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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언덕-이화섭] 어느 날 술잔을 기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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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섭 사회부 기자
이화섭 사회부 기자

몇 주 전, 서울에서 내려온 한 후배와 동네에 새로 문을 연 돼지갈빗집에서 소주를 함께 마셨다. 이어질 대화는 그때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눈 대화 중 일부다.

"어머니 건강은 어때?"

"다행히 평소처럼 유지하고 계세요. 제가 대학생 때 폐암으로 몇 년 고생하시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예후 살피고 있는데, 이제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건강 회복하셨어요."

"다행이네."

"근데요, 형님, 요즘 어머니 모시고 병원 왔다 갔다 하면서 좀 느낀 건데요, 이대로 가다간 우리 80년대생들은 아마 부모님 세대랑 비슷한 시기에 손잡고 함께 저승으로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젊은 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무슨 근거로?"

"의정 갈등 터지면서 제가 어머니 치료 제때 못 받을까 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요.… 서울 대형 병원이라는 데도 지금 교수들 많이 나갔어요. 대구도 많이 나갔다면서요? 게다가 선배 기사 쓴 거 가끔 보면 필수의료에 사람이 없네 어쩌네 하는데, 우리가 60대 되면 암 걸렸을 때 치료해 줄 사람이 남아 있을까요?"

이때부터 자세를 고쳐 앉아 듣기 시작했다. 실제로 전국 대학병원에서 교수들이 알게 모르게 병원을 떠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 돼 버렸다. 또 의정 갈등을 겪으면서 대한민국 의료가 실제로는 사상누각 상태였음을 느낀 사람도 적지 않다. 올해로 마흔이 된 후배의 걱정이 남 일 같지도, 틀린 말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후배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어떻게 보면 필수의료 패키지니 하는 게, 높으신 분들의 미래세대를 위한 구국의 결단, 뭐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요. 정치하는 인간들이 '평범한 백성들은 오래 살아서 건강보험, 국민연금 축내지 말고 미래세대를 위해 얼른 죽어라', 뭐 그런 거 아닌가 싶어요."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후배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자중하라고 말하기도 전에 후배는 계속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환자 보호자 입장에서 전공의 애들한테 섭섭하다가도 내 처지 보면 그런 말은 또 못 하겠어요. 나 또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나에게 뭐라도 더 돌아오는 쪽으로 선택하게 되는데, 우리보다 더 똑똑한 의사 애들이라고 다르겠어요? 더하면 더했겠지. 의대생 애들도 지들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긴 한데, 그래도 미래의 환자요, 현재 환자의 보호자인 입장에서 섭섭해요. 딴 게 섭섭한 게 아니라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선택에 존중 없이 깔아뭉개는 모습 보고 '우리나라 똑똑한 것들은 저런가' 싶고, 아무리 우리가 몰라도 언젠가는 우리도 자기들 환자가 될 건데, 다가와서 어떻게든 설명해 줬으면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걸 안 해서 그런 거라고. 진짜 우리가 아팠을 때 우리 손 안 잡아줄 것 같아서."

"그러다 울겠다."

"눈물 나죠, 눈물 나. 세상이 다 불행한 사람들 천지가 됐잖아요. 공부 잘해서 돈 잘 버는 의사도 지들 맘대로 못 해서 불행하고, 살고 싶은 환자도 목숨줄 끊어질까 봐 불행하고, 아픈 사람 쳐다보고 있는 보호자도 불행하고…."

그렇게 나와 후배는 술에 취한 건지 슬픔에 취한 건지 모른 채 소주잔을 계속 비워 나갔다. 고개를 들어 보니 고깃집 창가 맞은편으로 한 종합병원 응급실 간판 불빛이 빨갛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로 119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들어가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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