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밤, 숲 속을 걷던 마르틴 루터는 숲이 등불을 켜놓은 듯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인간은 어둠 속의 초라한 나무와 같지만, 빛을 받을 때 주변을 밝히는 존재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이 깨우침을 전하기 위해 숲 속 전나무를 집으로 옮겨 눈 모양의 솜과 리본, 촛불로 장식했다. 이 이야기가 크리스마스 트리의 시작이라 전해진다.
어릴 적 12월이 되면, 아버지와 나는 산에 올라 적당한 크기의 소나무를 골라 베었다. 집으로 옮겨온 나무에서는 솔잎이 흩어지고 솔향이 배어 나왔다. 누나와 나는 문방구에서 산 반짝이 줄을 트리에 감고 별을 얹은 뒤, 색종이를 오려 붙인 장식물을 빨간 실로 매달았다. 에로이카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테이프가 돌아가며 박혜령의 캐럴이 흘러나왔고, 아카펠라와 영화 음악으로 이어지며 겨울 저녁 시간은 그 소리로 차분히 채워졌다.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는 늘 주변 사람들과 함께했다. 배꼽 친구 야고보와 동생 요한, 옆집 큰딸 은희와 동생 숙희까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우리는 이맘때가 되면 집 옆 성모당 앞마당에 모여 캐럴을 따라 불렀고, 서툰 손길로 전구를 달며 크리스마스 장식을 했다. 성탄절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도 못했고, 축제의 유래를 따지지도 않았다. 어둠이 빨리 내려앉는 겨울 한복판, 함께 모여 노래하고 웃는 일이 그저 즐거웠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무념했다. 특별히 행복을 의식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요즘 거리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거의 들을 수 없다. 상점과 카페를 제외하면, 거리 어디에서도 캐럴은 울려 퍼지지 않는다. 한때 누구에게나 열려 있던 노래는 저작권이라는 제약 속에 갇혔고, 겨울 거리는 그만큼 조용해졌다. 크리스마스 장식은 오히려 더 화려해졌다. 하지만 집 안에 나무를 세우고 시간을 들여 장식하던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손으로 만들고 함께 준비하던 과정이 줄어들면서, 연말 거리 축제는 이제 예산과 안전 관리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규정이나 계획서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람 사이의 온기 아닐까.
나는 가끔 소나무 트리를 떠올린다.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이고, 서툰 노래와 조금은 느슨한 반주,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했던 시간.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함께,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충분했던 그 계절의 밀도일지 모른다. 그 나무 트리는 사라졌지만, 그때 온도와 기억은 여전히 겨울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불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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