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녹색시대...마지막선택-사막의 남진이 유적 훼손막아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흔히 볼수 있는것 중의 하나가 구호다. 이런 구호는때로는 가슴을 섬뜩하게도 하고 절실하게도 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구호는농촌으로 갈수록 눈에 많이 띈다. 담벼락에 붉은글씨로 가지런히 다듬어 쓴구호들은 대부분 이념적인 뜻이 많고 잘살기위한 독려의 내용이 주종을 이루지만 간혹 환경과 관련지울수 있는 내용도 있다. '수토보지 인인유책'. 물과 땅을 지키는 책임은 모두 사람에게 있음을 강조한 글귀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런 글귀가 환경을 지키는 역할도 해내고 있음을 벽구호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뜻의 벽구호는서역지방일수록 더욱 극성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열악한 환경조건임을 극명하게 드러낸 구호다.유원은 조그마한 역이었다. 투루판을 출발한지 꼭 18시간만에 도착했다. 세계적인 유적 돈황의 길목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해 보인다. 외국관광객들의 내왕이 빈번한 곳이지만 이에대한 편의시설은 별로 없다. 서역을 탈출한듯한 느낌이지만 여전히 서역의 기운은 살아있다. 바람이며 황량한 땅과 검게 타버린듯한 야트막한 산들. 끝없이 이어지는 고비. 환경은 메마를대로 메말라 더 이상마를것이 없는듯한 인상이다. 다만 사람들은 개방의 물결에 따라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그러나 환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듯이 보였다.유원에서 돈황까지는 약 2시간 거리. 차편이 없다. 버스는 손님이 차야 간다고 배짱이다. 경찰까지 동원했지만 허사였다. 이 지역에 한대 뿐이라는 대우의프린스가 지나가길래 반갑게 세웠으나 공무차량이라서 낮에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국산차를 이런곳에서 만나다니. 프린스를 본후 한결 지친 심신이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난주로 가는 트럭이 한창 수리중이었다. 인민폐 300원에 흥정이 이뤄졌다.매우 조심하는 눈치다. 유원~돈황길 사이의 고비는 다른곳에 비해 특이하다.전부가 검다. 검은 고비. 처음에는 석탄으로 이뤄진 산인것 같았다. 이런곳에사는 낙타는 검은 낙타뿐일것이라는 농담까지 했다. 왜 검을까? 난주의 전자회사에 근무한다는 운전사위씨는 "옛날에는 이곳이 전부 숲이었다고 들었어요"그리고는 "옛날에는…" 하고 여러번 숲의 시절이 옛날이었음을 강조했다. 운전사의 그 옛날이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매우 어렵겠지만 이런것이 고비화 또는사막화의 결과임은 뻔한 일이다.

정말 검은 길의 연속이다. 간간이 오아시스 마을이 보이지만 사람이 사는것같지는 않다. 이 일대도 실크로드의 번영이 한창일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간혹 보이는 낙타는 검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낙타의 원산지는 북아메리카의네브라스카라는 설이 있다. 2만년전 거기서 베링해협을 통해 이동한 낙타는 기원전 5세기경 아라비아사막을 거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옛날에는 하루주행속도가 40~50㎞는 거뜬했다지만 요즘의 낙타는 겨우 30㎞ 안팎으로 떨어져있다. 이것도 사막길을 횡단할 필요가 없는 환경의 변화 때문일것이다. 마치인간이 각종 공해로 체력이 떨어져있는것과 흡사하다. 한서에 서역 넓이는 동서 6천리, 남북 4천리로 기록돼있다. 이 길에 과연 낙타가 갈수 있는 길이 지금은 얼마나 될까. 별로 없다.

한가지 덧붙일 일은 이 길을 달리다 보면 특히 아득한 산자락 아래로 아른거리는 강물인것 같기도 하고 호수같기도 한 신기루가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다.신기루를 이곳 사람들은 해시신루라고 한다. 다가가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어느틈에 또다시 생기는 신기루. 신기루는 사하라나 아라비아사막 같은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사막에만 있는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서도 있었다.돈황. 인구 2만을 조금 웃도는 오아시스 도시. 그러나 원래의 돈황은 지금의자리가 아니다. 사막의 남진으로 지금보다 훨씬 위쪽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중국사람들이 서역으로 가는 문호구실을 한 곳이다. BC 2세기에 이미 번성했으며육조이후 사주라고 불렸으니 모래바람이 불어온 역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막화의 진행역사가 꽤 오래되었다는 증거다. 무서운변화다. 이런 변화가 비단 이곳에만 해당되지는 않지만 돈황의 사막화는 엄청난 역사적 아이러니를 주고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것은 만약 이곳에 사막화의 진행이 없었다면오늘의 위대한 석굴 돈황은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많은 학자들은 사막화의 덕분에 돈황이 이렇게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심하게는 사막화가 인류를 못살게 굴지만 유일하게돈황은 사막화로 살아 남을수 있었다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에도 양면성은 어쩔수가 없다. 이 양면성은그러나 돈황이 유일하다면 문제다. 환경의 이같은 양면성을 인류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도 오늘에 던져진 과제다.

승려 낙존이 366년 처음으로 불감을 만들었다는 막고굴은 돈황시가지에서 십여리 떨어져 그리 멀지않다. 높이 약 5m 안팎에 남북으로 약 2㎞나 뻗은 굴 마다의 벽화들은 1300년간을 사막에서 버티다 세상에 다시 나왔다. 제17굴. 장경동으로도 불리는 이 굴에서 우리의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수만권의 서적들이 나왔다. 마치 벌집같은 형상의 굴들이 고스란히 잠자다 이제햇빛을 보니 다시 그 보존이 문제다. 사진도 못 찍게 한다.아직도 한 쪽은 발굴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출입이 금지돼 있다. 그 뒤로 아득한 사막화 일보직전의 산들이 모래를 주르르 흘리며 줄지어 서있다. 막고굴은 사막의 역설이 그대로 숨쉬는 유일한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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