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오늘날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한 것은 우연히 일어난 기적이 아니다. 그 뿌리는 1960년대와 70년대, '반도체'라는 낯선 개념을 이해하고 국가적 역량을 결집한 박정희 정부의 전략적 선택과 선구적인 과학자들의 헌신 덕분이다.
반도체 산업은 1960년대 초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태동했다. 벨연구소, 페어차일드 등 글로벌 선두 주자들이 집적회로(IC)를 발명하고 상용화가 진행되면서 미국 기업들이 관련 기술을 독점했다. 1965년 미국의 코미 반도체(Komy Semiconductor)가 국내에 진출하여 조립 공장을 설립했다. 반도체가 인류를 이끌 첨단 성장산업이 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되었으나 한국은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지본·기술·시장 뭐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전자산업의 중요성을 간파한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미국 전자공학 분야의 석학 김완희 박사(당시 컬럼비아대 교수)를 청와대로 초빙했다. 이날 박 대통령 탁자 위에는 작은 트랜지스터가 놓여 있었다. 박 대통령은 "요 쪼매난(조그마한) 것이 한 개에 20~30달러나 하고,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니…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주시오"라고 하소연했다.
김완희 박사는 상공부 고문으로 위촉되어 '전자공업 육성방안'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를 토대로 박정희 정부는 1969년 1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전자공업육성법'을 제정·공포했다. 전자산업을 '전략 수출산업'으로 지정하고, 해외 반도체 기업의 국내 투자 유치 및 국내 기업의 기술 개발에 파격적인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법 제정 직후인 1969년 아남산업이 미국의 앰코일렉트로닉스와 손잡고 국내 최초로 민간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한국을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부품을 단순 조립하는 하청 기지로 활용했다. 때문에 말이 '반도체 산업'이었을 뿐, 핵심 공정 기술 부문에는 접근할 수 없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KIST의 선구적 역할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싹이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한다. 박정희 정부는 전투사단을 베트남에 증파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존슨 미국 대통령은 1천만 달러의 무상 원조 자금을 제공했다. 이 자금으로 바텔연구소를 모델로 하여 문을 연 것이 KIST다. KIST는 한국 청년들의 '피의 대가'로 세워진 과학기술 발전의 금자탑이었다.
일본 야스카와전기(安川電機)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정만영 박사가 KIST 부소장으로 영입되었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KIST 연구팀은 국내 최초로 전류 증폭용 바이폴라 트랜지스터(Bipolar Transistor) 개발에 성공했다. 1970년대 초에는 KIST의 민석기 박사 팀이 실리콘 적층 기술을 개발했고, 김종국 박사 팀은 발광다이오드(LED) 소자 개발에 성공했다. 이것은 한국 반도체 기술이 이론을 넘어 실제 제조 역량의 기초를 다졌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유상운,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시행과 전개-반도체 개발 컨소시엄을 중심으로, 1980-2010」,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9, 65쪽). 이 두 박사 팀의 연구실은 한국 반도체산업의 거인들을 키워낸 '인재 양성소'였다.
이런 성과에 고무된 KIST는 1973년 반도체장치연구실을 신설하고, 미국 GE(General Electric)에서 풍부한 현장 경험을 쌓은 김만진 박사를 연구실장으로 영입했다. 김 박사의 영입은 한국 반도체 공정 역사에서 신의 한 수로 기록된다.
GE는 1950~1960년대 신호용 트랜지스터, 전력용 반도체(SCR), 터널 다이오드 등 특수 소자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 혁신을 주도한 강자였다. 1970년대 이후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와 마이크로프로세서 중심의 'MOS(금속산화물 반도체) 집적회로' 공정으로 전환되었다. GE는 기존의 시장에 안주하는 바람에 범용 대량 생산 반도체 시장에서 크게 뒤졌다. GE 경영진은 반도체 사업 축소 및 장비 처분에 나섰다. GE 내부 사정에 정통한 김만진 박사는 GE와 협상하여 반도체 장비와 인프라를 통째로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훗날 한국이 공정 기술에서 빠르게 선진국을 추격하는 토대가 되었다.
◆IBRD와 이스칸더 박사의 적극적 지원
민간 부문에서는 강기동 박사가 반도체 붐을 폭발시켰다. 강 박사는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 모토로라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특허를 보유한 전문가였다. 그가 1974년 경기도 부천에 설립한 한국반도체는 웨이퍼 가공 공정(Fab)을 갖춘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반도체 제조 시설이었다.
경영난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삼성이 인수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삼성은 전자시계, TV용 트랜지스터, 집적회로(IC) 국산화에 매진했다. 1978년 한국반도체의 상호를 삼성반도체로 변경하고 1980년 합병을 거쳐 1982년 독자적인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다.
강기동의 한국반도체가 탄생한 1974년 11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IBRD 기술진은 한국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반도체와 컴퓨터 산업을 꼽았다. 정부는 이 조언을 수용하여 1975년 미국의 유명 컨설팅사인 ADL에 '한국 전자공업의 장기전망'에 관한 심층 조사를 의뢰했다. 조사 결과 "반도체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내용이 제시되었다.
당시 선진국들은 반도체 기술 유출을 우려해 후발국의 시장 진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원천 기술 확보가 봉쇄되어 한국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요원한 꿈이 될 위기에서 구원자로 등장한 사람이 IBRD의 아시아 경제개발국장 마그디 이스칸더(Magdi R. Iskandar) 박사였다. 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한국은 1976년 세계은행에서 2,9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이 자본은 상공부 산하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설립의 종잣돈이 되었다. KIET는 단순히 연구에만 그치지 않고 반도체 설계 및 공정 기술 확보, 최신 시험 설비 도입, 국내 기술자들을 해외로 보내 교육시키는 '기술 인프라 구축'에 매진했다. 이스칸더 박사가 주선한 세계적인 반도체 전문가들의 초청 강연과 기술 지도는 한국 엔지니어들의 시야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출범은 겉으로 보면 IBRD, 이스칸더 박사의 공헌 덕분으로 보이지만, 내면을 보면 미국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과 전략적 묵인, 한미 동맹의 특수성이 작동한 결과물이었다.
1970년대 중반은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 논란, 베트남전 종전으로 동아시아의 냉전 지형이 급변하는 시기였다. 미국은 한국이 자립할 수 있도록 경제적·산업적 능력을 갖추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보 방어선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KIST 설립이 베트남 파병에 대한 미국의 감사 표시였다면, KIET 설립은 한국을 하이테크(첨단 전자 및 반도체) 우방국으로 체질 전환을 위한 미국 안보 전략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략적 지원
세계은행 차관의 상당액은 구미 공단에 첨단 반도체 설비 도입, 국내 엔지니어들을 미국 실리콘밸리로 연수 보내 선진 기술 습득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미국이 한국의 기술 자립을 봉쇄하려 했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설립을 통한 반도체 기술개발과 인력 양성 인프라 구축은 베트남전에서 피를 흘리며 동맹임을 입증한 한국을 첨단산업 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미국이 국제기구(IBRD) 명의를 빌려 제공한 '눈에 보이지 않는 전략적 조력'이었다.
한국 대통령의 공식 연설문에서 '반도체'라는 단어가 핵심 국가 과제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77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이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우리의 핵심 수출전략 산업인 전자공업을 고도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올해부터 반도체와 컴퓨터 개발을 본격 추진하기 위해 구미공단 내에 대규모 특화 단지를 착공하겠다"라고 밝혔다.
이 선언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상공부 산하에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를 출범시키고, 세계은행 차관 2,900만 달러로 구미에 대규모 반도체 생산 및 시험 공장(Fab)을 건설했다. 또 구미에 내륙 최대의 전자공업단지를 건설했다. 이 시기에 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정책 드라이브가 있었기에 한국 반도체는 황무지에서 기적의 싹을 틔울 수 있었다.
펜앤드 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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