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자존심을 지탱하는 자부심에 관한 자술서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책] 잔소리 약국
김혜선 지음 / 도마뱀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김혜선은 영화 저널리스트로 현장에서 26년을 살았다. <필름2.0>에서 영화기자 생활을 마쳤다니 일면식은 없어도 시사회장에서 수차례 스쳐가는 정도의 인연은 있었으리라. 저자가 영화인이니 영화적으로 써야 마땅할 터.

나는 『잔소리 약국』을 읽으면서 정호현 감독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엄마를 찾아서>를 떠올렸다. 영화는 캐나다 유학 중인 딸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아버지가 남긴 집을 교회에 헌납하려는 엄마를 말리기 위해서다. 엄마에 대한 원망과 왜곡된 정보로 인해 모녀간의 골이 깊어지지만, 사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거치면서 엄마를 받아들인다. 캐나다로 다시 출국하는 날 딸은 엄마를 힘껏 껴안는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화해의 순간이다.

『잔소리 약국』은 표지에 '김혜선 소설'이라고 적혀있다. (정작 내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열외로 밀어 놓았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적은) 자전적 소설이라기에는 보드랍고, 에세이로 읽자니 너무 생생하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엄마의 삶을 되짚는 동시에 자신의 일상을 복기하면서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 삶을 통찰하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자술서에 가깝다. 그것은 어쩌면 뒤늦은 성찰이 찾아낸 혹은 꽁꽁 숨겨놓은 고해성사이고, 저자의 자존심을 지탱하는 자부심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자기 삶을 엄마 약국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연결하며 익숙한 약 이름들을 등장시키는 2부는 글 솜씨의 결정판이다. 예컨대 박카스와 가스활명수와 판피린과 컨디션과 원비디와 우루사가 난무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박카스는 전문의약품이 아니라서 영업직원이 직접 트럭을 몰고 약국에 배달한다는 얘기는 난생처음 들었다.). 특히 취한 무리가 약국에 들어와 숙취 드링크를 마시면서 서로 계산을 다투는 해프닝은 빤하지만 웃음이 터진다.

영화 <애프터썬>을 경유하며 아버지를 소환하는 대목은 짧지만 강렬한 필치로 한국 사회 구성원 공통의 경험을 자극한다. 그래서 이렇게 적었을까. "자기도 생애 처음 해보는 아버지 역을 하면서, 그래도 자식을 몇 명이나 먹여 살리고 학교도 보냈다고. 부족한 채로도 할 일은 했었다고. 인간적으로 미치도록 싫은 순간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나를 사랑했다는 감각만큼은 확실히 있었다고."

흥미로운 것은 31개 꼭지 중에서 29개가 5~7쪽을 넘지 않는 반면 '넌 대체 무슨 일을 해?'와 '그 모든 스페셜한 순간' 두 개, 말하자면 영화 일과 관련한 세부 설명과 근황에 10쪽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이를 뒤늦은 인정투쟁 혹은 존재증명으로 봐도 좋을까.

영화평론가 백정우

엄마의 약국을 정리하면서 저자가 느꼈을 감정의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다. 김현정 감독의 <은하 비디오>에서 비디오가게 폐업 날 비디오가 헐값에 팔려나가고 마침내 간판이 내려질 때 은하의 표정이 기억날 따름이다.

"오래 노동한 여성의 삶의 자취"를 남겨야겠다는 다짐을 현실로 완성한 『잔소리 약국』. 엄마와 보낸 한 시절을 회상하는 저자의 맺음말이 선명하고 묵직하다. "20년 11개월이라도 되는 양, 마치 끝나지 않을 시간 속에 갇힌 듯이 굴었던 2년 11개월이 지나갔다. 앞으로 나의 삶에서 때때로 기억될, 미련하고 사나웠지만 애썼던 시간. (중략) 세상의 모든 약국을 지나칠 때 종종 엄마를 떠올릴 것이다. 아프지만 나아갈 것이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