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화-전성희

"엄마, 우연이가 비디오에다 밥 집어 넣었어요!""아니, 뭐야!"

설거지를 하시다가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오는 엄마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아니, 얘가… 이걸 어쩌지…"

엄마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광경에 그만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버렸습니다. 우연이는 제 깐에도 뭐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는지 겁먹은 표정으로 엄마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엄마, 띠띠 맘마."

세살짜리 우연이는 비디오를 늘 띠띠라고 불렀습니다.

"띠띠 배고프대."

"도연이 너는 뭐하고 있었어? 형이 이런 것 하나 못말려?"

도연이는 못들은 척하고 만화만 보고 있었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은 거지요. 우연이가 말썽을 일으킬 때면, 속이 상한 엄마의 무서운 눈길은 애꿎은 도연이에게로 향하고는 했으니까요. 그러는 엄마가 도연이는 밉기만 했습니다. '내가 그러라고 시켰나, 뭐? 엄만,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겁이 난 우연이는 엄마한테 혼이 날까봐, 아예 엄마한테 뛰어가서 엄마를 냉큼 안아버립니다. 그리고는 평소에 엄마가 좋아하던 온갖 애교를 다 부리는겁니다. 도연이는 우연이의 그런 모습도 또한 얄밉기만 합니다. 괜히 나까지혼나게 만들고서 저는 엄마한테 귀여움만 받으려고 하니까요.어쨌든 우연이가 태어난 이후로 도연이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우선, 할머니, 할아버지만 해도, 도연이 앞에서는 "역시 도영이가형이니까 다르구나. 우리 도연이 참 잘하네!"하면서 칭찬을 하지만, 그래도역시 우연이를 더 귀여워하신다는 것을 도연이는 잘 알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엄마와 할머니가 전화하는 것을 들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이 얘기만 하시지 뭐에요! 우연이가 밤에도 오줌을 전혀 안싼다는등, 전화도 잘 받고 기억력도 좋다는 등… 도연이가 보기에는 너무나 시시한 것들을 가지고어른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이 도연이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물론 우연이가 매일 미운 것만은 또 아니었지요. 우선, 우연이는 먹을 것이생기면 제일먼저 도연이에게 가져오고는 했습니다. 물을 가져오라든가, 뭘제자리에 갖다 놓으라든가 하는 도연이의 심부름도 곧잘 하였구요. 무엇보다도, 우연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도연이에게 그토록 자기 동생 자랑을 하던 정준이 앞에서 이제는 기가 죽지 않아도 되는 것이 도연이는 제일 기분 좋았습니다.

참, 그 정준이 때문에 도연이는 요즈음 새로운 고민이 생겼습니다.얼마 전에 도연이와 정준이는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그때 큰 형들이 와서 공을 빼앗아가지 뭐예요! 공 주인인 도연이는 울상이되었습니다.

"혀엉! 내 공 줘!"

"짜식들, 거 되게 보채네. 잠깐 놀다가 주겠다니까. 야, 너희들 일 학년이지? 우린 5학년이란 말이야. 니네 우리한테 혼 좀 나볼래?"어쩔 수 없이 두 아이는 운동장 한 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칫, 순 엉터리야"

"네 동생 우연이하고 똑 같다.. 뭐."

"뭐야?"

"니 동생도 같이 놀다가 심술이 나면 공이든 장난감이든 전부 가져가서 안주잖아"

"우연이는 아직 어리니까 그렇지."

"내 동생은 안 그래"

"니 동생은 우연이 보다 한 살 더 많잖아"

"내 동생은 세 살 때도 안 그랬어"

"이게, 정말…"

도연이는 약이 올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우리 우연이는 이빨이 열 여섯 개나 된다!"

"칫, 내 동생은 옛날옛날부터 그렇게 이빨이 많았다구! 그리고 자전거도 얼마나 잘 타는데!"

"우연이도 자전거 잘 탄다"

"지난 번에 보니까 하나도 못타더라"

"지금은 잘 타!"

"그럼 우리 시합할까?"

"좋아!"

"그럼 이번 일요일에 이 운동장에서 내 동생 정우랑 우연이랑 자전거 시합하기다!"

오늘은 목요일. 이제 일요일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준이 앞에서는악을 쓰다시피하면서 우겨대기는 했지만 도연이의 마음은 사실 편치가 않았습니다. 아빠가 우연이에게 세발자전거를 사주신지는 꽤 되었지만 어쩐지우연이는 그 자전거를 타려고 들지를 않았습니다. 기껏 탄다고 해봐야 페달없는 장난감 자동차를 타듯이 발로 밀고다니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도연이는 마음이 점점 더 불안해졌습니다.

엄마는 어느새 방을 치워 놓으셨고, 우연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한가운데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우연아, 형이랑 나가서 놀자"

우연이는 귀가 번쩍 뜨이는가 봅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따라나가려 해도 한사코 떼어 놓고 나가던 형이 오늘은 같이 놀아주겠다는 겁니다!우연이는 어느새 쪼르르 현관으로 나가서 제 신발을 찾아 신습니다."엄마, 우연이랑 복도에서 놀다 올께요"

"아니, 웬 일이냐? 네가 우연이를 다 데리고 나가게"

"나 혼자 가면 우연이가 심심하잖아요"

도연이는 현관문을 닫자마자, 복도에 세워져 있는 우연이의 자전거를 끌고옵니다. 하지만 우연이는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습니다."우연아, 아냐, 오늘은 놀이터에 가는 거 아냐. 형아랑 자전거 타자"그냥 밖으로 나온 것만도 기분이 좋았던 우연이는 순순히 도연이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발을 끌면서 타는 것이었습니다."아냐, 아냐, 우연아, 형이 하는 것 잘 봐봐"

도연이는 우연이가 잘 볼 수 있도록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돌려보였습니다."아하!…"하면서 우연이는 제법 알아들었다는 듯이 말했습니다."그래, 이제 알겠지? 자, 타봐!"

얼른 자전거에 올라 앉은 우연이는 하지만 이번에도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없었습니다.

"야, 이 바보야, 그게 아니라니까!"

그런데도 우연이는 그렇게 화를 내는 도연이의 모습이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깔깔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뭐가 우스워!"하면서 도연이는 우연이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습니다. 우연이는 아파트 전체가 떠나가라고 울어댔습니다.

"뚝!"

또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무서워, 도연이는 얼른 우연이를 달래보았지만우연이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에잇, 속상해. 그럼 자, 이거!"하면서 도연이는 바지 주머니 깊숙이 넣어두고 아끼던 마지막 사탕 하나를 꺼내 우연이에게 내밀었습니다. 눈에 눈물이가득한 채로 우연이는 어느새 깔깔거리며 형을 바라보았습니다."자, 우연아, 발을 여기에다 놓고…"하면서 도연이는 다시 한번 우연이의 발을 페달 위에 올려놔주었습니다. "거기에다 힘을 주고 밀어봐"우연이는 형이 가르쳐준대로 흉내를 내보기는 했지만 자전거는 꼼짝도 하지않았습니다. 답답해진 우연이는 다시 먼저번처럼 다리를 땅에다 대고 밀면서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약속한 일요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도연이는 할수없이 우연이의 손을 잡고 아파트 입구로 나가보았습니다. 정준이와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정준이는 동생 정우와함께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풀이 죽은 도연이가 정준이에게로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준이 역시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자, 가자"

"그런데, 도연아…"

"왜?"

"어제 누가 정우 자전거를 훔쳐갔단 말이야"

"뭐야?"

도연이는 속으로 너무나 좋아서 금방이라도 마악 웃고 싶었습니다."그럼, 시합 못하겠네?"

"에잇, 누가 가져갔담!"

"형아야, 여기에도 자전거 있다"하면서 정우가 어디에선가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도연이와 정준이가 그곳으로 가보니 오래전부터 경비실 근처에서 굴러다니던 자전거였습니다. 정준이는 다시 얼굴이 밝아졌습니다."됐다. 다 쓰고 나서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되지, 뭐"

"남의 것을 가져가면 어떻게 하니?"

"주인도 없는 것 같은데 뭘. 그리고 누가 이걸 가져간댔어? 시합 끝나고 다시 갖다 놓으면 되잖아"

할수 없이 도연이는 운동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시합이 끝난후에 정준이에게 놀림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도연이는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그런데, 막상 시합을 하려고 보니, 정우가 가져 온 자전거는 페달이 낡아서겉의 것은 떨어져나가고 속의 것만 남아 있었습니다. 정준이는 다소 낭패한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시합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연이로서는너무나 신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속 알맹이만 남은 정우의 페달은자꾸만 발이 미끄러져 나가 몇번씩이나 헛발질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시합을 하는 건지 어떤 건지도 모르는 우연이는 넓은 운동장에 온 것이 마냥좋기만 하여 열심히 발을 땅에다 대고 밀면서 앞으로 나가고만 있었습니다.누가 이겼을까요?

집에 돌아오면서 도연이는 오늘 아침 아빠한테 받은 일주일치 용돈 3백원을톡톡 털어, 우연이가 평소에 그토록 좋아하던 아이스를 사주었답니다.그리고는 정준이에게 혼이 나서 풀이 죽어있는 정우에게도 하나를 사주었습니다. 운이 좋아서 우연이가 시합에서 이겨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도연이는 웬지 우연이와 정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정준이는 화가난 얼굴로 옆에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도연이는 다소 겸연쩍은 표정으로정준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정준아… 우연이는 자전거 아직 잘 못탄다, 그치?"

"……"

"정우가 더 잘 타는데, 그치?"

"……"

"우리 집에 가서 동생들하고 병원놀이 할까?"

"그래 가자!"하고 정우가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정준이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도연이의 발걸음이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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