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와 복건의 유학자 차림인 송시열(1607~1689)의 반신상 초상화다. 송시열은 본관이 충남 논산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우재(禺齋), 화양동주(華陽洞主)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정파이자 학파인 노론의 학자다.
화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의 초상화를 적극적으로 그렸던 조선 후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하얗게 센 수염과 검은 눈썹은 한 가닥 한 가닥 털의 방향을 따라가며 세심하게 그었고,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의 주름진 얼굴은 생김새가 또렷하게 각인된다. 몸체는 옷 주름만 간결하게 표시해 담백한 필치 속에서 노학자의 풍모가 실감 난다.
송시열은 벼슬한 기간이 8년여에 불과해 82년 생애 대부분을 조정이 아닌 산림(山林)에 있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천회 이상 언급되는 압도적 1위의 인물이다. 각 지역의 서원에 가장 많이 모셔져있다. 다음이 퇴계 이황이고 그 다음이 율곡 이이다. 초상화도 10여 점 이상 전한다.
'송시열 초상'에는 서예가의 솜씨로 보이는 두 편의 글이 있다. 머리 위로 후광처럼 둥글게 써넣은 글은 포은 정몽주의 초상화에 대한 숙종의 어제 찬문이고, 오른쪽은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글이다.
고라니와 사슴 무리 속 쑥대와 싸리로 엮은 오두막 麋鹿之群 蓬蓽之廬
창 밝고 인적 고요한데 굶주림 참으며 책을 읽는다 窓明人靜 忍飢看書
너의 모습은 마르고 야위었으며 너의 학문은 모자라고 성글다 爾形枯臞 爾學空疎
제왕의 충심을 너는 저버리고 성인의 말씀을 너는 업신여긴다 帝衷爾負 聖言爾侮
마땅히 너를 누에치고 고기 잡는 무리에 두어야 하리라 宜爾置之 蠶魚之伍
숭정 연호가 시작된 후 신묘년(1651, 효종 2)에 우옹(송시열)이 화양서옥에서 스스로를 경계하다 崇禎紀元後辛卯 尤翁自警于華陽書屋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1787년)의 '서화상자경(書畵像自警)'이다. 주희(朱熹)가 44세 때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명(銘)을 지은 선례를 따랐을 것이다. 조선에서 '송자대전'이라는 문집 이름은 유례가 없었다. 주희의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비긴 명명이다. '송자대전'은 정조의 왕명으로 간행됐고 정조는 주희와 송시열을 나란히 현자로 일컬은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직접 편찬하는 등 송시열을 적극 현창했다.
노론의 지지를 획득한 정조는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신해통공(금난전권 철폐), 장용영 설치, 화성 신도시 건설, 서얼 허통 확대 등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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