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케냐의 이름 모를 황무지. 중년의 한 원주민 남성이 아내로 보이는 여성의 무릎을 베고 슬픈 표정을 한 채 힘없이 누워 있다. 바로 뒤엔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가 정면을 응시하고 서있다. 첫인상은 몽환적이고 아름답지만, 깊이 들여다볼수록 뭔가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기후 변화로 보금자리를 잃은 난민과 서식지를 잃은 동물의 모습을 함께 담은 사진가 닉 브랜트의 작품이다.
대구 남구 이천동 사진전문갤러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선 지난 2일부터 닉 브랜트의 사진전 '생존의 나날(The Day May Break)'을 열고 있다. 세계 각지를 배경으로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로 인해 삶의 기반을 위협받는 인간과 동물의 초상을 담은 작가의 최근작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다음 달 25일까지 이어진다.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선 4일부터 11월 2일까지 초현실적 사진으로 전 세계 시각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가 로저 발렌의 사진전이 열린다. 앞서 군위 사유원 내 갤러리 곡신에선 지난달 19일부터 12월 21일까지 일정으로 고(故) 김중만 사진가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최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선 '더 글로리어스 월드(The GLORIOUS World)'란 기후환경 사진전이 열렸다. 해외 유명 사진가 4인이 참여한 이 전시는 다음 달부터 국립생태원 에코리움에서 이어진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이 네 개의 전시는 모두 한 사람이 기획했다. 주인공은 석재현(56)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대표다.
석 대표는 오래전부터 인간과 사회를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던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 2003년엔 탈북자 취재를 하다 수감 생활까지 했다. 대학 교수직마저 내려놓고 떠난 중국 취재 길에서 탈북자들을 돕다가 공안에 체포돼 1년여의 옥살이를 한 것이다.
전시 기획자로서 출발은 대구사진비엔날레였다. 2006년 제1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주제전 기획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국내외에서 수십여 건의 전시를 기획했다.
지난달 29일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만난 석재현 대표는 "기획자로서의 일이 점점 늘어나다보니 최근엔 사진가로서의 작업에 거의 손을 대지 못하다시피 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 전시기획에 매진하다보니 개인작업과의 비중이 9대 1도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사진가에서 사진 전시 기획자로 삶이 바뀌었다. 계기가 있었나.
▶2004년 봄 강제추방 형식으로 석방돼 귀국한 뒤 그간의 작업을 돌아보며 마음을 좀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그해 가을쯤 우연한 기회에 김범일 대구시 부시장(훗날 대구시장)과 식사를 함께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김 부시장은 문화 분야에서 대구시가 무엇을 내세워야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놨고, 국제사진축제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김 부시장의 요청으로 6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기획안을 만들게 됐고, 결국 2006년 대구국제사진비엔날레가 열리게 됐다. 당시 행사에서 국내외 3인으로 꾸려진 공동기획자를 맡게 되면서 전시 기획 업무를 처음 접하게 됐다.

-이후 국내외에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해 선보였다. 직접 운영하는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를 제외하더라도 직접 기획한 전시가 수십여 건에 이른다. 대표적인 전시로는 어떤 게 있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누군가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다. 단지 누군가는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동안 국내에선 기존엔 접하지 못했던 다양한 시각의 해외 사진가 작품을 선보이고, 해외에선 한국의 사진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대표적인 해외 전시로는 2014년 튀르키예에서 선보인 'ON KOREA', 2016~2018년 유럽 순회전시로 선보인 'IMAGING KOREA' 등이 있다. 그밖에도 중국 운남성 '대리사진축제'(2011~2017), 튀르키예 'Foto Istanbul'(2015~2017), '싱가포르사진축제'(2016), 아르헨티나 '빛의 축제'(2016) 등에서 한국사진 전시를 기획했다. 개인적으로는 휴스턴 사진비엔날레를 비롯해 해외 다수의 국제사진행사에 강연과 포트폴리오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나.
▶2014 대구사진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전쟁 속의 여성(Women in War)' 전이 의미가 깊다. 전쟁을 여성의 눈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진전이다. 이를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평화의 의미를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기획했다. 전쟁터를 누비던 여성 종군기자의 고발, 현재진행형인 종군위안부 문제 등을 입체적으로 조망했다.
키워드 선택과 작가 섭외 등 여러 분야에서 어려움이 많았기에 기억에 남는다. 사진전이 대중의 관심과 흥미를 일으켜야 하는데, 이번 기획전의 주제는 상당히 무겁고, 참여 작가들의 네임 밸류도 높아서 유치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다만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추진했다.
-최근 전시에선 기후환경 등 메시지가 강한 기획이 자주 보인다.
▶학부 시절부터 제 카메라는 늘 사람을 향해 있었고, 기획자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진가일 때는 단편적으로 제가 마주하는 이들의 삶에 대해 집중했다면, 지금은 작가 개개인의 관심과 애정을 담은 부분들을 모으는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모으는 축이 사람인 것이고, 사람을 둘러싼 기후환경과 같은 사회적 환경인 것이다. 결국 기획에서도 그런 성향이 드러나는 것 같다.

-사진 전시 기획자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사진이 갖는 매체적 힘은 엄청나다. 저의 삶 또한 사진을 통해 많이 변해왔다. 그렇다보니 근본적으로는 사진 매체가 더욱더 건강하게 성장하고 그 역할들을 잘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일을 하고 있다. 사진이 우리 인간에게 끼치는 선한 영향력을 알리고, 나아가 사진이 존중받고 그 행위를 하는 창작자인 사진가들이 존중받도록 중간 역할을 하는 게 기획자인 것 같다. 대구사진비엔날레를 제안한 것도, 2018년 사진전문갤러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를 연 것도, 국내외를 오가며 전시를 열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국내에도 사진 전문기관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한다. 대구에 만들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단지 사진전문 전시장을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지역 작가와 기관이 오랜 세월 축적한 사진 분야 성과와 비엔날레의 경험이 일회성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사진을 연구·교육하고 작가를 지원할 수 있는 지속적인 플랫폼을 구축하자는 의미다.
-2017년 갤러리토마 전시가 마지막 개인전이었다. 작업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기획자로서 삶을 살다보니 해외 출장도 잦고 전시기획과 리뷰, 강연 등으로 늘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아왔다. 시간이 흐르고 일의 규모가 불어나 책임감이 커지면서, 최근 수 년 동안은 사진가로서의 작업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는 늘 마음 한 구석 허전함으로 남았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해외 출장을 가면 늘 카메라를 챙겼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휴대폰으로 자료사진 정도만 찍어오면 되지 하는 마음에 카메라를 놓고 가게 되더라. 올해는 유난히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 7월 3주간의 유럽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휴대하기 편한 카메라를 하나 장만했다. 사진가와 기획자 간 내적 갈등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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