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경북 영양군의 산. 그 산이 품은 물이 영양군의 미래를 움직이고 있다. 양수발전소가 들어설 영양군은 굽은 국도와 느린 생활 리듬에 갇혀 있던 작은 '산군(郡)'에서 '전력(電力)'을 저장하는 도시라는 새로운 미래를 얻었다.
기자는 최근 영양군과 유사한 소규모 자연부락과 환경을 갖춘 스위스 루체른과 알프스 자락의 양수·수력발전소를 직접 확인했다. 수력을 이용해 가동하는 터빈은 암반 속에 숨고 수로는 산세에 녹아드는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발전소'. 그 앞에서 사람들은 전기요금 혜택과 장학금, 체험관·전망대를 즐기며 일상을 누렸다.
스위스의 풍경은 양수발전소가 조성될 영양군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스위스 알프스의 깊은 골짜기 속 자연을 지키면서도 에너지와 관광, 복지를 함께 누리는 '청정 발전 모델'은 영양군이 꿈꾸는 미래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1GW급 발전소를 영양 대전환의 촉진제로
알프스의 양수발전은 풍경을 벗어나지 않는다. 거대한 구조물이 시야를 점령하지 않도록 주요 설비는 지하화했고, 외부에서는 체험관·해설투어·전망 동선을 정교하게 엮어 관광과 교육을 키웠다.
더 결정적인 건 분배의 구조다. 전력 판매 수익이 전기요금 경감, 장학금, 마을복지로 환원되면서 주민 수용성은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 관람객이 '에너지 박물관'을 찾고, 학교는 현장학습을 통해 기후·에너지 수업을 현실의 언어로 연결한다. 발전소는 멀어진 자연이 아니라 가까워진 생활이었다.
현지에서 만난 주민들은 "전기요금이 줄고, 마을 기금으로 장학과 복지를 운영한다"는 점을 가장 먼저 말했다.
단순한 인센티브가 아니라 '발전소가 우리 삶을 실질적으로 편하게 만든다'는 체감의 문제였다. 영양군이 벤치마킹한 지점도 정확히 여기에 있다. 설비의 크기가 아니라 약속의 설계를 통해 혜택이 지역으로 선순환하도록 제도를 먼저 짜겠다는 것이다.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일원에 추진되는 양수발전소는 설비용량 1GW(원전 1기급), 총사업비 2조5천억원, 2024~2035년 12년의 대장정이다. 양수발전소는 밤에는 물을 올려 저장하고 낮 피크에는 떨어뜨려 전기를 만드는 '저장형 발전'으로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국가 전력망의 허리다. 이 대형 국책사업에 영양이 적지로 꼽힌 이유는 명료하다. 백두대간의 산악형 지형이 낙차 확보와 지하화 설계에 유리하고 기존의 청정 산림·하천 생태가 '친환경·저영향 모델'을 구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영양군의 구상은 '전력 인프라'를 '지역 인프라'로 확장하는 데 있다. 군은 경관과 환경을 해치지 않도록 양수발전소 주변의 도로망을 정비하고 관광자원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양수발전소 운영에 따른 기금의 분배 원칙은 주민 우선 고용과 지역협력기금 조성(장학·청년정주·로컬창업), 체험관·투어 운영의 지역 참여 확대다. 연결 전략은 전력(양수)·정주·관광·농업·교육을 묶음 패키지로 굴리려는 통합 구상이다. 요컨대 "전기를 저장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사람을 붙잡고, 사람이 머물며 또 다른 산업을 키운다"는 순환 구조다.
◆정주·관광·산업을 한 묶음으로
양수발전이 사람과 소득을 움직이려면 전기보다 먼저 '길'이 열린다. 영양군은 사업 초반부터 도로망 개선을 '성공 변수 1순위'로 올려놨다. 하부지-국도 연결 진입도로와 상부지 진입도로를 안전 기준에 맞게 신설·확장하고, 상부 저수지 둘레에는 순환형 일주도로를 놓아 공사·운영 차량과 생활·관광 동선을 깔끔히 분리한다.
공사 기간에는 대형 장비·자재 반입을 시간대·차로 분리로 관리하고, 급경사·급커브 구간은 구조개선으로 안전성을 높인다. 마을 연결로는 통학·통원 시간을 기준으로 불편 최소화 방안을 적용해 우회 동선을 미리 지정한다.
길이 바뀌면 체감거리가 줄고, 물류·관광·정주 동선이 동시에 달라진다. 한때 '멀다'는 이유로 선택지에서 밀리던 영양이 양수발전소 조성 이후에는 '가볼 만한 곳'으로 달라질 수 있는 대목이다. 영양군은 이 도로망을 공사 완료 뒤에도 정주·관광의 공용 인프라로 겸용해 매년 유지·보수 예산과 함께 관리 체계를 상시화할 계획이다.
영양군의 행정은 '에너지행정팀-전략산업팀' 투트랙으로 인허가와 생활권 설계를 동시에 끌고 간다. 이주가 필요한 가구를 위한 주거단지는 단순 이전이 아니라 새로운 정착 모델로 설계한다. 복지·체육·돌봄·작은도서관 등 생활 SOC를 얹고, 주민참여형 태양광, 스마트팜·가공센터, LPG 소형저장탱크 보급으로 에너지·농업 비용을 낮춘다. 정주는 '살 만한가'의 문제이고, 에너지 비용과 생활 편의는 곧장 정착률로 연결된다.
관광은 수변·별빛·체험으로 키운다. 양수발전소 상부 저수지에는 수변 산책로와 자전거길, 진입로 꽃터널, 은하수 전망대, 산정 카페를, 하부 권역에는 캠핑·게스트하우스·생태 트레일을 엮는다. 이를 통해 기존의 반딧불이생태공원-자작나무숲-밤하늘보호구역으로 이어지는 '에코-에너지 벨트' 위에 발전소 체험관과 해설 투어를 상설화해 교육 관광을 정착시킨다는 전략이다. 또 주말 체험형, 학기 중 현장학습형, 가족·은퇴층 힐링형 같은 테마 코스는 체류 시간을 늘리고, 로컬푸드·공예시장·소규모 공연과 결합해 지역 상권을 살린다.
산업·일자리는 공사·운영 단계의 지역민 우선 채용을 제도화하고, 친환경 건설·에너지 중소기업 유치를 통해 숙련 일자리를 만든다. 법정지원금과 운영수익을 장학·청년정주·로컬 스타트업으로 순환시킬 상생기금 모델도 설계 중이다. "전기요금 경감만이 혜택이 아니다. 지역에서 버는 돈을 지역에서 재투자하는 회로를 만드는 것이 진짜 복지"라는 게 영양군의 판단이다.
◆절차의 투명성이 곧 수용성
양수발전소 건립을 위한 12년의 장정은 '시간표'라기보다 '약속'의 연속이다. 영양군은 지난 2020년 유치계획 수립과 전담 T/F 구성, 2023년 범군민 결의대회, 2024년 통합 협의회 가동과 기초조사(진행률 95%)를 지나 2025년 예비타당성 조사(이하 예타) 신청·대상 확정까지 왔다. 내년 초에는 예타 결과 발표와 기본설계 착수, 2028년 8월 착공, 2035년 말 준공, 2036년 7월 정식 운전이 현재의 큰 흐름이다.
각 단계에서 영양군은 설명회·공청회·마을 간담회로 설계 변경과 생활 불편 대책을 주민과 함께 조정한다. 환경영향평가는 재해·지하안전·문화재 조사를 통합 관리하고, 공사 중 소음·비산먼지·토사는 실시간 공개와 주민참여 감시로 관리한다. 공사 차량 속도 제한, 야간 공사 금지, 토사 유출 방지망과 세륜시설 상시 가동 같은 눈에 보이는 조치도 필수다. 스위스가 그랬듯, 영양군도 절차의 투명성으로 신뢰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양수발전소는 저녁이면 상부로 물을 올리고, 낮이면 터빈을 돌려 전기를 흘려보낸다. 그 전기는 집집의 전등만 켜지 않는다. 길을 밝히고 일상을 움직이며, 체류형 관광과 지역 일자리, 교육·장학의 회로를 동시에 연결한다. 한 농가의 전기·연료비 부담이 줄고, 청년 부부가 이주단지에서 아이를 키우며 지역 학교 체험수업에 참여하고, 주말이면 수변 산책로를 걷는 방문객이 로컬 식당과 공방에서 소비한다. '멀고 조용한 산골'이 '머물며 배우는 도시'로 바뀌는 그 변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생활의 언어로 측정될 것이다.
스위스에서 확인한 상식은 간단했다. 자연을 지키는 설계, 혜택이 마을로 돌아오는 약속, 절차의 투명성. 영양군은 이 세 가지를 패키지로 묶어 '영양형 상생 모델'을 완성하겠다고 공언한다. '전기는 기반이고, 우리가 바꾸려는 것은 사람의 삶'이라는 말은 슬로건이 아니라 실무의 원칙이 돼야 한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양수발전소는 영양의 내일을 여는 열쇠이고 자연을 지키는 설계와 혜택이 마을로 돌아오는 약속으로 추진하겠다"며 "도로망·정주·관광을 패키지로 묶어 철저히 준비하고, 세계가 주목할 '영양형 상생 모델'을 꼼꼼히 완수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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