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라를 건설한 광개토태왕의 국가발전 정책과 전략은 어떤 것일까?
몇 일 전. 잊혀진 역사인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에 있었다.
1994년부터 매 년, 어떤 해에는 몇 번씩 고구려를 찾았는데 요 몇 년은 국제정세로 인하여 만주를 갈 수 없었다. 요동벌의 산성을 거쳐 수도인 국내성으로 들어갔다. 광개토태왕비와 오랜 만의 해후였다. 벅차오르는 가슴과 함께 애잔함, 때로는 복받치는 감정 속에 분노가 치민다.
21세기 한국사회는 위기에 직면해있다. 세계질서는 새로운 형식으로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중이라서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더구나 그 진앙지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가세하는 동아시아 일대이다. 거기다가 북한은 세계에 핵보유국가임을 선언하고, 우리에게는 '적대적 2국가론'을 선포했다. 하지만 체제의 불안정성 때문에 중국은 북한 붕괴시나리오까지 만들어놓은 상태이다.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위기로 빠져들고, 사회갈등은 공동체의 붕괴 조짐마저 보이는 상태이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동부여에서 적응할 수 없는 추모가 소수 집단을 거느리고 도망쳐 홀본부여에서 토착세력들과 연합해서 힘겹게 시작한 나라이다. 물론 고조선의 영토와 역사, 부여의 문화를 토대로 빠른 시간에 성장을 하고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수도가 적에게 몇 번씩 함락당하고, 임금이 전사하는 등 국가적인 위기를 여러번 겪었다. 그러다가 391년 광개토태왕이라는 18세의 청년 임금이 등장하면서 단숨에 강국으로 발돋움 했다. 이어 아들인 장수왕은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5세기 중에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고구려는 어떤 나라인가? 광개토태왕의 성공적인 정책들은 어떤 교훈을 줄수 있을까?
광개토태왕은 12살에 태자가 되었고, 392년에 18세의 나이로 등극하여 22년간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넓혔다. 자의식이 강했고, 군사전략에 탁월했으며, 짧은 시간에 고구려를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문화가 발달한 나라로 만들었다. 때문에 역사로부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好太王) 등의 위대한 칭호를 받았다. 다만 <삼국사기>만이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왕으로 격하시켰다. 우리는 '광개토(廣開土)'라는 시호와 광대한 영토 때문에 그를 군사작전에 능한 임금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추구한 것은 논밭 같은 토지나 넓은 땅이 아니라 광범위한 영향력과 다양한 것들의 통일체로서 큰 나라였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태왕이 원대한 꿈과 목표를 실현시킨 고구려 발전정책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정치외교의 중핵(core), 즉 복잡한 동아시아 세계에서 국가들 간의 균형과 조정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하는 일이었다. 태왕은 국제질서가 다른 상태로 급변해 가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국가발전에 선제적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우선 엄청난 규모의 정복작전과 영토확장 정책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고대사회는 정치, 특히 군사활동이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고, 모든 분야에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릉비문은 그가 즉위 년부터 전사할 때까지 64성과 1400촌락을 공파했다고 기록했다. 나는 그의 전생애를 분석한 후에 그 또는 그 시대 사람들이 '큰 그림(grand degion)'을 그려놓고, 단계적으로 목표를 향해 추진했다고 판단했다.
◆광개토태왕의 북방정책
북방은 요하를 경계로 한 지역, 동몽골 일대, 북만주 일대의 초원과 연해주 일대의 삼림문화 지대를 포괄적으로 포함한다. 종족으로는 부여, 한족 외에 흉노계, 말갈 선비 거란 등을 대상으로 삼았다. 친정군은 북서쪽으로 요동을 넘어서 요서와 동몽골 지역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강 상류 유역까지 원정했다. 적봉 지역 등은 5천500년 전 부터 홍산문화가 발달한 곳이며, 기원 후에는 거란, 선비족 등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고구려는 이 원정의 성공으로 요동지역을 안정적으로 경영하고, 화북에 자리잡은 중국세력들을 군사적으로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중국 지역은 남쪽으로 도망간 동진과 유목종족들이 지배하는 '5호 16국시대'로서 대분열 시대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국가들 간의 분열을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서북 방면인 몽골지역에 거주하는 유목 세력들과 연계할 가능성까지 열어놓았다. 따라서 고구려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서 양 세력을 견제 또는 협공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굳혔다. 태왕은 402년에는 또 요하를 건너서 조양 지역의 연나라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고 점령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만리장성의 종점인 산해관을 거쳐 북경 지역까지 공격할 수 있다. 이어 408년에 후연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왕인 모용운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어 화친을 맺었다. 그는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성이 고씨였다.
요동지역은 경제 전략지구로서 가치가 높은 곳이었다. 사방에서 물자들이 몰려들고 공급될 수밖에 없는 물류거점일 뿐 아니라 생산지였다. 기장, 콩, 조 등 곡식 농사에 적합했고, 넓은 해안가와 섬들에서는 어업이 활발했으며, 소금 생산도 풍부했다. 또한 석재나 철․동․아연 등 지하자원이 풍부했다.
고구려의 안시성이나 요동성, 건안성 지역은 뛰어난 철생산지였다. 대련 위쪽인 금주의 비사성(대흑산 산성)은 고구려의 전방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성이면서 물류망의 거점역할을 겸했다. 지금도 장산군도의 장해와 광록도에는 광개토태왕이 404년에 쌓은 고려성들이 남아 있다('고구려 산성과 해성연구').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요동만, 서한만, 대동강 하구, 경기만을 잇는 황해 동안의 연근해항로를 확보하고, 서해를 안정된 '내해'(inland sea)로 삼아 영역권화 할 수 있었다. 또한 북쪽으로는 내륙의 유목을 주로 하는 북방경제권과 남쪽으로는 황해북부와 요동만, 발해만을 이용하는 해양물류망을 유기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태왕은 옛 북부여 영토의 주변 지역도 완전히 편입시켰다. 원향을 수복하여 부여정통성을 강화시킨다는 측면도 있지만,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명마 등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했다. 광개토태왕은 말을 산동 지역의 남연에게 수출했고, 장수왕은 800여 필의 말을 439년에 송나라에 보냈다. 또한 모피 생산과 수출이 활발해졌는데, 담비가죽(貂皮) 등은 고가의 무역품이었다. 이어 즉위 20년 째인 411년에 친정군을 이끌고 동부여를 완전하게 복속시켜 두만강 하류 유역과 연해주 남부 일대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태왕은 이렇게 지정학적, 지경학적, 지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만주를 장기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공격하였고, 명멸하는 북방 국가들을 대상으로 화전양면 정책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그리고 북방, 중국, 그리고 동방이라는 동아시아의 '삼핵'(三核) 또는 '삼극'(三極) 체제의 한 부분을 확실하게 차지하였다.
◆광개토태왕의 남방정책
태왕은 남쪽을 향해서도 외교활동과 군사작전을 빈번하게 전개하였다. 살제로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남방정책에 관한 기록이 오히려 더 많다.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에 들어와 적대관계로 변모했고, 한 때는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는 등 공세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태왕은 즉위하자 마자 7월에 4만의 병력으로 예성강일대와 개경 주변의 석현(石峴) 등 10현을 점령하였다. 10월에는 백제의 최전방기지이고, 해군함대의 주력이 있었을 강화도 북부의 관미성을 20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함락시켰다. 계속해서 백제를 공격하는 한편 국경지역에 성들을 쌓아 방어를 철저히 했다. 이 전투들은 일종의 복수전이며, 영토를 재탈환하는 전쟁의 성격도 있었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고도의 계산된 정치나 경제행위였다.
동아시아 세계가 대분열인 상황 속에서 고구려가 중국세력들과 경쟁하고 유목종족들의 위협을 제거하려면 남부전선의 안정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국제외교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면 '외교통로의 장악과 관리'는 절대적인 필요성이었다. 그렇다면 백제와는 동맹관계를 유지하거나, 무력으로 점령하여 배후를 안정시켜야 했다. 또한 백제, 신라, 가야, 왜 등이 중국 지역과 교섭하는 해상로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의 방해나 간섭이 없이 어느 나라와도 교류할 수 있었고, 육로망과 해로망을 연결하는 교통의 접점을 장악할 수 있는 탁월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태왕은 북방의 육지영토 뿐만 아니라 남방으로도 진출해야 했고, 해양영토를 확대하는 정책을 실현해야 했다.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경기만을 장악하는 일이다. 한반도와 함께 환황해권의 역학관계가 결정되는 거점핵이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부터 중국지역 남만주지역, 한반도지역, 일본열도를 이어주는 황해연근해항로와 한반도 중부와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황해중부횡단항로와 만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였다. 또한 한반도 중부지역의 모든 정치세력을 통합하고, 강과 바다로 이어지는 물류시스템을 일원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전략적으로도 요충지였다.
또한 백제, 신라, 왜가 북부중국과 교섭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해역이었다. 때문에 고대에는 경기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국제적인 상황과 한반도의 판세가 결정되었다. 태왕은 즉위 즉시 경기만의 주변지역을 공격해 성공을 거두웠다. 6년째 되던 396년에는 보․기병을 활용하여 수륙양면작전을 펼쳐 백제의 항복을 받고,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58성 700여 촌을 탈취하였다. 이로서 서해 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대중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태왕은 이어 신라를 지배하에 두는 정책을 추진했다. 1차적으로는 백제를 배후에서 압박하고, 동해로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또한 백제와 가야의 공격을 막고, 왜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면 고구려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태왕은 신라의 실성을 인질로 삼았고, 후에 귀국시켜 왕이 되게 해 불평등외교를 강요했다. 399년에 신라왕이 구원을 요청한 것을 빌미로 400년에는 보병·기병 5만명을 신라 영토로 진격시켰다. 백제의 위협을 원천적으로 붕괴시켰다. 이어 백제·왜와의 관계를 빌미로 임나가라(경남 고령 일대) 등을 공격하고 남해안을 공격했다. 김해는 낙동강 하구이면서 항구도시이다. 그렇다면 남해에서 해양활동을 하고 일본열도의 왜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여려 사요와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고구려군이 일본열도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크다.('고구려 해양사연구')
이렇게 해서 한민족 내부에서는 고구려-신라 대 백제-왜-가야라는 묘한 '축'(軸)이 형성됐고, 이 질서는 동아시아의 복잡한 국제질서와 얽혀갔다. 결론적으로 태왕은 장기적인 관점과 국제관계라는 '큰 게임'(great game) 틀에서 동서남북으로 수천리를 이동하면서 광범위한 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중부 이북의 거대한 육지영토를 차지하였으며, 거기에다 황해중부 이북과 동해중부 이북의 해양영토를 확보하였다. 전략적인 거점을 곳곳에 확보하여 질서의 기본축(軸)을 세우고, 단계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거대한 망(net)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명실 공히 해륙(海陸)국가로서 동아시아 질서의 삼각축의 하나이면서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그리고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관계 조정의 역할을 맡는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전과 달리 '다종족적 국가', '다문화국가'로 변신하였고, 광개토태왕은 이 상황에 적합한 또 다른 정책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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