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쉽게 지치는 현대인에게…"적당히 잊으세요" 94세 의사의 인생 처방전

[책] 적당히 잊으며 살아간다
후지이 히데코 지음/이미주 번역/쌤앤파커스 펴냄

저자 후지이 히데코. 교보문고 홈페이지
'적당히 잊으며 살아간다' 책 표지

MBTI 열풍이 지나가고 올해 초 MZ세대들이 새롭게 주목한 테스트로 'HSP(초민감자) 테스트'가 있었다. 지나치게 일반화하지 않는 선에서 이러한 테스트는 타인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돼준다. 'Highly Sensitive Person'의 앞글자를 딴 HSP는 2006년 미국의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 박사가 제시한 개념으로, 직역하면 '매우 예민하거나 민감한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작은 소리나 빛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나 타인의 감정도 쉽게 감지해 잘 알아채곤 한다.

요즘은 "예민하다"는 말이 꼭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다. 예민한 기질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줄 아는 섬세한 사람들이 많고, 예술·기획 등 창의적인 분야에선 그러한 민감함이 강점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세심하고 공감능력이 좋다보니 때로는 스스로를 더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자신의 감정을 눌러버리고, 사람들 틈에 오래 있으면 진이 빠지고, 작은 말도 마음에 콕 박히며, 머릿속에서 벌어진 가상의 대화로 한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HSP 혹은 내향적 인간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자기 마음을 돌보느라 분주하다. 너무 많이 기억하고,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담아 두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끼고 보살펴주세요"

일본 교토의 어느 심료(心療)내과 의원에서는 환자를 배웅하며 꼭 이런 인사말을 건넨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환자는 문을 나서면서 곰곰이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나를 잘 돌보고 있는가?'

생성형 AI로 그려진 사진
저자 후지이 히데코. 교보문고 홈페이지

올해 94세, 이곳 후지이 의원에서 여전히 주6일을 진료하는 원장 의사 후지이 히데코는 몸과 마음이 지친 환자들에게 이 인사말을 오래도록 건네왔다. 그는 그간 봐온 수많은 환자들을 통해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너무 오랫동안 애써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신간 '적당히 잊으며 살아간다'에서 히데코 씨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자신만의 해결책을 꺼내놓는다. 바로 '적당히 잊어버리기'.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마음을 현재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싫은 일이나 과도한 기대, 과거의 영광도 적당히 흘려보낼줄 알아야 한다.

책은 4장으로 구성돼 과거와 인간관계는 '잊어야 할 것', 나 자신과 작은 도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 나눠 총 71가지의 인생 처방전을 독자들과 나눈다. 따뜻하게 등을 토닥이는 위로부터, 이제는 어른으로서 삶을 책임져야한다는 단호한 조언까지. 한방 심료내과 의사로서 잘 먹고 잘 움직이는 법에 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뇌와 마음 건강에 좋은 음식을 추천하고, 나이 들며 병 하나쯤 있는 편이 건강을 더 잘 챙기게 한다며 '유병장수'를 권하는 식이다.

저자는 일곱 아이를 키운 워킹맘으로서의 삶도 살아냈다. 다섯 번째 아이의 출산을 계기로 한동안은 의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면서 대학에서 영양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는 등 배움은 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책에는 번잡스러운 삶 속에서 덜어낼 것을 명료하게 구분해내는 인생의 균형감각이 있다. 읽는 이는 저마다 무엇을 놓아주고 무엇을 새로이 다짐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고민해보게 한다.

책장을 덮으며 본 적은 없지만 명랑하고 씩씩한 할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은 듯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금 나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잊어야 할 것을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적당한 지점에서 가뿐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마음속의 오래된 짐 하나쯤은 내려놔도 괜찮다. 잊어야 할 일은 잊자. 그날그날 소중한 것들만 마음에 담아두자. 덥고 습한 여름날, 산뜻하고 보송보송한 날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244쪽, 1만8천원.

생성형 AI로 그려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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