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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문예광장] 손가락 병풍/ 이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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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 작가
'손가락 병풍' 관련 AI 생성 이미지

손자에게 반지를 끼운다. 왕관 모양의 반지에서 어린 왕자가 꽃길을 걸으며 활짝 웃는다. 어느새 손자가 왕관을 쓰고 걷는 착각이 든다.

결혼 오 년 만에 얻은 아들은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지은 약과 지극정성 올린 기도로 태어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얼마나 얻고 싶었던 자식인가. 그런 아들이 결혼 두 해 만에 저를 닮은 아이를 안고 있으니,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육아와 살림살이에 몸과 마음이 묶여 아이를 기를 때는 사랑을 넉넉하게 주지 못했다. 그 시절 아쉬움이 아직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어서일까. 손자의 숨소리는 나비의 날갯짓 소리요, 깜빡이는 눈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다. 실없는 웃음이라도 웃을 때면 가슴속에 저장된 사랑이 죄다 쓸려나간다.

겨우 팔뚝만 한 몸으로 태어나 백일을 맞이했다. 여기저기에서 달려드는 병균에 맞서 건강을 지켜냈으니 대견하고 고맙다. 시간이 손자에게 요술을 거는지, 그날이 그날인 내 모습과 달리 녀석의 하루하루는 변화로 이어진다. 붉던 피부가 하얘지고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는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감정을 실어 보낸다. 바닥만 보던 머리도 혼자서 빳빳하게 세운다.

백일을 앞두고 고민이 밀려왔다. 세월 따라 풍습도 변해 손주에게 반지는 기본이고 팔찌, 목걸이를 걸어준다는 말이 들린다. 그에 더해 금 열쇠를 만들거나 금 바를 선물하기도 한다니 마음이 무겁다. 금값이 경제 불안을 업고 구름 위에 가 앉았다. 아들이 돌이었을 때보다 열 배를 훌쩍 넘겼다.

가만히 생각하던 남편이 장롱을 뒤적여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나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퇴직할 때 받은 기념 반지다. 회사 로고가 선명하게 찍혔다. 약지에 슬쩍 껴보는 얼굴에 먼 과거를 들여다보는 어정쩡한 미소가 어린다. 청춘의 시간 부스러기를 남겨 놓고 그는 반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며칠 후, 변신 한 반지가 내 앞에 놓였다. 로고 대신 별을 안은 어린 왕자가 웃고 있다. 바람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모양이다. 삼 십여 년 전, 아들 돌 반지에 새겨진 것은 수壽였다. 질병으로 생을 짧게 마감하는 아이도 있었으니, 오래 사는 게 부모의 첫 번째 바람이 아니었을까. 신생아 사망의 걱정에서 놓여난 요즘 부모는 아이가 자신의 꿈 찾기를 제일 소망하나 보다.

젊은 시절, 그의 열정과 추억이 담긴 반지가 아닌가. 산업화 시대에 발맞춰 철인으로 살았던 날의 기록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올리며 밤을 낮으로 바꾼 날들, 미명에 출근하며 떠오르는 태양에 수없이 희망을 걸던 날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성실, 인내, 화합으로 이어가던 하루하루가 반지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게다. 손자와 반지로 이어진다는 생각에서인지 남편 얼굴이 환하다.

어릴 적, 겨울에 잠자려고 누워있으면 바닥은 뜨거워도 코끝이 시렸다. 칼바람은 단열이 허술한 문과 벽을 야멸차게 뚫고 들어왔다. 해거름이면 아버지는 방문 앞에 병풍을 펼쳐놓았다. 인정머리 없는 찬 바람이 부성애를 뚫을 수 없었는지, 문과 병풍 사이에서 그저 서성였다.

병풍에는 그림이 그려있었다. 분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해와 구름이 하늘에 떠 있고, 산에는 곳곳에 물이 흘렀다. 소나무와 학, 거북이, 사슴도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십장생도十長生圖인 것 같다.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열 가지 동식물을 보며 무병장수와 복을 기원한다는. 아마도 그림은 아버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시아버님은 여름 초입이면 어김없이 알사탕 같은 나프탈렌을 사 주셨다. 직장 일로 바쁘실 텐데 분가한 자녀들 방충제를 챙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프탈렌을 내 손으로 사 오던 날 불현듯 아버님의 뜻이 가슴속으로 날아들었다. 하얀 방충제는 아들의 삶터가 세상에 좀먹히지 않도록 친 마음의 병풍이었다.

대다수의 사람은 영원성을 동경한다. 금에 열광하는 이유도 변함없는 특성에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선대가 후대를 사랑하는 마음의 병풍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다. 반지의 무늬는 변해도 금은 변하지 않듯 방법은 달라도 자손을 향한 사랑은 세세손손 변함없으리라.

남편은 세상살이에서 손자에게 날아올 돌멩이를 막아주고 싶었나 보다. 미움과 갈등이 달려올 때는 한 걸음 물러서고, 낙심과 슬픔이 밀려올 때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아라. 일거리가 작달비처럼 내려도 튼튼한 우산을 들고 나만의 쉴 공간을 가지며 빗속을 걸어가라. 반지가 손자에게 조용히 이른다.

촉감이 이상한지 손자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럼에도 손가락 병풍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 반지를 보는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린다.

이춘희 작가

◆약력

- 2019 '문장' 등단

- 수필집 '한그루 나무 서른송이 꽃들', '글또바기 두번째이야기' 공저

- 2022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제6회 달구벌수필 작품상, 동서커피문학 상

- 대구 문인협회회원, 문장인문학회, 문장작가회, 달구벌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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