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송승환 씨가 책을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보문고에서 책을 샀다. 표지는 강렬했고 그의 인생은 동화책처럼 담겨있었다. 그는 기획자, 제작자로 성공했어도 연극과 드라마에서 배우로 살아갈 때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평창 동계올림픽도 총 예술감독으로서 성공시킨 그에게 어떤 직함으로 불리길 원하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당연히 배우죠."라고 말했다. 송승환은 여전히 호기심이 많아 보였고,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대학로 홍익대 아트센터 11층 PMC 사무실로 들어서자, 그는 눈을 스마트폰에 가까이 대고 보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 오면 스마트폰 화면은 응급구조 구급차 사이렌처럼 빤짝거렸다.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은 그는 30cm 정도의 거리에서도 상대방의 옷 색깔과 형체만 보인다고 했다. 배우 송승환은 일곱 살에 라디오 <은방울과 차돌이>로 데뷔했다. 올해 60년 차가 된 배우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도였다. 울산에서 개최된 제18회 전국연극제 때문이었다. 당시 고인이 된 배우 염동헌 군과, <둥개 둥개 이야기 둥개>를 연출한 조승암 씨가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배우 송승환과 방은진 씨를 젊은연극제 MC로 모셔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2G폰을 쓰던 시절 그와 통화를 했고 송승환은 "연극인 행사인데, 제가 가야죠"라고 답했다. 당시 방은진 씨도 영화감독과 배우로서 이름이 나던 시절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연극인들의 축제를 고향처럼 생각했다. 송승환 배우와 김포공항 로비에서 만나 울산연극제에 함께 다녀왔고, 그 후'김건표의 스타토크'를 통해 뮤지컬 <대장금> 제작자로서 인터뷰를 했다. 20년의 시간이 지났고, 그는 <난타>와 뮤지컬 제작자로 성공한 배우가 됐다. 올해 『나는 배우다, 송승환』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살아온 인생을 동화처럼 표현했다. <난타>는 2024년 누적 관객 1천6백만 명을 넘어섰다. 대한민국 국민 세 명 중 한 명이 <난타>를 본 셈이다. 80년대 청춘스타였던 송승환은 최고 전성기를 누릴 무렵, 뉴욕으로 떠났다. 4년 동안 길거리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뉴욕 한복판에서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것을 향한 세상 공부를 계속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봤어도 그는 청춘스타 송승환을 잊을 수 있었던 뉴욕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PMC 송승환 대표의 사무실 책장은 책으로 덥혀 있었다. 한편에는 그가 청춘스타 시절에 받은 배우, MC 부문의 다양한 트로피부터 제작, 기획자, 총 예술감독으로서 받은 상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의 흔적들을 트로피가 말해주고 있었다. "창작 뮤지컬 <대장금>을 만드신 지 20여 년이 흘렀군요. '김건표의 스타토크' 인터뷰를 2007년도에 했으니까요."
"<대장금> 이후에도 계속 창작뮤지컬을 만들었죠. 2003년도 브로드웨이 공연을 필두로 2000년대에는 계속 해외 투어를 다녔어요. 그간 연극과 뮤지컬을 합쳐서 60편 정도를 만들었습니다. 뮤지컬 <고래사냥>을 끝내고 나서 워낙 작품 규모가 커지다 보니 개인사업자로 활동하기보단 체계적인 투자와 운영이 필요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1996년 11월에 PMC프러덕션을 만들었어요. 아마 극단을 주식회사로 만든 건 제가 처음일 거예요."
▶자서전『나는 배우다, 송승환』에 나온 인생이 동화처럼 읽혔습니다. 배우 송승환의 삶이 도전적인 드라마처럼 느껴지더군요.
"작년에 제가 파주 출판 단지에서 '2024 파주페어_북앤컬처'라는 축제를 만들었어요. 그 축제를 시작하면서 출판사 분들을 많이 알게 됐고, 그중 한 회사가 책을 내자고 제안해 주셨어요.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로 그런 제의를 많이 받았지만, 시력도 안 좋아졌고 해서 거절해 왔어요. 그런데 이번엔 글은 적고 그림이 많은 책을 내자고 하셔서 수락하게 됐어요. 구구절절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보단 제 인생의 몇몇 장면들을 임팩트 있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과거에 힘들고 어두웠던 일도 세월이 지나니 밝은색으로 채색되더라고요. 글은 제가 썼고 그림은 나소연이라는 작가가 그렸습니다. 사실 작년 가을부터 출간을 준비했는데, 마침 2025년이 제 데뷔 60주년이라 이왕이면 올해에 맞춰서 책을 내게 된 거예요. 저는 별로 출판기념회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어요. 대신에 작품 할 때 찍은 사진 150장을 추려서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배우 송승환의 시선은 정확하게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눈빛의 초점이 흐릿한 것 같다는 느낌 외에는 달라진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사진전 얘기를 꺼냈다.
"하루에 200명 정도씩, 열흘 동안 거의 2천 명 정도가 오셨어요. 그중 절반은 제 지인들이었던 것 같고, 나머지는 오랜 팬분들과 제 유튜브 구독자분들이셨어요.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라는 유튜브를 운영 중인데, 역시 요즘은 SNS의 위력이 있더라고요. 지방이나 외국에서 오신 분들도 많았어요."
▶'나는 배우다, 송승환' 책을 읽어보니 여덟 살, 그러니까 1965년도에 아역배우를 시작하셨어요. 이후 청춘스타가 되셨고, 아버님의 사업 실패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쓰셨지요. 뉴욕에 다녀오신 후 PMC프러덕션을 설립하셨고요. 뮤지컬 <난타> 제작자·교수 등 방송작가를 빼놓곤 안 해보신 일이 없네요. 뉴욕에 계실 때 거리에서 좌판을 깔고 물건 파시는 장면을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본 적이 있어요. 저한테는 그게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책에는 "이 시절 청춘스타 송승환은 잊어야 했다."라고 고백하셨더군요.
"미국에서는 날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당시 많은 유학생이 벼룩시장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종종 했으니까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뮤지컬 <명성황후>를 연출한 윤호진 선배도 당시 프리마켓에서 같이 장사를 했어요. 맨손으로 미국에 갔기 때문에 3년 반 정도 있으면서 뭐라도 해서 벌어야 했죠. 그래도 서울에서 워낙 바쁘게 살다가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니 정말 많은 공연을 볼 수 있었어요. 그게 많은 공부가 됐고요. 당시엔 서울과 뉴욕의 문화 인프라 차이가 매우 컸어요. 1980년대 서울에서는 뮤지컬을 보기도 힘들었으니까요. 뉴욕에서 <캣츠>, <오페라의 유령>, 피터 슈만이 이끌던 '빵과 인형 극장'(Bread and Puppet Theater)의 공연 등 수많은 뮤지컬과 연극들을 보는 게 얼마나 신나고 재밌던지. 경제적인 어려움은 크게 와닿지 않았어요. '빵과 인형 극장' 공연들에도 말이 거의 안 나오거든요. 그리고 당시 뉴욕에서는 전통적인 극장 개념이 사라지고 리빙 시어터(Living Theatre) 등이 창고나 차고, 길거리에서 연극을 많이 했어요. 그런 걸 본 경험들이 나중에 제가 <난타>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됐습니다."
▶배우 송승환은 도전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 한 컵을 마시고는 물었다. "동화 같은 일러스트로 표현된 송승환의 인생은 배우보단 기획자로서의 감각이 더 많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들이 보면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로서는 그저 체질적으로 새로운 일을 하는 게 재미있기 때문에 시작을 하는 거예요. 배우라는 직업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캐스팅이 되어야 일을 할 수 있는, 일이 들어온다고 해도 하고 싶은 작품이 아닐 때도 있고요. 그런데 기획이나 제작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능동적으로 할 수 있어요. 그런 점 때문에 배우를 병행하며 기획과 제작에도 관심을 갖게 된 거죠."

▶60년 연기 인생 스승은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제가 유치원 다닐 때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재미있게 이야기해야 할지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어요. 그런 면에서 어머니가 제 첫 스승이라고 할 수 있죠. 이후에 많은 선배들께 배웠고, 또 김수현 작가님의 좋은 대본을 통해서도 연기에 대해 많이 공부할 수 있었어요."
▶KBS 별관 공개홀에서 그가 진행하던 '젊음의 행진' 생방송 현장을 본 적이 있다, 그날 한국 역대 방송사고로 기록된 배철수 감전 사고를 직접 목격했다. MC였던 송승환은 떨리는 목소리로 "생방송 도중에 감전 사고가 났다."라며 사태를 수습했다. 당시의 상황을 얘기하자 "그걸 보셨군요."라는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MC뿐만 아니라 DJ·배우·기획자·교수·예술감독 등 다양한 직함을 거치셨는데. 송승환스러운 직업을 꼽는다면.
"배우죠. 기획이나 제작은 자본에서부터 인력 관리나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연기에 비해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요. 어찌 보면 배우는 내 역할만 열심히 하면 되잖아요. 또 연기를 할 때 가장 순수해지는 것 같아요. 집중력도 제일 많이 생기고, 내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난타>를 서너 번은 봤는데 볼 때마다 느낌이 달랐습니다. 전용 극장을 만든 결심에 대해서는 놀라웠습니다. 처음엔 동호회 친구들을 대상으로 홍보를 하셨고, 이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았지요. 2024년 12월 말에 <난타> 누적 관객 수가 1,550만 명을 돌파했고, 현재 2천만 명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당시에 그렇게 대박이 날 거라고 예상하셨어요? 볼 사람은 이미 다 봤다고 주변에서 전용 극장 만드는 걸 반대했다던데.
"지금 명동, 홍대, 제주도에 난타 전용 극장이 있어요. 해외에 있던 전용 극장은 코로나19 때문에 다 문을 닫았고요. <난타>는 저에게 아주 중요한 작품이에요. 1997년 10월 호암아트홀에서 초연을 시작해 올해로 28년째 거의 매일 쉬지 않고 공연을 하고 있어요. 제가 60여 편의 연극과 뮤지컬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난타>에서 생기는 수익 덕분이죠.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확신이 들었던 건 아니에요. 한국에서 길게 공연해 봐야 한두 달이지, 1년 내내 한 작품을 공연하는 게 과연 가능하겠냐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초연을 전훈 연출가가 맡았는데, 전 그걸 보고 '이거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1999년 8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이 논버벌 작품인 <난타>를 좋아하는 걸 보면서도 확신이 들기 시작했어요. 2001년에는 미국 60개 도시 투어를 목표로 보스턴에서 공연을 시작했는데, 2~3일 후에 9.11 테러가 터져서 투어가 중단됐죠. 그런데 2003년 브로드웨이에 가게 되면서 뉴 빅토리 극장 예술감독을 만났는데, 그분이 에든버러에서 <난타>를 봤었다고 하더라고요. 뉴 빅토리 극장에서도 <난타>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시즌 오프작으로 한 달 정도 공연을 하고, 이후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인 미네타 레인 시어터에서 1년 6개월 동안 공연을 했어요."
▶관객들이 여전히 많이 오는군요.
"지금 <난타> 관객 80~90%가 외국인 관광객이거든요. 그들이 한국말로 하는 공연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결국은 한국에 와서 볼 수 있는 공연이 <난타>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는 <에쿠우스>, <봄밥>, <더 드레서>, <웃음의 대학>까지 60여 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1990년대 작품 중에서는 <사의 찬미>, <신장한몽>도 있지만, 문화예술회관 대극장(현 아르코 대극장)에서 공연된 최현묵 작가의 <상화(想華)와 상화(尙火)>가 기억에 남아있다. "시각장애 판정을 받으시고도 연극 무대에 서는 이유는.
"방송이나 영화 연기는 사실 감독의 예술인 경우가 많죠. 한 컷 한 컷 찍어서 편집을 해야 완성되잖아요. 연극이야말로 정말 배우의 예술이죠. 무대 위에 올라가서 러닝타임 동안 계속 몰입하고 쭉 캐릭터를 가져가는 경험, 그런 요소들이 정말 배우로서 매력적으로 다가오거든요."

▶공연한 연극 작품 중에 다시 하고 싶으신 작품도 있지요.
"저를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적으로 알린 작품은 <에쿠우스>(1981)였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피터 셰퍼의 <아마데우스>도 있고요. 그런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이에요. 20대였던 당시에 톰이라는 인물이 저와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꿈도 많고 해외로 뻗어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하니 현실에 안주해야 하는 답답함. 이런 게 톰의 심정이었는데 공감이 되더라고요."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으셨던데, 무대에서 불편함도 많겠습니다.
"30cm를 넘어가면 안 보이니까 불편한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연극은 한두 달의 리허설 기간이 있잖아요. 반복해서 연습하는 동안 어디에 소품이 있고 어디에 상대 배우가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다 기억할 수 있어요. 상대 배우가 연기하는 걸 동영상으로 찍어 놓고 집에 가서 그걸 확대해서 봐요. 그때 어떤 리액션을 하는지 확인하고, 제 연기 계획도 짤 수가 있죠. 그 과정도 재미있어요. 암전일 땐 동료 배우가 저를 무대로 데리고 나가요. 등장할 땐 크루들이 무대 앞에까지 데려다주고요."
▶그는 타고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체 연기에 익숙한 배우가 극장에 들어오면 소리 전달 문제나 생활 연기가 문제가 될 때가 있는데, 배우 송승환의 연기는 방송, 연극, 영화 등 각 장르마다 최적화되어 보였다. "선생님 목소리가 미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극장에서 소리는 명확하더군요, 특별히 하시는 연습은.
"타고난 것도 있을 테고요. 우리 땐 뒷자리에 앉은 관객한테도 말이 들려야 한다고 연출가한테 지적을 받으면서 연습을 해왔어요. 요즘엔 와이어리스 마이크가 있어서, 필요하면 그걸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유리동물원>의 톰을 맡아 공연한 적이 있어요. "로라, 촛불을 꺼요."라는 대사를 말해야 하는데, 뒤쪽에 앉은 관객에게까지 말을 전달하려면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 대사는 읊조리듯 말해야 하거든요. 그럴 땐 마이크를 활용해야죠."
▶연극 <학마을 사람들>(이진순 원작)에 출연해, 1968년도에 아역 최초로 동아연극상 특별상을 받으셨을 때가 11살이었지요?
"당시에 TV 어린이 연속극에서 주인공을 하고 있었는데, 선배 연기자분이 저를 이진순 작가님께 데리고 가서 대본을 읽어보라고 시키셨어요. 그걸 읽었더니 작가님이 연극에 복남이 역할로 출연하겠냐고 제안해 주셔서 하게 된 거예요. 동아연극상에 아역상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특별상을 받게 된 거죠. 아무래도 이 상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다음엔 2012년 <난타>로 받은 대중문화예술상 보관 문화훈장이 되겠고요.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으로 2019년에 받은 체육훈장 맹호장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송승환의 연기 메소드에서는 어떤 것이 중요합니까?
"저는 연기를 세 단계 과정으로 봐요. 생각하고, 느끼고, 연기하는 거죠. 먼저 인물과 작품 전체에 대해 분석하면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다음엔 연습하면서 캐릭터의 정서를 느끼는 거예요. 내가 아닌, 캐릭터의 느낌과 정서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배우라는 직업은 내가 아닌 역할이 되는 게 기본이잖아요. 햄릿처럼, 때로는 로미오처럼 관객에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되는 그 과정을 마음껏 즐길 줄 알아야 해요. 내가 재밌어야 최선을 다할 수 있거든요."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도 성공적으로 치러졌어요. 뉴스로 총감독 내정 발표를 듣고 놀랐습니다.
"전 연극만 한 사람이 아니고 뮤지컬·방송·DJ·MC·기획 등 다양한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그걸 다 쏟아부어서 하나로 녹여낼 수 있는 게 올림픽 행사라고 생각했어요. 저보다 훌륭한 배우나 연출가는 많지만, 저처럼 그렇게 여러 경험을 해본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올림픽 행사에선 TV 중계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개막식 일주일을 앞두곤 35대 중계 카메라로 매일 밤 리허설을 녹화해서 아침마다 그걸 보며 앵글을 다 수정했어요. 연극 연출만 했던 분들이라면 하기 힘든 작업이었을 거예요. 또 무대에 서 본 배우로서, 연출가나 제작자로서 스타디움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아니까, 총감독으로서 실패하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60년 동안 60여 편의 연극과 뮤지컬, 20여 편의 영화, 70여 편의 드라마를 하셨던데, 힘들었던 작품도 있었겠지요.
"<난타> 해외 진출할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어떤 이들은 <난타> 만들고 바로 에든버러 가고 브로드웨이에 간 줄 알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의 문화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해외에 진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몇 년간 공을 들이고 고생해서 이룬 성과죠. 그만큼 보람도 있었고요."
▶대학로 토종 창작 뮤지컬인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 6개 부문을 석권했지요. 한국 창작 뮤지컬의 토양을 만든 게 배우 송승환인데, 많은 한국 창작 뮤지컬이 앞으로 세계 진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요?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국 공연이지만 미국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는 소재나 줄거리에, 글로벌한 보편성을 담고 있어요. 해외 진출에 있어서 글로벌한 보편성이 정말 중요해요. 해답은 <어쩌면 해피엔딩>이 보여준 것과 같은 라이센스 수출이에요. 창작은 우리가 하지만 해외에서 공연할 땐 현지 배우와 현지 언어를 쓰는 거죠. 그런 식으로 수출을 타진하다 보면, 이미 만들어 놓은 것 중에서도 해외로 갈 수 있는 작품들이 있을 거예요. 과거 10년 동안 젊은 프로듀서들이 대학로에서 많은 시도를 했고, 인프라가 어느 정도 숙성돼 가고 있어요. 앞으로 10년이 더 흐르면 또 인프라가 쌓이겠죠. 아직까진 좋은 대본과 음악이 풍족하다고 할 순 없지만, 미래에는 한국 창작뮤지컬의 해외 진출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가 뮤지컬 <대장금>을 제작할 당시만 해도 대중들의 선호도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었다. <대장금>의 무대는 입체적이였고, 스펙타클했다. 당시 창작 뮤지컬에 막대한 제작 투자를 한 작품치고는 관객반응이 좋았지만, 투자 대비 유료 관객 수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창작 뮤지컬은 리스크가 큰데, 꾸준히 창작 뮤지컬을 제작해 온 이유가 있다면.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사명감보다는 제가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전 라이센스 뮤지컬을 한두 편밖에 안 해봤는데, 남들이 작곡·작사·디자인까지 만들어 놓은 걸 고대로 갖다가 배우만 바꿔서 하는 건 재미가 없더라고요. 백지상태에서 우리 상상력을 가지고 대본도 쓰고 음악도 만들고 하는 걸 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구시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로 뮤지컬 시장을 확장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보시나요? 대구 지역 뮤지컬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 조언을 해주신다면.
"대구시야말로 창작뮤지컬을 만들어내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 같아요. 20년 동안 딤프를 통해 세계 시장에 알려진 한국 창작뮤지컬을 못 만들어낸 거잖아요. 앞으로는 그런 킬러 콘텐츠를 길러내기 위해 집중해야 하고, 그러려면 창작뮤지컬을 지원하는 페스티벌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구시에서 뮤지컬 전용 극장을 만든다, 뮤지컬 전문 인력을 육성하는 아카데미를 만든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창작뮤지컬을 육성하고 지원하기 위해서는 전용 극장과 아카데미가 모두 필요해요. 그런데 창작뮤지컬을 만든다는 확실한 목표 설정이 먼저 앞서야겠죠. 창작뮤지컬 작품을 키워내는 데엔 시간이 걸리거든요. 관객을 끌어들이기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몇 년 앞을 내다보면서 투자해야 하는데, 해마다 어떤 해외 뮤지컬 라이센스를 갖고 와서 관객들을 즐겁게 할까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 창작뮤지컬은 영원히 못 만드는 거죠. 딤프 초기부터 목표 설정을 잘했다면 지금쯤 킬러콘텐츠가 몇 개는 나왔을 거예요.
▶인터뷰를 하면서, 청춘스타였던 배우 송승환이 좋아하는 배우는 누군지 궁금했다.
"한국 배우 중에서는 박근형 선배님을 좋아해요. 연기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거든요. 옛날 '여명의 눈동자'나 이상의 '날개'라는 단막극에서 연기하신 걸 보면 정말 그 캐릭터를 절묘하게 잘 표현하셨어요. 외국 배우 중에서는 어릴 때부터 제임스 딘이나 말론 브란도를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은 잘 안 바뀌더라고요."
▶배우 송승환은 대중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내가 좋아하는 일, 재미있어하는 일을 하고 사는 게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가닿았으면 해요. 물론 좋아하는 일만 평생 하면서 살기는 쉽지 않죠. 그렇다고 또 불가능한 일도 아니거든요.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빨리 성공하려고 하니까 잘 안되는 거죠. 제가 처음 뮤지컬을 제작한 게, 1978년 76소극장에서 올린 <루브>라는 작품이었어요. <난타>를 흥행시킨 게 1997년도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로 성공을 맛보기까지 거의 2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2~3년 안에 뭔가를 이루려고 하면 못하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최선을 다할 수 있고,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젊은이들이 느끼면 좋겠어요. 좋은 노역을 만나서 연기하다가 죽으면 그걸로 땡입니다."
인생을 때로는 드라마처럼, 동화처럼 살아온 배우 송승환은 30센티미터만 식별할 수 있는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으로 시각장애를 앓고 있음에도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배우였고,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제작자이자 기획자였다.

김건표 대경대학교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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