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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시대의 창]퇴직연금제의 제 2막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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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2005년 도입 이후 20년 만에 퇴직연금 제도가 크게 바뀐다. 모든 사업장에 퇴직연금을 의무화하고, 전문가가 운용하는 기금형 모델을 도입하겠다는 노사정 합의가 나왔다. 역사적인 합의가 일각의 우려처럼 또 하나의 '불신 연금'을 만들지 않고 진짜 노후 안전망이 될 수 있도록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퇴직연금 도입 이후 노사가 구조 개편 방향에 합의한 것은 처음으로, 그 자체가 큰 진전이다. 특히 퇴직급여를 회사 안에 쌓아두지 않고 외부에 적립하도록 하는 사외적립 의무화는, 도산과 임금체불 위험에 취약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간 우리 퇴직연금은 원리금 보장 상품에 치우친 운용 탓에 장기 수익률이 연 1~2%대라는 '물가상승률조차 버거운' 성적표를 받아왔다. 전문가가 운용하는 기금형 모델을 도입해 이 저조한 수익률을 끌어올리겠다는 방향은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제도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퇴직연금 제도의 '제2막'을 열었다는 점은 분명한 성과다.

그러나 성과를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이번 합의에는 짚어야 할 우려가 적지 않다. 가장 심각한 것은 기금의 정치적 동원 위험이다. 이미 국민연금 기금이 증시나 외환시장 안정에 동원된다는 불신이 쌓여 있는 가운데, 또 하나의 거대 기금을 만드는 일은 정치·재정적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금의 정치적 동원 위험

국민은 "내 퇴직금이 시장 안정용 쌈짓돈이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영국은 2012년 자동가입제(NEST) 도입 시 투자 원칙 보고서(SIP)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하고, 정부로부터 독립된 수탁자 이사회 구성을 의무화했다. 우리도 기금의 운용 목적과 투자 원칙, 정치적 개입 차단 장치를 법률에 어떻게 명시할 것인지부터 선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둘째는 가입자의 선택권 보장과 재산권 보호 문제다. 노사정은 "기금형은 선택지를 하나 더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의무화 자체가 사실상 퇴직금 제도의 대전환인 것도 사실이다. 명목상 일시금 수령과 중도인출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어떤 방식이 기본값(디폴트 옵션)이 되는지, 전환 절차가 얼마나 자동적인지에 따라 체감되는 선택권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국 401(k)는 본인 동의 없는 자동 가입을 허용하면서도 언제든 탈퇴(Opt-out) 가능한 구조를 갖췄다. 구체적 로드맵 없이 추진된다면, 제도는 곧바로 "내 돈을 마음대로 묶어두는 장치"라는 반발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영세·중소기업의 부담이다. 현재 5인 미만 사업장의 퇴직연금 가입률은 15% 안팎에 불과하다. 최저임금과 사회보험료 인상으로 이미 어려움을 호소하는 소규모 사업장에 적립금과 수수료, 행정 부담을 추가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전담 인력이 없는 사업장에서는 제도 이해 과정에서 혼란과 반발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단계적 적용은 물론, 정부의 재정·세제 지원과 공공성이 높은 '표준형 기금' 제공 같은 연착륙 장치가 반드시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넷째는 거버넌스와 책임 구조의 공백이다. 기금을 누가 운용할 것인지, 수탁기관 선정 기준과 손실 발생 시 책임 소재는 무엇인지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 네덜란드는 퇴직연금 기금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를 50% 참여시키는 등 강력한 견제 구조를 가졌음을 참고해야 한다.

◆체감되는 노후 안전망 되어야

기금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다. 더불어 이직이 잦은 청년과 플랫폼 종사자, 하청 노동자 등 이미 조각난 노동시장의 현실을 반영해 1년 미만 노동자의 사각지대 해소 방안도 '향후 과제'로 미루지 말고 구체화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명확한 방향 제시와 통합적 설계다. 첫째,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의 역할 분담과 목표 소득대체율을 정하는 '노후소득보장 기본 설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OECD 평균 소득대체율이 60%를 웃도는 상황에서 우리 퇴직연금이 어느 정도의 격차를 메울 것인지 목표가 투명해야 한다.

둘째, 기금운용 거버넌스를 정치와 관료로부터 독립시켜 노동자·사용자·전문가가 균형 있게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영세사업장과 비정형 노동자를 위한 정부 매칭 지원 등 '연착륙 패키지'를 병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논의를 국민연금 개혁과 함께 다시 꿰어야 한다. 더 내고 더 오래 일해야 하는 사회에서, 퇴직연금은 또 하나의 부담이 아니라 "직접 체감되는 노후 안전망"이 되어야 한다. 국민연금 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퇴직연금만 서두르면 국민은 연금 개혁 자체에 더 큰 불신을 갖게 될 것이다. 퇴직연금 노사정 합의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기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연금 사회계약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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