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첫 휴일인 3일 포항 송도해수욕장. 한낮 뙤약볕 35℃ 무더위에 이곳은 온통 사람들 천지. 털털거리는 버스로, 초만원 피서열차로, 돈 많은 사장님들은 폼 나는 자가용으로, 어제는 7만 오늘은 10만 인파가 들이쳤습니다.
음식점 협정요금은 있으나 마나, 바빠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상인들. 샤워장에 물이 안 나온다고 아우성인 피서객들. 종일 사람 찾는 방송으로 시끄러운 백사장 스피커…. 해수욕장 코앞에 갓 들어선 포항 제철소에선 철광석을 산더미처럼 부려 놓고 쇳물을 만드느라 폭염도 까맣게 잊었습니다.
방풍림 솔숲이 일품인 송도(松島)가 해수욕장으로 이름난 건 1950년대 후반부터. 이 무렵 포항 해변은 길이 3km, 너비 50m의 고운 모래가 끝도 없어 '명사십리'로 통했습니다. 시간 당 기천환씩 하는 돛단배 유람선은 엘리트 층의 전유물. 바람 부는 대로 선유(船遊)를 즐기다 어선까지 다가가 구한 싱싱한 해물로 회를 치고 유람하는 돛단배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서민들도 한 여름이 무덥긴 매한가지. 초여름 볕이 따가울라치면 벌거숭이 10대 들은 수영복도 없이 알몸으로 우르르 송도로 달려왔습니다. 평일에도 백사장엔 피서객이 거의 3천~4천 명. 이들 중 절반이 10대 소년들. 잔잔한 파도에 수심도 그만이어서 여름엔 송도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포항항을 개항장으로 의결…." 1962년 6월 12일 포항항이 개항장(국제항)으로 지정되면서 송도해수욕장도 새 운명을 맞았습니다. 산업화 바람을 타고 국제항에 걸맞게 각종 시설이 들어서면서 항구와 맞닿은 백사장은 조금씩 자리를 내 주고, 방파제 설치로 바뀐 물길은 해변 모래를 야금야금 쓸어갔습니다.
그래도 여름 송도는 경북에서 피서 1번지. 1965년 8월 첫 휴일은 3만 인파. 5년 뒤 1970년 8월 첫 휴일엔 7만 명이 쏟아졌습니다. 백사장은 콩나물 시루처럼 들어찬 수영복 차림의 남녀들로 찬란한 꽃밭을 이뤘습니다. 대구역에선 포항행 임시 피서 열차가, 시외버스는 시간도 없이 손님만 차면 포항으로 떠나는 릴레이식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여름 방학때면 포항엘 다녀온 게 큰 자랑거리. 친구들은 팔뚝에 시퍼렇게 찍힌 해수욕 입장 스탬프 도장을 내밀며 으스댔습니다. 맨날 동네 하천에서 개구리 헤엄으로 여름을 나던 친구들은 훈장 같은 도장에 그만 풀이 죽었습니다.
이랬던 송도가 1980년대 들어 위기를 맞았습니다. 북쪽엔 포항항이, 남쪽엔 포항제철이 위용을 드러내면서 해변은 더 쪼그라들고, 백사장 모래는 점점 자취를 감췄습니다. 해안 침식을 막자고 돌로 길게 쌓은 돌제(방파제)도 무용지물. 오·폐수 마저 손을 쓸 수 없게 되자 2007년 송도해수욕장은 끝내 문을 닫고 긴 휴면에 빠졌습니다. (매일신문 1957년 7월 29일~1975년 8월 5일 자)
지난 7월 12일, 우여곡절 끝에 송도가 다시 깨어났습니다. 송도해수욕장 되살리기 프로젝트 18년 만. 그간 모래 유실 방지가 신통찮았던 돌제를 걷는 대신 3~400m 떨어진 바닷속에 수중 방파제(잠제)를 놓고, 홀쭉해진 해변에는 25톤 덤프 트럭 6천대 분량의 모래를 쏟아부어 길이 1.7km, 폭 47m 규모의 인공 백사장을 복원했습니다.
기후 위기에 각종 구조물에, 전국 해안이 '침식'이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애써 되살린 송도해수욕장이 포항의 명소로 거듭 나려면 무엇보다 형산강의 도움이 절실해 보입니다. 형산강은 포항의 젖줄이자 천연 모래 공급처. 포항의 '명사십리'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송도해수욕장이 다시 재기에 나선 지금 형산강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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