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용병사>(작 박민재, 예술감독 안희철, 연출 이상명, 극단 초이스 시어터)는 대구 남구 대명동 공연 거리에 있는 소극장 공연 예술 보호구역 104석 규모의 아트벙커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대명동 공연 거리는 소극장이 밀집해 있는 연극거리로, 15개 정도의 소극장이 있다. 지자체와 대구문화재단이 소극장 증원 지원사업을 통해'1극단 1소극장'체계로 형성한 곳이다. 정회원 극단이 29개, 준회원 단체가 22개 정도로 공연 활동이 활발하다. 초이스 시어터는 2009년 작품 <1224>로 창단해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극단으로, 실험성이 강한 연극부터 대중적인 창작뮤지컬까지 제작해 왔다. 대구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에서는 초이스 시어터의 작품들이 여러 차례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되었고, <데자뷰>, <오! 미스 리> 등으로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창작뮤지컬 개발에서도 성과를 보여왔다. 특히 2016년 공연 예술 보호구역 아트벙커를 개관한 이후에는 소극장 연극에 집중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와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다룬 연극 <만나지 못한 친구>가 대표작이다. 이번 <무명의 용병사> 이상명 연출은 지난해 대한민국연극제에서〈평화〉로 대상을 받은 연출가로 대구 연극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신진연출가다.

◇적대와 연대 사이 <무명의 용병사〉
이 작품은 1592년 임진왜란 부산포 해전을 모티프로 침몰해 가는 함선 내부에 갇힌 병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무대 공간으로 형상화 된 해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함선과 두 병사의 이야기는 공연 내내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며 짓눌린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무명의 용병사>가 시공간의 배경을 임진왜란 시점으로 되돌린 것은 이 공연이 던지는 메시지가 비핵화와 전쟁 없는 평화, 연대, 공존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전쟁과 사회적 죽음이 반복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상황을 환기한다. <무명의 용병사>의 무대 공간은 부산포 해전을 연상시키며 침몰해 가는 함선 내부를 상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공간 외벽은 갑판을 형상화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병사가 죽음 앞에서 사투를 벌이는 상황을 현재 시간으로 마주하게 한다. 좌측 경사로는 선실로 이어지는 통로로 보이고, 주변에는 어망, 밧줄, 항해와 관련된 이미지들이 드러나며 선박과 바다를 형상화한다.
흰 천 조각은 물결이자 침몰해 가는 배의 잔해로, 배 내부와 바다의 경계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소품으로 사용된다. 이는 바닷속 침잠의 이미지를 부각하며 분위기를 비극적으로 때로는 연극적 환상으로 감각하게 한다. 무대는 함선 내부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결화의 다중 역할과 북∙장구의 리듬, 소리, 인형극 등을 통해 현재(죽음)와 과거(삶)로 변주된다. 극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병사1(김학수 분), 병사2(유이수 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극 중 결화(홍바다 분)는 조선 후기 책 읽어주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전기수(傳奇叟)의 역할을 기반으로 악사, 병사장, 오빠, 장군 등 두 병사 이야기의 서술자로 다중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메타극적 구조'를 형성한다. 전쟁에 남겨진 두 병사, 그리고 이야기꾼이자 인형극, 악사, 해설자로 분하는 결화가 극을 이끄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극적인 생동감과 긴장감도 적절히 유지된다.

◇무명의 병사와 익명의 희생
〈무명의 용병사〉의 시공간은 1592년 부산포 인근의 함선 내부다. 병사들은 국가를 위해 전쟁이라는 비극에 참전했지만, 결국 익명의 병사로 존재할 뿐이다. 이름이 없는 존재, "나는 병사다"라는 대사는 두 인물을 동질화시키며 국적과 이념을 넘어선 '무명의 존재'를 드러낸다. 곧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병사, 익명의 희생자들을 소환한다. 극 중에서는 병사2가 여성이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 전환점이 된다. 그녀는 소리꾼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오라비 대신 전쟁터에 나선 존재로, 전쟁과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성을 은유한다. 병사2의 노래는 억눌린 여성 주체의 목소리이자 저항의 서사로 감각된다. 병사1은 전직 백정이자 일본 출신 항왜로, 조선에 투항했지만 배신자 혹은 이방인으로 낙인찍힌 인물이다.
병사2는 가문과 사회의 억압 속에서 오라비 대신 징집된 여성 소리꾼이다. 두 명의 무명 병사는 전쟁이라는 비극적 공간에서 만나 '적대'와 '연대' 사이에서 갈등한다. 병사2가 적군임이 드러나면서 서로 격렬하게 칼을 겨누지만, 국가는 그들에게 침몰하는 함선을 버리라고 명령한다. 결국 두 병사가 희망하는 것은 전쟁도 승리도 국가도 아닌 인간의 숨결을 느끼고 삶에 위안을 줄 수 있는 연대와 평화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마지막 남은 희망의 잔해는 위로가 된다. 극에서 반복되는 명령은 통제의 언어다. 병사1은 반발하며 "나는 장군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소리친다. 국가와 권력의 명분 뒤에 희생되는 개인의 삶과 존엄을 정면으로 드러내려는 작가의 서술적 의도가 보이는 장면이다. 침몰해 가는 함선에서 나누는 두 병사의 대화는 현시대의 전쟁과 사회 현실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고 사회적 재난을 연상시키며 국가 권력에 의한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와 전쟁을 넘어선 평화의 연대
〈무명의 용병사〉는 역사의 주인공보다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 병사들을 서사적 중심인물로 전면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명의 용병사〉는 국가와 권력, 전쟁과 사회적 참사로부터 지워진 익명의존재들에게 "이름 없는 희생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공연은 국가 폭력, 사회적 참사와 죽음,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며, 국가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아쉬운 점은 침몰해 가는 함선에서 두 병사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하는 작가적 발상이 참신하면서도 무대 공간이 작가적 상상을 강렬한 판타지로 확장하지 못한 점이다. 두 병사의 대화가 사변적으로 치우쳐 극 중 장면이 약화된 부분도 있다. 침몰해 가는 함선 내부와 해수의 그로테스크한 구조적 이미지, 물과 죽음, 전쟁이라는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장치하여 공간을 극대화했다면, 국가와 전쟁을 넘어선 평화의 연대를 희망하는〈무명의 용병사〉의 메시지가 시각적으로 더욱 증폭되지 않았을까. 연극적 형상화는 투박하지만 힘이 있고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김학수, 유이수, 홍바다 등 젊은 배우들이 지역연극에서 버티니 <무명의 용병사>도 살아난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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