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부하들을 잃었다. 남은 건 패전의 상처를 깊게 입은 소수의 군사뿐이었다. 왕건은 부하들을 잃은 곳에서 멀지 않은 산에 올랐다. 패전했지만 왕을 살린 산이라 해, 훗날 이 산은 '왕산'이라 불리게 됐다.
머릿속에는 후회와 미안함, 두려움이 어지럽게 얽혔다. 시끄러운 속을 잠재우고자 왕건은 평평한 돌 위에 홀로 앉았다. 이 일화에서 '독좌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독좌암 아래 마을도 자연스레 '독암마을'이라 불리게 됐다.
부하들의 기지로 잠시 적을 따돌렸지만, 왕건에게 시간은 많지 않았다. 남은 이들의 목숨이라도 지켜야 했다. 바위에서 몸을 일으킨 왕건은 남은 부하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휴식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 부지런히 걸어야 견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아이들만 남은 마을
산을 벗어나 마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언제 적군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고, 주민들 역시 낯선 군사를 반길 처지가 아니었다. 왕건 일행은 눈에 띄지 않게 길을 골라 이동했을 것이다.
한참을 달리던 이들은 산 아래 마을의 풍경과 마주했다. 흔히 생각하는 마을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어른은 보이지 않고 어린아이들만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쟁은 군대끼리만 싸우는 일이 아니다. 민간인도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수 있었고, 적에게 식량이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마을을 불태우기도 했다.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은 마을을 버리고 도망쳤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아이들만 남았다고 한다. 그렇게 '늙은이가 없는 동네'라는 이름의 불로동 지명을 얻었다.
◆ 괴목나무 아래 닭
괴전동은 공예품 재료로 쓰이는 괴목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이후 송전동과 합쳐지면서 지금의 괴전동이 됐다. 영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곳도 왕건과 인연이 있다는 설이 있다.
괴전동은 과거 '괴은골', '괴동' 등 유사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중 눈길을 끄는 건 '계명동'이라는 별명이다. 닭 계(鷄)자를 써 괴목나무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은 팔공산을 빠져나와 이곳을 지나다가 새벽닭 울음소리를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온다는 신호였다. 왕건은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다시 길을 재촉했고,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해 이곳을 계명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 새벽 반달 아래서 안심
적군이 언제 들어 닥칠지 모르니 쉴 수가 없었다. 오랜 도주로 몸이 축축 늘어져도 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결국 밤을 새워 남동쪽으로 도망쳤다.
겨우 왕건은 숨을 고르고 하늘을 바라봤다. 새벽녘 하늘에는 반달이 걸려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도망쳤으니, 이제야 안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반야월과 안심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 홀로 남은 독좌암
도주로의 시작이던 독좌암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봉무정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위치는 지금과 달랐다. 과거에는 봉무정 아래 개천 남쪽에 있었지만, 도로가 들어서면서 북쪽으로 옮겨졌다.
사람 네댓 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평평한 바위였다. 표면에는 오랜 세월이 남긴 퇴적층의 줄무늬가 선명했다. 홀로 앉아 부하들을 생각했을 왕건 대신, 산을 뛰노는 고양이가 바위 위에 올라타 여유를 즐겼다. 긴박했을 피난의 이미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바위 주변으로는 봉무정 아래 개천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길을 따라 걸으면 농구장, 분수대가 있는 위남공원과 파크골프장 등 주민들을 위한 공간이 이어진다.
천 년 전 왕건이 목숨을 걸고 지나간 길은 이제 시민들의 평범한 산책길이 됐다. 전쟁의 함성은 사라졌지만, 그날의 흔적은 독좌암과 왕산, 불로동, 괴전동, 반야월, 안심이라는 이름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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