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김우석] '방송3법 저지'라는 진지전(陣地戰)

김우석 국민대 객원교수

김우석 국민대 객원교수
김우석 국민대 객원교수

2006년에 이회창 전 총재를 뵈었을 때다. 필자가 한나라당 디지털정당위원장(당시는 전국 규모의 직선제 당직이었음)에 당선되고 인사드리는 자리였다. "새로이 각광받는 통신영역도 중요하지만, 정치에서 핵심은 방송이야. 방송에 더 각별한 관심을 갖아주길 바라네"라고 충고해 주셨다. 필자가 2002년 대선 때 대선후보의 방송담당 보좌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 필자는 속으로 '맞는 말씀이긴 한데... 앞으로는 역시 포탈 등 통신 쪽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었다. 이회창 총재가 두 번의 대선에서 분루를 삼키셨던 것에 공영방송의 '네거티브 공세'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리라.

네거티브 캠페인 교과서 단골 사례인 '김대업 사건' 같은 가짜뉴스들이 당시 여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었다. 그전에는 '찌라시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공영방송이 스스로 플레이어가 되어 거대한 스피커 역할을 하면서 일파만파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역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지구를 지배한 이유를 "공통된 허구, 즉 이야기의 힘"이라고 말한다. 실체가 없는 허구지만 사회를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국가, 법, 화폐, 권력 등은 모두 사회구성원 간 '공통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 허구의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대표적인 매체가 바로 '방송'이다.

요즘 여·야가 '방송3법'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방송이 바로 그러한 '신화의 전쟁터'인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의 주체인 국민들은 큰 관심이 없다. 당장 체감되지 않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주주 배당과 일자리를 줄게 하지만,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부과하지 않기에 큰 저항이 없는 법인세 증세와 마찬가지다.

'요즘 방송뉴스를 누가 보느냐?'는 이야기도 많이 한다. 하지만, 방송뉴스는 시청률과 상관없이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정치에 관심이 쏠리는 선거기간에는 더욱 그렇다. 유튜브 등 SNS 소식에 방향을 잡고, 구체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방송뉴스다. 게다가 레거시 미디어로서 신뢰를 받는 공영방송이라면, 가짜뉴스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라도 일단 믿고 보게 된다. 이후에 진실이 밝혀져도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후다.

'국민의힘' 계열 우파정당과 달리, 여론에 관심이 큰 좌파와 '민주당'은 진작부터 방송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공을 들여왔다. 한국 좌파는 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자유화를 계기로 큰 변곡점을 맞는다.

'양키 고 홈'을 외치며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동경하던 좌파는 국제적 격변으로 '정치적 지향과 지지기반을 상실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한 번의 남미식 혁명으로 사회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그들은 '그람시의 진지전 전략'을 추종하게 된다.

이탈리아 좌파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사회주의 혁명은 정치권력보다 문화적 헤게모니, 즉 사람들의 '상식'을 지배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설파했다. 그가 말한 '진지전'은 언론, 교육, 시민사회 등을 장악해 국민의 생각과 언어, 감정을 재편하는 작업이다.

우리나라 우파는 지금까지도 '하드파워(Hard Power)', 즉 경찰, 검찰 (심지어는 군대) 등 경성 권력에 집착하는 반면, 좌파는 언론, 시민단체, 학계, 법조계 등 '소프트파워(Soft Power)' 진지를 구축하여 국민의 감정과 상식을 길들이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주창해 온 '100년 정권'의 실체다. 정권이 바뀌어도 여론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권력은 실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늘날 방송은 그 '진지'의 중심이다. 그 진지전의 마지막 퍼즐이 바로 현재 여당이 추진하는 '방송3법'이다.

며칠 전 국회에서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대거 참여한 '방송3법 저지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방송3법 저지 긴급 좌담회'가 열린 지 3주도 안 되어서다. 국민의힘에서 우선순위가 올라간 것은 일보 진전이다. 우파 시민단체들은 바로 '공동투쟁위'로 화답했다. 민주당 드라이브에 국민의힘은 역부족이다. 오로지 국민만이 막을 수 있다. 결국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은 오로지 국민에게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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