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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대구 최고 부촌, 지금은 '고립 밀집지'…노후주택가의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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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립보고서] 낡은 동네, 고립된 사람들
낡은 주택에서 혼자 사는 노인들…"집주인, 내가 죽은 줄 알고 신고"
단기 세입자와 장기 거주자가 모여 사는 '혼합 고립' 양상

대구 남구 대명3동 주택가에서 노인들이 모여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대구 남구 대명3동 주택가에서 노인들이 모여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김향숙(67) 씨는 방이 어두워도 불을 켜지 않고 산다. 신중언 기자

빛바랜 적벽돌조 주택, 오래된 전단이 겹겹이 붙은 전봇대, 글씨가 드문드문 지워진 낡은 간판.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이곳은 대구 남구 대명3동. 골목은 조용했다. 담배를 입에 문 노인도, 보행기를 끌고 걷는 노인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인근 아파트 재개발 현장의 공사음이 들려왔다.

◆대명동의 고장투성이 집…"계단에서 자주 굴러요"

32년 된 다세대 주택 3층 집은 대낮에도 어둑했다. 안부를 확인하러 온 복지사가 "전등 좀 켜도 되냐"고 묻자, 김향숙(67) 씨는 단호히 손사래를 쳤다. "안 돼요." 그는 전깃불을 극도로 싫어했다. "작년에 우리 아저씨가 벌건 대낮에 불 켜놓고 가 버렸거든요. 침대에 거꾸로 누워 있길래 자는 줄 알았지. 그 뒤로 불을 켜기가 무서워."

집은 고장투성이였다. 며칠째 수도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변기도 깨졌고, 밥솥은 반년 전 고장이 났다. 새로 장만할 돈이 없어 라면으로 매 끼니를 때운다. 세탁기 역시 물이 잘 나오지 않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병원은 4년 넘게 가지 않았다. "무섭잖아요. 갈 때마다 병이 하나씩 생기니까. 돈도 없는데…."

향숙 씨는 평생을 대명동에서 낡은 다세대주택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선천적으로 척추가 약해 멀리 걷지도, 직업을 갖지도 못했다.

어릴 때만 해도 대명동은 대구의 대표적 부촌이었다. 1970~80년대에는 영남대병원 뒤편 언덕마다 지역 기업가와 명망가들의 저택이 들어섰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아파트붐과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일대는 빠르게 쇠락했다. 1996년 계명대 대명캠퍼스가 성서로 이전하면서 젊은이들도 떠났다. 한때 활기를 불어넣던 하숙촌마저 무너졌다.

"옛날에는 유명한 부잣집 양옥이 줄지어 있었지. 기업하는 사장님들, 돈 많은 집안들이 다 거기 살았거든. 나도 어릴 때는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집안이 넉넉했다고, 향숙 씨는 말했다.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동네에 남은 건 저처럼 오래된 것들 뿐이라예. 주민들도 늙은이들이나 혼자 사는 사람들이고." 향숙 씨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약한 그가 홀로 지내기에는 지금의 집은 적합하지 않다. 가파른 계단이 특히 그랬다. "이건 2주 전에 넘어진 거." 그는 새파랗게 멍든 왼쪽 눈두덩이를 가리켰다. 몇 달 전에는 계단에서 굴러 머리가 깨졌다.

남편과 사별한 뒤로 향숙 씨의 세계는 점점 좁아졌다. 지금은 좁은 방 안 침대 위로 축소됐다. 그는 여름 대부분을 침대에 드러누운 채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 들으며 지냈다.

지난 8월 대구 달서구 송현1동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만난 장화자(77) 씨. 요양보호사가 방문하지 않으면, 그는 혼자 TV를 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윤수진 기자
김향숙(67) 씨는 방이 어두워도 불을 켜지 않고 산다. 신중언 기자

◆대명동 70%는 30년 넘은 '노후 건축물'…저렴한 월세에 취약계층 몰려

오래되고 낡은 집에서 혼자 지내는 위험군들은 고립사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간다. 대구시에 따르면 대명동 전체 건축물 1만3천여 호 중 약 70%에 해당하는 9천200여 호가 30년 이상 된 노후 건물이다. 20년 이상 30년 미만의 건축물도 1천400여 호다.

대명1·3·9동의 주거 형태를 보면 단독·다세대 주택이 전체의 약 77%를 차지하는 반면, 아파트는 평균 18%에 그치며 전형적인 노후주택 밀집지의 형태를 보였다. 인구 구조도 비슷하다. 대명1·3·9동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평균 30%, 1인 가구 비율은 58% 수준으로, 대구 평균(65세 이상 21.5%, 1인 가구 40.4%)을 크게 웃돈다. 주민 절반 이상이 혼자 살고, 열 명 중 세 명은 노인인 셈이다.

주거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LH 매입임대주택도 이 일대에 쏠려있다. 16년 전 대명9동의 LH 매입임대주택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허진호(63·가명) 씨는 최근 기독교 계열의 신흥 종교단체를 다니기 시작했다. 해당 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곱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하루종일 집 안에만 있는 그를 찾아주는 건 이곳 교인들뿐이다. "예배를 하루라도 빼먹으면 전화가 오고, 심지어 집 앞에도 찾아와요." "날 이렇게 찾아주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특별히 요구하는 것도 없더라고요."

◆송현동도 노후 주거 밀집지…치매 앓는데 홀로 지내는 노인도

대명동 일대에서 확인한 고립의 유형은 달서구 송현1·2동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지역 역시 낡은 단독·연립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선 전형적인 노후 주거 밀집지라는 점에서 대명동과 궤를 같이 한다.

대구시에 따르면 송현1·2동 전체 건축물(5천900여 호) 가운데 20년 이상 된 건물은 약 95%에 달한다. 30년 이상 노후 건물로 좁혀 봐도 3천5백여 호로, 전체의 60%를 넘는다. 새집은 손에 꼽을 정도다. 10년 미만 신축은 176호, 10~20년 건물은 98호에 불과하다. 송현1·2동의 단독·다가구·다세대 주택 비율은 41.22% 정도였다.

송현1·2동은 197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조성된 대규모 저층 단독주택지다. 한때는 신도시로 불렸지만, 재개발 사업이 번번이 좌초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보금자리가 됐다.

송현1동의 한 다세대 주택. 장화자(77) 씨는 엉금엉금 기어 화장실로 갔다. 그는 지난해 침대에서 떨어진 뒤 허리를 다쳐 걷질 못했다. 화자 씨는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치매가 시작된 지 5년, 그의 인지 능력은 매일 조금씩 와해되고 있다. 그를 돌보는 사람은 요양보호사 서모(65) 씨뿐이다. 그마저 하루 세 시간만 곁에 머문다.

지난 8월 대구 달서구 송현1동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만난 장화자(77) 씨. 요양보호사가 방문하지 않으면, 그는 혼자 TV를 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윤수진 기자

아들 정우(가명)는 서울로 떠난 지 오래다. 아들 얼굴을 보는 날은 1년을 잡아도 한 손에 꼽는다. 화자 씨의 휴대전화 통화목록에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아들에게 건 기록이 남는다. 치매 탓에 같은 전화를 반복하기도 하고, 잘못 눌러 걸기도 한다. 아들은 근무 중이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화자 씨는 곧잘 '방금 전까지 아들이 집에 있었다'는 식의 망상에 빠진다.

"새 영감 하나 데리고 올까?" 화자 씨가 농담을 내뱉자 서씨는 "걷지도 못 하는데 누가 오겠노" 하며 맞받는다. 서 씨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이웃 집주인 번호를 저장해뒀다. 화자 씨가 전화를 받지 않을 때면,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노후주택가의 '혼합 고립'⋯'장기 단절'과 '단기 취약' 교차

노후주택가는 두 경로의 고립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저렴한 월세를 찾아 유입된 취약계층의 단기 유입형 고립과, 한 동네에서 수십 년을 살며 관계망이 소진된 장기 정주형 고립이 겹쳐 나타난다. '혼합 고립'은 이처럼 이중화된 고립 구조를 뜻하는 말이다.

대구의 노후주택가 밀집지에는 고립된 가구가 몰려 있다. 남구 대명1동(인구 천명당 16.0명), 대명3동(14.4명), 대명9동(13.7명), 달서구 송현1동(15.8명), 송현2동(16.0명)은 대구에서 인구 대비 고독사 위험군 비율이 상위권에 속한다. '대구의 강남'으로 불리는 범어동 일대에서도 범어2동(15.6명)은 예외가 아니다. 이곳 역시 오래된 저층주택이 밀집한 1종 일반주거지역이다.

모두 건물 가치와 주거 매력이 낮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때문에 세입자 비율과 거주 불안정성이 높다. LH 매입임대주택이 집중된 것도 같은 이유다. LH 대구경북지역본부에 따르면 대명동 일대의 LH 매입임대주택은 1천801호로, 남구 전체 물량(2천58호)의 87.5%를 차지한다. 대구 전체(1만150호) 기준으로도 17.7%에 해당한다. 송현동 역시 569호로 달서구 전체의 31.4%를 차지했다.

노후주택가에 사는 고립 가구의 사회적 관계망은 극도로 얇았다. 본지가 노후주택 거주 고립사 위험군 1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은 꾸준히 연락이 닿는 가족이나 지인이 1명 이하라고 답했다. 일주일 기준 '10분 이상 대화한 날'이 2일 이하인 비율도 44%(8명)에 달했다.

거주 기간을 기준으로 보면 고립의 양상은 더욱 분명해진다. 응답자의 거주 기간은 2년 이하 단기 거주자(66.7%)와 10년 이상 장기 거주자(22.2%)로 극단적으로 양분됐다. 단기 거주자는 저렴한 월세를 찾아 유입됐지만 지역사회에 관계망을 형성하지 못한 채 고립되는 유형이다. 장기 거주자는 사별, 자녀 출가 등 생애 사건을 거치며 관계망이 소진된 경우가 많았다.

실제 관계 인식에서도 차이가 뚜렷했다. 2년 이하 단기 거주자 12명 가운데 가장 가깝게 느끼는 사람으로 '이웃'을 꼽은 응답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은 가족(5명)이나 친구·지인(3명)을 관계의 중심으로 인식했다. 반면 10년 이상 장기 거주자 4명 중 3명(75%)은 '이웃'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꼽았다. 오랜 거주 과정에서 인사와 안부 확인 같은 옅은 지역 유대가 형성된 것이다. 다만 이 유대 역시 시간이 흐르며 주변 사람들이 떠나고 느슨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물리적 환경도 고립을 심화시켰다. 가파른 계단, 열악한 채광과 구조는 고립사 위험군의 활동 반경을 좁히고 외부 접촉을 줄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구사회적고립가구지원센터의 신은경 과장은 "대구의 노후주택가 지역은 주거급여 수준의 낮은 월세로 인해 주거취약계층이 밀집해 있다"며 "재개발·재건축으로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사는 주민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빈집이나 폐건물에 거주하는 사례도 적지 않고, 지원이 이뤄지더라도 거주 안정이 보장되지 않아 이후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는 대구보건대의 연구지원과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의 기획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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