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 어진'은 원본을 옆에 두고 보면서 그대로 옮겨 그린 이모본이다. 근대기 대가인 조석진, 채용신 등이 참여해 1900년 모사했다. 원본은 육이오동란 때 부산으로 피난시켰던 왕실 유물을 보관한 창고가 불타면서 소실됐다. 화재 흔적이 약간 남았으나 다행히 보존된 소중한 어진이다. 18세기, 그리고 20세기 어진화사의 초상화 실력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는 명작이다.
영조의 51세 때 모습으로 원본은 1744년 장경주, 김두량, 조창희 등이 그렸다. 세 화가 중김두량은 영조가 각별히 총애한 화원이다. 영조는 김두량의 그림에 직접 제화를 남겼고 남리(南里)라는 호도 하사했다.
익선관에 홍룡포인 왕의 평상시 정복 차림인데 반신상인 점, 정면을 바라보는 보통의 초상화와 달리 시선을 아래로 향한 다소곳한 모습인 점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에 봉안되었던 어진이기 때문이다. 즉위 후 영조는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친어머니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 지내기 위한 건물인 육상궁(지금의 칠궁)을 따로 지었다. 이곳의 냉천정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머니의 사당을 지키는 아들의 모습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뒀다.
이 이모본을 그리게 된 것은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셔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선원전에 1900년 화재가 발생해 어진 7점이 몽땅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소실된 어진을 다시 모시기 위해 영정모사도감이 설치됐고 영조의 경우는 육상궁본을 원본으로 삼았다. 육상궁본은 제작되었을 당시부터 배관한 대신들이 핍진(逼眞)함을 감탄했다고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었던 점이 참작됐을 것 같다.
기록에 영조는 옥색(玉色), 곧 얼굴빛이 붉고 윤기가 있어 '홍윤(紅潤)'하다고 나오는데 초상화에도 그 점이 강조됐다. 용포의 붉은 색이 맑으면서도 깊이가 있으며 자세히 보면 칠보 문도 섬세하게 묘사했다. 옷주름은 윤곽선을 긋는 대신 음영으로 자연스럽게 입체감을 줬다. 왕을 상징하는 용보(龍補)는 용포와 같은 재질의 비단에 오조룡을 금사로 수놓은 금사오조룡원보(金絲五爪龍圓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따라 신하들의 사각 흉배와 달리 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용보는 둥글었다.
화면의 표제(標題) "영조대왕어진(英祖大王御眞) 광무사년(光武四年) 경자이모(庚子移摸)"는 고종이 직접 썼다. 고종은 영조의 고손자인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돼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영조는 고종에게 5대조가 된다. '영조대왕 어진'이 그려진 1900년, 광무 4년은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가 된 지 4년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채용신이 그린 '고종어진'을 보면 황제의 색인 누른색의 황룡포를 입었으나 군주의 상징인 용보는 '영조대왕 어진'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해 당시 국운의 쇠퇴가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듯하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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