 언젠가 식당에서 이 선생님과 나를 목격한 후부터 눈에 띄게 내 앞에서 고개를 깊이 숙였던 그 직원이었다.

나는 갑작스런 그 직원의 말에 당황하여 말 대신 하릴없이 어색한 웃음만 건넸다. 그리고 속으로만 나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냥 한 인간으로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꺼져 가는 그 노숙인에게 마땅히 따뜻하게 도와드렸을 뿐이다. 게다가 그분은 장애인이셨다.' 물론 내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긴 세월 여러 봉사활동을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도 한 몫 했었다.

그 여직원이 떠난 후 나는 하염없이 내리는 장맛비 속에서 가지가 꺾인 장미 한 송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장마와 장미, 그 점 하나 차이만 나는 두 단어를 교대로 발음해 보았다. 날씨 때문에 빗물만 출렁이는 동전 통을 들고 언덕을 오르는 이 선생님의 환영이 보였다. 장마 속에서 털썩 꺾여버린 그 장미는 영락없이 그 형님이었다.

나는 그 후 국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퇴근 후 오래 전 그토록 희망했던 알코올 중독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말이면 각종 알코올 중독 강연이나 세미나에 수없이 참석했다.

그리고 50대 초반에 시작한 복지학 중독 분야 야간 대학원 석, 박사 과정도 은퇴 후 회갑이 지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회갑의 나이에 매주 여러 과목의 리포트를 쓰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더구나 모두 자식들 같은 젊은 원우들 틈에서 공부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너무 힘겨웠다.

나는 일주일에 세 번 지친 몸을 이끌고 멀리 소재한 대학원으로 향했다. 무엇보다 침침한 눈으로 두꺼운 영어 원서를 뒤적일 때면 몸이 다 떨렸다. 두어 번 교재에 코피를 주르륵 흘릴 때도 있었다. 곁에서 계속 지켜보던 아내는 조심스레 포기를 권했다. 그러나 결코 내 의지를 꺾진 못했다. 나는 과거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된 최 씨의 기적에 경탄했었다. 따라서 알코올 중독의 메커니즘을 정복하리라 다짐했던 나와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마침내 내 알코올 중독 관련 양적 연구 논문이 통과 되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덕분에 그 후 경기도와 정식 계약하여 경기도 31개 전체 지자체 사회복지직 공무원들에 대한 중독 관련 전문 강사가 되었다. 특별히 알코올 중독 수급자나 민원인분들을 두려움 없이 효과적으로 상담하는 기법에 대해 집중 강연했다. 그 강연은 감사하게도 여기저기 소문이 나서 서울 등 수도권 시·군·구에서도 연이어 초청을 받아 관련 강연을 했다.

그리고 역시 회갑의 나이에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원' 자격시험에도 어렵게 합격했다. 나는 그림 그리듯 서툴게 한글을 쓰는 다문화 수강생들을 정성껏 가르쳤다. 물론 통상 30대 정도의 다른 젊은 한국어 교사들은 전자 기술까지 접목하여 역동적으로 가르쳤다. 최연장자인 나는 상대적으로 디지털 운용이 부족했다. 대신 아버지 같은 사랑의 심경으로 진정성 있게 지도했다.

한 번은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이 우연히 강의실 복도 창문을 통해 나를 발견했다. 그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입실한 그분께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전했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그분은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나도 이제 내년이면 칠순이다. 지금은 원격 평생 교육원에서 복지학 지도교수로도 일한다. 내게 강의를 듣는 그 학생들은 나이대가 20대부터 60대까지로 다양하다. 젊은 날 가정 사정 등으로 공부할 기회를 놓친 분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절치부심 일과 공부를 힘겹게 병행하시는 아름다운 분들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진심을 다 해 8년째 지도하고 있다. 그리고 매번 처음 만나는 수강생들에게 사회복지사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스스로를 늘 깊이 성찰하라고 지도한다. 사회복지사가 고객들의 하소연을 공감하고 응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소양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사회복지사 본인의 성격상 결함이 고객들에게 잘못 전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육원에는 지도교수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 규정이 있다. 즉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사이트를 방문하고, 일부 수강생들의 토론에 1회 정도 댓글을 달아야 한다. 그리고 과제 채점은 모든 수강생들에게 50자 이상의 채점 의견을 써야 했다. 그러나 나는 매일 방문하여 각 수강생들마다 전원 댓글을 달아준다. 채점은 편지처럼 각각 300자 이상씩 내 마음을 담아 의견을 남긴다. 답안에서 보여준 수강생들의 진정성과 아픔에 대한 반추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그분들의 희망을 겸허하게 응원한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수강생들이 철저히 익명으로 실시하는 교수 평가에서 전체 과목 지도 교수 중 최우수 교수로 여러 번 선발되었다. 특별히 익명의 설문지 기타 란에 등장했던 "지금까지 강의 들었던 모든 과목 교수님들 중에서 가장 따뜻하신 분이라 단언합니다."라는 글은 지금도 작은 보람을 느낀다. 그 수강생의 마음에 내 작은 정성이 깊이 전달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열 두 분의 상처 받은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어준 일이다. 나는 그간 지인들로부터 비밀리에 알코올중독자들을 소개 받았다. 그때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무료로 상담해드렸다.

그 덕분인지 그분들은 지금 대부분 회복되어 제2의 행복한 삶을 꾸리신다. 지금도 그분들 중 몇몇 분은 나를 처음 만난 날을 다시 태어난 기념일로 정하신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은 해마다 처음 나를 만났던 날이 오면 잊지 않고 찾아오시거나 전화로라도 꼭 연락을 하신다. 그때마다 알코올 중독자분들과 그 가족들은 나를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라며 고마워하신다. 그러나 나는 그분들이 건강하게 다시 살아 주셔서 오히려 감사할 뿐이다.

10. 에필로그

돌아보면 나만 이 선생님을 보살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형님도 빈틈이 많은 내 삶을 진지하게 다시 일굴 수 있는 마음의 밭이 되어주셨다. 생각건대 우리는 부족한 부분을 각자 메꿔주는 서로의 바지랑대였던 것 같다.

"00 형님,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리네요. 그러나 형님의 동전 통이 걱정 되지 않아 다행입니다. 부디 하늘에서는 아프지 마시고 꼭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비가 내리는 이 밤, 그 형님을 향한 내 중얼거림이 빗소리에 더욱 낮게 깔린다. 내 생도 이제 그믐달처럼 많이 기울고 허름해졌다. 그러나 내게도 미래는 아직 남았다. 세상이 그동안 내게 선물해준 것만큼은 다 못 갚겠지만 늘 빚진 마음으로 나도 세상을 향해 아주 작은 사랑이나마 부어주고 싶다.

내 가족만이 가족은 아니고 내 밥만이 밥은 아닐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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