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4)실익 중심의 경제 협력 확대

글로벌 패러다임 변화 속 공동 대응으로 국제 경쟁력 확보
공급망·첨단 제조업·탈탄소 인프라·노동시장 및 자본시장 등에서 협력 모델 구축

류제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오른쪽)과 이마가와 타쿠오 일본 총무성 국제협력담당 차관은 8월 4일 인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만나 디지털·AI 분야 협력을 강화하기로 뜻을 모았다. 연합뉴스
류제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오른쪽)과 이마가와 타쿠오 일본 총무성 국제협력담당 차관은 8월 4일 인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만나 디지털·AI 분야 협력을 강화하기로 뜻을 모았다. 연합뉴스

세계무역 질서의 변화 등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한일 양국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양국이 직면한 여러 리스크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단독 대응 보다는 상호 보완적 경제 협력 모델로 공동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일 경제 협력의 방향성을 주도하기 위한 우리 정부의 능동적 대응도 요구된다. 전략적 협력 아젠다 설정, 정치적 변수로부터 경제 협력 분리, 민간 중심의 지속가능한 협력 생태계 조성 등에 힘써야 한다.

울산 현대자동차 수출선적부두의 모습. 연합뉴스
울산 현대자동차 수출선적부두의 모습. 연합뉴스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 경제관계 구축 과정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 경제관계는 자금, 기술, 통화 협력 순으로 변화해왔으며 일본 주도, 수직적 분업, 대일 무역적자 고착이 특징이었다. 청구권자금은 일본 수출을 촉진하는 구조였고 이후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으나 소재, 부품 분야에서는 일본 의존이 지속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통화 협력이 강화되며 관계가 확장됐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한국의 국산화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대일 무역구조에 균열이 생겼다. 독도 방문, 강제징용 판결 등으로 정부 간 충돌이 잦아지면서 경제 협력도 흔들렸다.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이후 냉각된 관계는 2023년 셔틀외교 복원과 수출 규제 철회로 정상화의 전기를 맞았다. 하지만 2025년 트럼프 재집권과 글로벌 환경의 급변 등으로 다시 불확실성이 증대된 만큼 한일 양국의 경제 협력도 보다 독자적이고 유연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7월 30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조현 외교부 장관(왼쪽)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예방해 면담하고 있다. 조 장관은 이번 방문에서 일본 측과 한일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경주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연합뉴스
7월 30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조현 외교부 장관(왼쪽)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예방해 면담하고 있다. 조 장관은 이번 방문에서 일본 측과 한일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경주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연합뉴스

◆한일 경제 협력의 필요성 증대

한일 양국이 경제 협력을 확대해야 하는 이유는 글로벌 패러다임이 새 국면을 맞았기 때문이다.먼저 지정학(지리적 위치 관계가 국제 정치·안보·경제에 미치는 영향)·지경학(경제적 힘을 이용해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는 것) 리스크의 구조적 심화 요인이다. 21세기 들어 글로벌 공급망은 '저비용·고효율'에서 '탄력성·안정성'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곡물·에너지 공급망이 붕괴된 데 이어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대만해협 긴장 심화로 반도체, AI, 배터리 등 핵심 전략물자의 공급망도 지경학 리스크에 노출되고 있다. 세계은행(2023)에 따르면, 글로벌 공급망 붕괴 취약도 순위에서 한국은 1위, 일본은 7위를 기록했다. 두 나라 모두 에너지, 식량, 핵심 소재·부품의 해외 의존도가 높아 자국 내 생산 만으로는 안정적 조달이 어려운 구조이므로 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글로벌 거버넌스가 재구축되면서 가치동맹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 내 정치 양극화와 자국중심주의(America First) 기조는 트럼프 2기 출범으로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다자체제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미국이 주도하는 일방주의 통상정책이 본격화됐다. 여기에 중국은 대만해협, 남중국해, AI·반도체 등 전략산업을 둘러싼 지정학·지경학적 불확실성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따라서 '미중 양강구조 + 다자체제 약화 + 중견국(미들 파워) 역할 증대'라는 복합 패턴 속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등 기본 가치를 공유하는 한일 양국은 글로벌 거버넌스 재편 과정에서 협력할 이유가 다분하다.

첨단 기술산업의 패러다임 전환도 빼놓을 수 없다. AI, 반도체, 양자컴퓨팅, 바이오, 우주항공 등 첨단기술 산업의 급부상은 국가 간 경제력과 안보력의 핵심 지표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은 막대한 자본 투입, 고급 인재의 대규모 확보, 생태계 내 기업·기관 간 수평·수직 협력이 필수적이므로 단일국가 만으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한일 양국의 기술·인재·자원 풀링(pooling·공용화)이 필요하다.

글로벌 사우스(개발도상국 또는 제3세계 국가) 전략과 시장 확대 차원에서도 한일 양국의 협력 필요성은 커지고 있다. 동남아, 인도, 중동, 아프리카 등의 경제·인구 잠재력이 부상하는 가운데, 양국은 경제 협력을 통해 시장 확대 이익을 누릴 수 있다. DX(디지털), GX(그린), BX(바이오)를 연계해 표준체계를 공동 구축하고, 글로벌 사우스 시장 진출 및 투자 확대를 통해 상호 윈윈의 협력모델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 경제안보 이슈(반도체 핵심 소재, 데이터·통신 인프라 등)의 심화, 트럼프 변수, 한일의 변화된 무역 분업구조 등은 한일 경제 협력의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수출 제한으로 2021년과 2023년 두 차례 요소수 품귀 대란이 발생하는 등 글로벌 공급망 붕괴 취약도가 높다. 사진은 2023년 12월 6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금성이엔씨에서 직원들이 요소수 출하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우리나라는 중국의 수출 제한으로 2021년과 2023년 두 차례 요소수 품귀 대란이 발생하는 등 글로벌 공급망 붕괴 취약도가 높다. 사진은 2023년 12월 6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금성이엔씨에서 직원들이 요소수 출하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미래지향적 한일 경제 협력 방안

한일 양국이 한계를 극복하고 협력의 필요성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공급망, 첨단 제조업, 탈탄소 인프라 구축, 노동시장 및 자본시장 등에서 협력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공급망 협력 모델= 한국은 중국의 요소수 수출 규제로 물류 대란을 경험했고, 일본도 중국의 희토류 수출 제한으로 산업 전반에 타격을 입었다. 광물, 식량, 에너지, 원자재 등 전략물자 리스트 상호 매핑(mapping), 공동 비축 및 조달 인프라 구축, 기술·R&D 협력 등을 통해 공급망 리스크에 공동 대응해야 하는 이유다.

아울러 제3국 공동 농업투자 및 계약 재배, 공동 조달·비축 체계 구축 등을 통한 식량 협력과 LNG 공동 구매 및 카고 스왑(Cargo Swap, 물량 교환) 확대, 수소·암모니아 청정에너지 협력 등 에너지 공급망 협력도 필요하다.

▷첨단 제조업 협력 모델= 일본은 소재·부품·장비 분야에 강점이 있고 한국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대량 생산과 시스템 통합 역량이 뛰어나다. 양국이 첨단산업의 가치사슬 전 단계에서 중복 투자 최소화, 공급원 다변화, 공동 비축체계 구축 등 상호 보완적 협력을 한다면 글로벌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또 막대한 투자와 고급 인재의 확보가 필수인 첨단산업에서 한·일은 미·중에 비해 단독 대응에 한계가 있으므로 자본과 인력의 상호 보완·공유로 기술개발 속도와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6G, AI 윤리, 양자 암호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국제표준 선점도 양국이 협력할 부분이다.

▷탈탄소 인프라 구축 협력 모델=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미국 IRA 등 글로벌 기후 규범 강화 속에서 탈탄소 인프라를 선제 구축하지 않으면 수출 경쟁력 약화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린 수소, 암모니아, CCS(Carbon Capture & Storage, 탄소 포집·저장) 등 탈탄소 인프라 구축은 막대한 초기 투자와 장기간의 기술 개발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자본·기술·인재를 풀링해 투자 위험을 분산하고, 수소·암모니아 생산·운송· 저장·활용 모든 단계에서 공동 투자 및 기술 개발 추진으로 사업화를 가속화해야 한다. 양국이 탈탄소 인프라 개발 경험과 금융 역량을 결합하면 제3국 시장에서의 공동 진출과 경쟁력 제고도 가능하다.

▷노동시장 및 자본시장 통합 모델= 한국은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하고 일본은 숙련 화이트칼라 인력 수요가 높다. 양국이 노동시장 연계 및 통합을 한다면 각자가 가진 경제·사회적인 구조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일 간 자본시장도 기본적으로 자유화돼 있기는 하지만 금융상품 상호 진출, 기업의 상장, 결제·청산 인프라, 금융감독 공조 등은 미흡하다.

따라서 자본시장 통합 노력을 통해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통화 스왑(자국 통화를 상대국 통화와 교환하는 계약) 확대 및 결제시스템 연동을 통해 환리스크 완화 및 금융위기 대응능력도 강화할 수 있다. 나아가 한국과 일본이 공동 금융 플랫폼을 구축한다면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가 주도하는 동북아 금융허브 경쟁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도움말 이창민 한국외국어대학교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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