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육상이 1930년대부터 전국무대를 휩쓸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시민대운동회의 역할이 컸다.1911년 최초의 시민운동회가 달성공원에서 열린 이후 각급 학교별로 운동회가 개최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개입으로 범시민적인 운동회의 열기는 점차식어갔다.
간이회와 대구청년회 등 우리 민간단체들이 주관해오던 시민대운동회를1924년부터 일본인 경영의 조선민보사가 주최, 일본인들이 대거 참가하면서우리 민족만의 축제가 되기는 어려워진 때문.
시민대운동회가 다시 지역최대의 축제마당이 된 것은 1927년에 이르러서였다.
우리민족주도의 운동회가 필요하다고 느낀 민족지사들이 뜻을 모아 대구운동협회를 중심으로 이해 4월말에 제1회대구춘계대운동회라는 이름으로 시민운동회를 개최한 것.
이때까지 보급단계에 있던 육상은 이후 대운동회를 거치며 실력이 급성장,각종 전국대회에서 정상권을 휩쓸기 시작했다.
대회를 주관한 대구운동협회는 1922년 조직된 민족단체였다.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체육기관의 양성이 시급하다는 인식이일어나면서 1920년 조선체육회가 조직됐다.
이후 각지방마다 체육단체 조직에 박차를 가해 대구에서도 박기돈 서상일엄성문 윤용기 양규식 등이 뜻을 모아 달성공원 입구 조양회관에 간판을내걸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구 경북체육회의 모태라 할수 있다.1927년 4월29일 제1회 춘계대운동회가 열린 대구는 온통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상가는 철시했고 관공서도 한국인 자리는 텅 비었다.
운동회를 보기 위해 달성공원을 찾은 관중은 1만이 훨씬 넘었다.당시 대구의 한국인 가구수가 2만1천정도였으니 두집에 한명꼴로 운동회장을 찾은 셈.
이경철씨(72·전 영남고교사)는 "선배들에 따르면 인파가 얼마나 몰렸는지관람석의 둑이 무너져내려앉아 주최측 간부들은 점심도 못먹고 둑을 보수했다고 합니다·트랙바깥쪽에 쳐둔 새끼줄이 떠밀린 관중들로 인해 몇번이나끊겨 경기중단소동도 몇차례 빚었고요"라고 전한다.
대운동회는 청년부 중학부 소학부로 나누어 진행됐는데 대구의 학교는 모두 참가했다.
경기종목은 40여개로 대부분 육상경기였는데 그중 트랙경기가 관중들에게대인기였다.
트랙부는 1백m, 2백m, 4백m, 8백m, 1천5백m의 경기가 있었고 이해 운동회부터 마라톤도 생겨났다.
마라톤은 달성공원에서 대구역을 왕복하는 8리경주로 이날 입장못한 시민들이 연도에 길게 늘어서서 구경을 했다.
40년대 장거리 전국최강을 구가한 이경철씨의 설명이다.
"마라톤이라고 해야 지금의 단축마라톤 10km의 3분의 1이었지만 대구최초로 열린 공식경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달성공원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시민들에게는 대단한 구경거리였고 이후부터는 아예 최고인기종목이 됐지요"5종경기도 있었는데 지금과는 전혀 달리 2백50m, 주산, 암산, 속기, 제등의5종목으로 트랙을 돌면서 주어진 문제를 다 풀어야 하는 경기였다.필드에는 원반 포탄 주폭도(넓이뛰기) 주고도(높이뛰기) 투창 재봉경주 등의 경기가 벌어졌다.
재봉경주는 여중생들의 종목으로 3명이 한팀이 돼 버선 저고리 등을 뛰면서 꿰어맞추는 경기로 여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출전하고 싶어했다.이날 단연 관중들의 주목을 끈 것은 2백m경주에서 우승한 최세원씨였다.원래 야구선수로 계성에서 활약하던 최씨는 이영민 백기주 김극민 김용준씨와 함께 배재학원으로 스카우트됐다.
당시는 야구 농구 등 다른종목 선수가운데 주력이 좋은 선수가 육상에도 참가했고 배재로 스카우트된 지역선수들 대부분이 20년대 후반과 30년대초 전국육상무대에서 맹위를 떨쳤다.
배재재학중 평양철도국팀에 입단, 경성 평양 등지에서 맹활약하던 최씨역시 육상 단거리에서 빼어난 자질을 보였다.
춘기운동회를 맞아 대구로 내려와 대회에 참가한 최씨는 대구청년회 야구팀의 1번 타자로도 활약했다.
야구에서 닦은 주력을 맘껏 발휘한 그는 정확한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다른 선수들보다 20m나 앞서 골인, 관중들이 "타조가 나타났다"고 외칠 정도로빨랐다는 것.
이밖에도 서팔룡 김목탁 최인호 이학수 강우암 등의 강자들이 트랙경기에서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이 바로 30년대 향토육상을 전국정상권으로 끌어올린 주역들.춘계대운동회가 27년 1회대회 이후 연례행사로 자리잡자 지역에서 육상붐이 일기 시작했다.
학교마다 육상열이 높아져 다투어 육상연습에 몰두했고 학교대항전도 치열하게 진행됐다.
정규수업 5시간을 마친 학생들은 특활시간에 취미종목부에서 연습을 했는데 그중 육상이 최고 인기였다.
이후로도 시민대축제로 계속된 춘계대운동회는 30년대 후반까지 그야말로육상발전의 요람이 됐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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