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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건축기행] 남원 예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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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지우고 담을 들이다
광한루 곁, 머물기 위해 지은 한옥

남원 예촌 야간 전경모습.
남원 예촌 야간 전경모습.

남원에 가면 대개 광한루원부터 간다. 오작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춘향과 몽룡 이야기를 한 번쯤 떠올린다. 그러고는 어쩐지 할 일을 다 했다는 얼굴로 다시 차에 오른다. 남원은 오래도록 그런 도시였다. 들르기는 하지만 오래 앉지는 않는 곳. 해마다 백만 명 가까운 발길이 광한루원 담장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큰길로 빠져나갔다.

그 담장 북쪽, 구도심 쪽으로 한옥 한 마을이 들어섰다. 남원 예촌이다. 2016년에 문을 열었다. 전라북도와 남원시가 낙후한 구도심을 살리기 위해 추진한 사업이다. 말하자면 의도가 분명한 마을이다. 스쳐가는 남원을, 하룻밤쯤 머무는 남원으로 바꾸는 일. 예촌은 그 목표를 품고 광한루원 곁에 앉았다.

남원 예촌
남원 예촌

◆길을 지운 자리

예촌에서 먼저 볼 것은 집이 아니라 길이다. 광한루원과 마주 보던 남쪽 2차선 찻길을 없애고, 그 자리에 사람만 걷는 길을 냈다. 광한루원 담장과 나란히 새 담도 둘렀다. 차가 사라진 길은 금방 티가 난다. 발걸음이 느려지고, 목소리도 조금 낮아진다. 괜히 담장 옆을 따라 걷게 되고, 넝쿨이 어디까지 올라갔나 눈이 간다. 예촌은 그렇게 사람을 먼저 걷게 만든다.

마주 본다는 것은 결국 예의의 문제다. 광한루원의 담은 기와를 얹고 키 큰 대나무를 세워 단정하다. 예촌은 그 격식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았다. 낮은 돌담을 쌓고, 담을 타고 넘는 넝쿨을 심었다. 한쪽이 반듯하면 한쪽은 조금 풀어지고, 한쪽이 점잖으면 한쪽은 살짝 수더분하다. 그래서 두 담 사이의 길도 딱딱하지 않다.

남원 예촌 건축물 실내 모습.
남원 예촌 건축물 실내 모습.

◆예(禮)가 예술(藝)이 되는 마을

이름부터 뜻이 깊다. 예촌은 예(禮)의 마을이자 예(藝)의 마을이다. 전통의 예가 예술로 피어나는 곳이라는 뜻을 담았다. 대지는 1만 1000여㎡에 이르지만, 건물이 그 땅을 꽉 채우지는 않는다. 지상 한 층짜리 한식 목구조 건물 열한 채와 부속 채들이 낮게 앉아 있고, 건폐율은 15.1%에 그친다. 그런데 한옥에서는 그 비움이 손해가 아니다. 마당이 있어야 바람이 들고, 사람이 앉고, 괜히 하늘도 한 번 올려다본다.

쓰임은 잠을 청하는 숙박 한옥, 연수와 세미나를 위한 다목적관, 관리동과 식당, 물 위에 띄운 정자로 나뉜다. 조용해야 할 숙박 한옥은 한 편에 모으고, 사람이 오가는 공간은 다른 편에 두었다. 그 사이를 사주문과 낮은 내담이 가르지만, 담이 길을 막는 것은 아니다. 영역의 성격을 살짝 나누어 줄 뿐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모든 채가 제 마당을 갖는다는 점이다. 채를 튼 ㅁ자와 ㄷ자로 앉혀 안마당, 곧 중정을 품게 했다. 마당은 한옥에서 방보다 큰 방이다. 비어 있기에 햇빛도 담고, 바람도 담고, 밤이면 조용히 내려앉는 어둠까지 담는다.

남원 예촌 부용정.
남원 예촌 부용정.

◆삼국에서 조선까지

예촌의 한옥은 한 시대의 것만 따라가지 않는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시대의 건축 어법을 한 단지 안에 모았다. 자칫하면 전통 건축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예촌에서는 생각보다 억지스럽지 않다. 건물들이 낮게 앉아 있고, 마당과 담이 사이를 눌러 주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못 위의 부용정이다. 백제의 하앙식 구조로 지어, 처마가 멀리 뻗고 정자가 물 위에 가볍게 떠 보인다. 곡선으로 흘러내린 처마의 선이 물에 비치면, 집은 한 번 더 그려진다. 한옥의 깊이는 꼭 넓이에서만 오지 않는다. 기단에 오르고, 대청마루에 다시 오르고, 누마루에서 한 번 더 오르는 작은 단차들이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시선의 높이를 바꾼다.

남원 예촌
남원 예촌

◆머물기 위한 한옥

예촌은 옛것을 살리되 불편까지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창호지의 약한 단열은 이중창과 전통 창호를 겹쳐 보완했고, 방에는 비단 침구와 민화, 다락의 이불을 들였다. 투숙객에게는 마패를 본뜬 열쇠를 쥐여 주고, 도착 시간에 맞춰 초롱불로 맞는다. 조금 쑥스럽지만, 여행지에서는 그런 연출도 나쁘지 않다.

이곳에는 건축사의 도면과 대목장의 손이 함께 있다. 한옥은 도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나무의 결을 보고, 흙을 바르고, 칠을 올리는 순간마다 장인의 판단과 시간이 스민다. 그래서 예촌에서는 누가 설계했는지만큼이나, 이 선을 누가 손으로 맞췄을까가 궁금해진다.

한옥은 박제가 아니다. 사람이 들어 자고, 불을 때고, 마루에 앉아 바람 소리를 듣는 동안에만 살아 있다. 남원이 스쳐 가는 도시였다면, 예촌은 그 스침을 한 번 붙잡아 앉히는 집이다. 길을 지우고 담을 들인 자리에서, 오늘은 조금 머물다 가도 좋다고 말하는 집이다.

한국지방신문협회 전북일보=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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