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한라산은 제주도와 동격이다. 많은 이들이 한라산 정상(1,950m)을 꿈꾸며 제주를 방문한다. 하지만 백록담이 있는 정상을 가지 않고도 한라산의 다채로운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국가숲길로 지정된 '한라산 둘레길'이다. '높이'가 아닌 '깊이'를 즐기는 숲길이다.
◆계곡엔 온통 낙엽이 출렁
이 길은 한라산 국립공원 테두리, 해발 600~800m 중산간 지역 국유림에 조성한 걷기여행길이다. 일제 강점기 때 병참로와 임도, 표고버섯 등 임산물 운반로를 복원해 연결했다.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코스를 조성해 현재 9개에 이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라산을 한 바퀴 돌지는 못한다. 한라산 북쪽 약 10㎞ 정도가 끊어져 있다. 사유지와 국립공원 땅이 섞여 있어 길 조성을 위한 협의가 진행 중이다.
2022년 산림청 국가숲길로 지정된 한라산 둘레길 9개 구간은 저마다 개성을 자랑한다. 하지만 사람들 발길은 한 코스에 쏠려 있다. 7구간 '사려니숲길'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이 길은 늘 장사진을 이뤄 입구에 주차하기도 쉽지 않다. 나머지 구간의 인기는 엇비슷한데 가을에만 방문객이 반짝 느는 곳이 있다. 단풍 명소로 통하는 1구간 '천아숲길'이다. 사려니숲길의 반대편, 한라산 서쪽 자락에 조성된 8.7㎞ 길이다.
13일 오전 한라산 둘레길 매력을 엿보기 위해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40번 버스정류장에서 2㎞ 정도를 걸어 1구간 들머리인 천아계곡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명성처럼 절정에 이른 새빨간 숲이 입구부터 펼쳐졌다.
본격적인 숲길로 접어들자 가장 많이 보이는 건 제주조릿대였다. 높게는 허리춤까지 자란 조릿대가 온 숲을 융단처럼 뒤덮었다.
크고 작은 계곡과 연못도 만났다. 물에 뜬 낙엽이 묘한 운치를 자아냈다. 한라산 둘레길 대다수 계곡은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乾川)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엔 물이 철철 흘러 길이 자주 통제되기도 한다는데, 가문 가을이어선지 물 대신 낙엽이 출렁이고 있었다. 계곡에 깔린 현무암을 덮은 낙엽. 제주만의 가을 풍경을 눈에 담았다.
1구간을 절반쯤 지나자 시원하게 쭉쭉 뻗은 삼나무 숲이 이어진다. 1970년대 조림한 것이라고 한다. 제주를 방문하는 많은 이들은 삼나무 숲에 열광한다. 사려니숲길이 인기인 것도 빽빽한 삼나무 덕이다. 이곳 삼나무 숲은 얼마나 울창한지 신비스러운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삼나무 군락을 지나 천아숲길 종점 '보림농장'에 닿았다. 제주도 북쪽 제주시에서 남쪽 서귀포시로 걸어서 넘어왔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보림농장은 예부터 표고를 재배하던 농장이다. 이곳 말고도 둘레길 곳곳에서 표고를 재배한다. 둘레길로 활용한 임도 가운데 상당수가 표고 운송용 도로였다.
이곳에서 빵과 치즈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뒤 2구간 '돌오름길' 8㎞ 여정을 시작했다. 졸참나무와 단풍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자라는, 육지와 비슷한 모습의 숲길이 이어진다. 천아숲길과 달리 이곳은 남쪽을 향해 있어선지 아직 가을이 오지 않았다. 숲 안은 온통 초록 세상이었다.
◆원시림 속, 역사와 만나는 길
이튿날은 3구간 '산림휴양길'과 4구간 '동백길'을 걸었다. 산림휴양길은 2.3㎞로 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은 코스로 서귀포자연휴양림을 통과하는 숲길이다. 둘레길도 휴양림 내 임도 주변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노루 등 야생동물을 쉽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깊고 울창한 숲이다.
동백길은 2010년 가장 먼저 개방한 한라산 둘레길 코스다. 한라산 남쪽 자락 11.3㎞를 횡으로 걷는다. 출발 지점은 '무오법정사'다. 3·1운동보다 한 해 이른 1918년 항일운동을 벌였던 역사적인 장소다. 절터만 남아 있었는데. 2003년 제주도가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탑과 의열사를 세웠다.
의열사 옆 돌기둥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길이 시작된다. 길 이름처럼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이어졌다. 전날보다 눈이 훨씬 즐거웠다. 돌이 많아 내내 바닥을 살피며 걷다가 이따금 고개를 치켜들면 어김없이 눈부신 색 잔치가 펼쳐졌다. 난대상록수와 온대 활엽수가 조화를 이룬 덕이었다. 빨강 노랑 단풍과 싱그러운 초록 잎이 어우러진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동백길로 접어든지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얼기설기 둘러친 돌담이 보였다. 한쪽에 '4·3 유적지' 팻말이 서 있다. 4·3 사건 당시 토벌대의 주둔소로 자리라고 한다. 동백길에는 일제가 한라산 중 산간에 냈던 병참 도로의 흔적도 남아 있다. 착암기로 바위를 깨뜨린 자국을 곳곳에서 마주쳤다. 1945년 2월 1천명에 불과했던 제주도 주둔 일본군은 종전을 앞두고 7만5000명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이 길 끝엔 삼나무 사촌뻘인 편백나무 군락이 있다. 이곳에서 1~2㎞를 더 걸으니 한라산 국립공원 남쪽 '돈내코 탐방로'와 길이 포개졌다. 이내 남쪽으로 시야가 트였다. 서귀포 시내와 섶섬이 보였다. 빽빽한 숲길이 대부분인 한라산 둘레길에서 모처럼 만난 장쾌한 풍광이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빛을 받은 바다가 반짝였다.
◆숲의 정령 만날 듯 신비로운 이끼계곡
셋째 날은 마지막 여정으로 계획한 5구간 '수악길'을 걸었다. 울창한 숲속을 지나 집채만 한 화산암이 버틴 계곡을 수차례 건너도 숲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점점 깊어졌다. 원시의 숲, 대자연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길이었다.
"둘레길은 온전히 숲 자체에 집중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매력"이라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이 길에서 사람을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호젓하게 걷는 맛이 쏠쏠했다. 기자가 밟은 낙엽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새 울음소리와 날갯짓 소리가 전부였다. 이따금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바짝 긴장을 하고 걸음을 멈추면 멀리 노루가 있었다. 서로 놀라 잠시 꼼짝을 하지 않고 묘한 신경전을 벌이다 먼저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자 노루도 재빨리 숲으로 몸을 감췄다. 이날 오전 이곳에서 만난 노루만 해도 다섯 마리. 반면, 처음 세 시간 동안 사람들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으니 이 숲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된 셈이다.
이 길의 백미를 꼽자면 단연 이끼계곡이다. 3일 동안 한라산 둘레길을 걸으며 수많은 이끼계곡을 만났지만, 이곳 이끼계곡은 유난히 신비로웠다. 미야자키 하야오(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적인 감독)의 작품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정령의 숲'과 똑 닮은, 온통 푸른 이끼로 뒤덮인 돌무더기 계곡과 나무들. 그런 그림 같은 공간이 한라산 둘레길에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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