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계절과 음표들](https://www.imaeil.com/photos/2025/07/29/2025072921570090435_l.jpg)
전체 10분의 1쯤 읽었을 때, 학창 시절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스크자키를 떠올렸다. 늦은 밤을 가르던 차분하면서 깊고 깨끗한 목소리. 책은 꼭 그 느낌이었다. 누구와 흡사했을까. 박원웅도 황인용도 이종환도 아닌 김세원에 가까웠다. 기적 소리에 이어 폴 모리아의 이사도라가 시그널로 흐른 뒤 등장하는 "김세원의 밤의 플랫폼".
'계절과 음표들'은 가톨릭대학교 신학과에서 사제를 양성해온 철학자 최대환 신부가 음악을 경유하여 풀어낸 우리시대의 명상록이다.
책에서 만나는 저자의 음악 취향과 해박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인데, 장르와 시대를 종횡하고 초월한다.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과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묶고, 멜랑콜리를 논하면서 '컨택트'의 음악감독 요한 요한슨의 '앵글라뵈른 변주곡'을 소개하며, 메리 올리버와 월터 휘트먼의 시에 레너드 번스타인과 찰스 아이브스 곡을 꺼내드는 사람이라면 보통의 음악애호가는 넘는다고 봐야 한다. 상처 입기 쉽고 상처 주기 쉬운 인간 존재의 속성에서 "안온한 일상이란, 어쩌면 환멸과 모멸에 깊이 파인 상처 위에 그저 종이 한 장 덮어져 있는 위태로운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스팅의 노래 '깨어지기 쉬운(Fragile)'을 꺼내든 저자는, 겨울밤 피터 비스펠베이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코코 변주곡'을 상상한다. 또 만추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이야기할 땐 70·80년대 감성이 물씬 풍긴다. 낭만과 멜랑콜리 그리고 이토록 우아한 삶의 통찰이라니!
풍성하고 풍요로운 글로 만난 그림과 문학과 음악의 정경이 이렇게 아름답기도 힘들 터인즉, 최대환은 자유와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삶의 리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한다. "자유롭고 건강한 규칙과 질서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절제의 미덕을 높게 평가할 줄 압니다. 욕망과 열정에 휩쓸리거나 혹은 이를 금욕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대상을 찾아가고 좋은 열매를 맺도록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조화로운 삶'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또한, 좋은 삶을 위한 기본 요소로 관조를 언급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대미를 장식하는 '여름 한가운데' 편에서 저자가 삶의 덕목으로 꼽는 건 단순함이다. 이때 소환하는 인물은 하이쿠를 대표하는 바쇼와, 참된 단순함을 영혼의 자유로 정의한 프랑스의 영성학자 페늘롱. 페늘롱은 자신에 대한 과한 성찰과 분석이 오히려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고 "부족함에 대한 지나친 자책과 이룬 일에 대한 과한 자긍심"이 영혼의 자유를 방해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경어체가 주는 글을 적잖게 읽었으나 이 정도로 독특한 체험은 드물었다. 삶과 철학과 음악을 차고 넘치도록 담았음에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힘이 범상치 않다. 책을 덮을 즈음 떠오른 건 그레고리안 성가와 다브라스가 부른 '오베르뉴의 노래'였다. 이를테면 평화로운 평정심에 사로잡힌 순간들. 엄숙하고 진지하고 치열하게 달려온 삶을 위로하는 장엄한 목소리에 이은 맑고 청아한 자연의 소리 그 자체랄까.
삶을 일으키고 가꾸는 것들을 세심하게 탐구해온 천주교 사제와 음악이 만나면 어떤 모습일까? 답이 궁금하다면 '계절과 음표들'에서 찾을 일이다.
영화평론가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가수 영탁, FC바르셀로나 대구경기 시축+축하공연 확정…대구스타디움 뒤흔든다
尹 접견한 신평 "1.7평 독방, 생지옥…정치보복에 美 개입해달라"
李대통령, 8·15 광화문서 '국민 임명식' 진행…尹 부부 제외 전직 대통령들 초대
경찰, 이철우 경북도지사 관사 압수수색…"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한동훈, 당대표 후보 검증 나선 전한길 두고 "진극 감별사"…김문수·장동혁 향해선 "'극우 없다'면서 줄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