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8년 봄, 프랑스의 들판은 바짝 메말랐다. 초여름까지 가뭄이 이어졌고, 7월에는 우박이 작물을 덮쳤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에는 혹한까지 들이닥쳤다. 한 연구에 따르면 그해 프랑스의 곡물 수확량이 이전 평균보다 35~40%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흉작은 곧바로 빵값 상승을 낳았다. 당시 하층민들은 소득의 절반을 빵과 밀가루에 사용할 정도였는데, 이듬해 상반기에 그 비율이 85% 이상으로 치솟았다고 전해진다. 공교롭게도 곡물 가격이 정점에 이른 시점은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당한 1789년 7월 14일 무렵이었다. 바로, 프랑스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때다.
물론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날씨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절대왕정은 이미 재정 위기 상태였고, 미국 독립 전쟁 참전 비용에 대한 부담도 컸다. 불평등한 조세 제도와 성직자·귀족의 특권에 대한 불만과 부르주아 계층의 성장, 기존 질서를 흔든 계몽주의까지 더해졌다. 1788년의 흉작은 마른 장작 위에 떨어진 불씨와도 같았다. 비슷한 현상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에서도 나타났다. 14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북반구를 중심으로 이전보다 추운 시기가 되풀이된, 이른바 '소빙하기(Little Ice Age)'다. 이는 지구 전체가 수백 년간 계속 얼어붙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시기마다 강도와 양상이 달랐다. 그 비대칭성이 역사를 갈랐다.
17세기 명나라 말, 북중국에는 대규모 가뭄이 이어졌다. 반면 같은 시기 만주족의 근거지였던 중국 동북부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환경을 유지했다. 한쪽에선 흉작과 기근, 늘어난 조세 부담이 농민 반란을 더욱 격화시켰고, 다른 한쪽에선 후금이 성장해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꿨다. 그해 겨울 청이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당시 전쟁의 직접 원인은 조선과 청의 정치·외교·군사적 충돌이었다. 다만 북중국의 기후 충격이 명을 흔들고 만주 세력을 키운 흐름까지 함께 보면, 기후는 동아시아 세력 균형을 바꾼 하나의 조건이었다.
프랑스혁명과 명·청 교체, 병자호란. 시대도 대륙도 다른 이 사건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비슷한 양상이 드러난다. 기후 이상은 농업 생산을 줄이고 식량 가격을 끌어올렸다. 생계비가 오르면서 실질 소득이 떨어졌고, 빈곤과 유민으로 사회 갈등이 커졌다. 기근과 질병도 뒤따랐다. 기후 충격은 이미 취약했던 국가의 재정과 행정, 군사 능력에 부담을 줬다. 기후변화는 이미 그 사회가 안고 있던 취약성을 드러냈다. 폭염과 가뭄은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에게 다르게 닥치고, 홍수에 어느 국가는 견디고 어느 국가는 무너졌다. 기후는 자연현상이지만, 그 피해의 크기를 결정한 것은 결국 사회와 정치였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지난 8월 26일 네팔과 중국 티베트 접경 지대에서 거대한 빙하와 암반이 무너지면서 물과 토사가 하류를 덮쳤다. 4천 명 이상이 실종된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온난화로 히말라야의 빙하가 후퇴하고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붕괴 위험을 높였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국가의 내구성'이다. 폭염·폭우가 잦아지고, 강한 태풍의 위험도 커진 상황에서 재난 대응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빙하기가 남긴 교훈은 기후 충격이 어떤 사회를 만나느냐가 중요했다는 점이다. 재정과 행정,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사회에선 정치·사회적 위기로 증폭됐다. 국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기후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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