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롬에서 뮈르달까지 산악열차를
'너희들이 감내해온 나날의 태양이/ 오, 반쯤 입 벌린 석류들아./ 오만으로 시달림 받는 너희들로 하여금/ 홍옥의 칸막이를 찢게 했을지라도…'
며칠 전 작열하는 태양 아래 그 붉은 석류꽃을 본 곳은 어디였을까. 파계사였던가, 부인사였던가 어쩌면 동화사 산신각 앞이었을 수도. 그때 그 내리쬐는 뙤약볕을 온몸에 받으며 걸어다니다 계단 그늘에 앉았을 때 친구의 머리카락을 스쳐 불어오던 바람은 얼마나 시원했던가. 폴 발레리의 저 시가 무색해지도록 올 가을에 과육을 함빡 머금은 석류를 볼 수나 있을까 싶도록 이 여름은 뜨겁고 그 열기가 너무나 강렬하다. 덥다. 숨이 차도록 덥다. 이럴 때 나는 노르웨이 플롬에서 뮈르달까지 산악열차를 떠올린다.
5월 초, 이미 봄꽃이 풀밭에 가득한 것을 보고 떠나온 터였는데 플롬은 아직 겨울 끝자락이었다. 수많은 호수를 지나고 노르웨이 가족들 거의 가지고 있다는 빨간 지붕과 나무 벽이 앙징스러운 히테(별장, Hytte)들을 지나 플롬 역에서 산악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산이었다. 산은 단순히 눈으로 덮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계곡의 깊숙한 곳부터 능선을 향해 거대한 흰 물결처럼 이어진 눈이 산의 주름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봄의 햇살은 분명 챙하면서 따뜻했지만 산 위의 시간은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플롬 산악철도, 플롬스바나(Flåmsbana)는 이 겨울의 산을 향해 올라가는 기차다. 해발 약 2m 플롬의 낮은 계곡에서 출발해 뮈르달까지 약 20km를 달리며 860m 가까이 고도를 높이며 달려간다. 산악열차들이 흔히 그러하듯 짧은 거리 안에서 극적인 고도차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하늘과 산 그리고 마치 발 아래 놓인 듯한 까마득한 계곡과 풍경들로 사시사철 세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산악철도로 알려져 있다. 이윽고 기차가 출발하자 창밖 풍경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플롬의 작은 마을과 초원이 지나갔다. 피오르 가까이 자리한 집들의 지붕은 낮고 단정했다. 붉고 노란 목조 주택들이 초록 대지 위에 점점이 꽃무리처럼 지나갔다. 스치는 풍경이 모두 달력이나 그림 속에서 보던 진경이었다. 기차는 물가를 떠나 계곡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득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산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고 계곡은 좁아졌다. 기찻길 옆으로는 폭포가 나타났고, 바위틈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아래쪽 이른 봄을 지나던 기차가 고도를 높일수록 겨울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창 너머 눈도 점점 많아졌다. 우리는 계절을 거슬러 오르는 시간 열차에 탑승한 것이었다.
열차는 가파른 급경사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철길은 묵묵히 산허리를 휘돌고 터널을 통과하며 폭포와 절벽 사이를 지난다. 창밖으로 절벽이 나타날 때마다 승객들 환호성이 한꺼번에 터진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었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사진을 찍다가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산을 덮고 있는 방식, 멀리서 들려오는 폭포 소리, 기차가 철길을 밟을 때마다 차체를 타고 전해오는 미세한 진동, 그리고 창문을 사이에 두고 실내의 따뜻함과 바깥의 차가운 세계가 맞닿는 순간들, 핑계 같지만 어쩌면 여행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은 오히려 사진에 남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열차는 쇼스포센(Kjosfossen) 폭포에서 잠시 멈췄다. 눈과 얼음 사이에서 물줄기는 거대한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겨울이라면 얼음에 갇혔을 폭포가 5월 햇살 아래 몸을 드러낸 것이다. 그 폭포 가에서 붉은 옷을 입은 훌드라(정령, Huldra)가 시간이동을 하듯 몸을 숨기며 여기저기서 나타나 춤을 춘다. 실한 남성들을 유혹해 숲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란다. 열차는 다시 움직여 마침내 뮈르달을 향해 고도를 높였다. 플롬에서 보았던 초록빛 풍경은 사라지고 온통 흰색과 회색의 세계가 펼쳐졌다. 눈 위에 드문드문 드러난 바위와 침엽수, 그리고 멀리 이어지는 설산, 5월은 어느새 사라지고 황량한 겨울이 펼쳐졌다.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는 막연한 말이 이해되는 어느 순간이었다.
◆하르당에르비다 설원 그리고 아문센
하르당에르비다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고원지대로 공식 경관도로는 에이드피오르에서 하우가스퇼까지 67㎞에 걸쳐 이어진다. 고원과 피오르, 폭포가 한 여행길에서 있어 빙하와 호수, 운이 좋으면 야생 순록도 볼 수 있다고 한다. 5월 초였지만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 설원은 끝없이 펼쳐졌고 그 고요함과 희디흰 풍경에 우리의 탄성은 끝없이 이어졌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길게 난 스키 자국이 간혹 보일 뿐, 겨울이면 거센 바람과 찬 날씨에 눈과 얼음이 시야마저 지울 것이다, 갑자기 나는 그 희고 고요한 공간에 압도당하듯 숨이 컥 막혀왔다. 길을 벗어나면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기 어려울 공간이다. 그러다가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로알 아문센, 인류 역사상 남극에 최초로 도달했고, 비행기로 북극을 처음 횡단한 위대한 노르웨이 사람. 1896년 그가 극지로 향하기 전 훈련을 위해 스키 횡단을 하다 악천후를 만나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곳이 바로 이 고원이다. 우리도 이 낭만적인 설원에서 며칠전 내린 폭설로 여정을 변경해야만 했다.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헨리크 입센의 시극 '페르귄트'를 작곡한 에드바르 그리그가 오래 묵었던 포슬리 호텔을 길이 막혀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훗날 아문센은 북서항로를 개척했고 1911년에는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아문센의 그 위대한 탐험 출발점에서의 실패와 뵈링폭포 인근 우리의 길 막힘이 더 큰 도약을 위한 실패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 뜨거운 대구의 한낮, 햇빛이 창을 뜨겁게 달구면 서늘한 바람과 누군가 그리그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으로 켠 솔베이지의 노래와 하얗게 펼쳐졌던 설원에서의 눈싸움도 떠올리며 이 폭염도 그때처럼 긍정적으로 견뎌보기로 한다.
◆피오르에는 신이 산다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알게 된 것은 산이 반드시 인간을 가로막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산은 때때로 길을 만든다. 다만 인간이 생각하는 길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말이다. 수천만 년 시간이 흐르고, 수없이 많은 빙하기가 찾아오고, 산 위에 내려앉은 눈이 얼음으로 변해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산을 깎아냈다. 단단한 암석을 밀어내고 긁어내며 계곡을 깊게 파고 넓혔다. 그리고 빙하가 물러간 자리에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이 피오르였다.
노르웨이 서부의 피오르는 인간이 만든 도로가 아니라 빙하가 만든 시간의 길이다. 나는 그 길을 페리호를 타고 들어갔다. 육지에서 바라볼 때 피오르는 하나의 거대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배를 타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풍경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산은 더 높아졌고, 물은 더 깊어졌으며, 인간이 사는 마을은 놀라울 만큼 작아졌다. 그때 다시 나는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송네 피오르는 길이가 약 205km에 이르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긴 피오르이며, 게이랑에르 피오르는 한 편의 서정시 같았다. 내륙 깊숙이 파고든 거대한 물의 통로는 때로 해수면 아래 1천 m가 훨씬 넘는 깊이에 이르고, 깊고 좁은 U자형 골짜기로 빙하가 녹고 후퇴한 뒤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이 장엄한 피오르들이 된 것이다. 페리에서 코끝이 시려도 나는 눈 덮인 봉우리와 깊은 물빛,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한꺼번에 보기 위해 갑판에 내내 서 있었다. 그 때 아마도 나는 자연과 시간이라는 신(神) 앞에 나름의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기억으로 올 폭염도 긍정적으로 보내볼 작정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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