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말 이수광에서부터 연원이 마련된 실학은 유형원을 거쳐 1백년이 지나면서 연구방법의 주안점에 따라 경세치용(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이용후생)학파가 생겨날 정도로 세력을 확보, 뚜렷한 모습을 드러낸다.당시 집권 사대부층의집권명분론으로 전락한 주자학에 반기, 사회개혁으로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점에서는 두 학파 모두 목표가 같았으나 시대가 한세대 앞선 경세치용학파가 파탄일로의 농촌사회 구제에 비중을 둔 반면 이용후생학파는 도시민의 입장을 대변해 상업이나 수공업을 활성화함으로써 부국강병을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려시대의 대문호 이규보(이규보), 조선중기의 대유학자 이언적(이언적)과함께 여주(여주) 이씨의3대거봉으로 존칭되는 성호(성호) 이익(이익, 1681 ~1763)은 경세치용학파의 태두로 맹아기에 뒤이은 성숙기의 실학을 집대성하고이를 바탕으로 역사학자 안정복(안정복) 지리학자 이중환(이중환)등 각 분야에서 요즘말로 하면 보다 전문화된 후학을 배출해실학의 세분화, 다양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숙종때 사헌부대사간을 지낸 하진(하진)의 9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성호는 아버지가 경신대출척의 당쟁에 말려 유배지에서 숨지고 26세때엔 그에게 글을 가르친 둘째형 잠(잠)이 장희빈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죽게되자 일찍부터 벼슬길을 포기하고 성호(성호)라는 호수가 있는 고향 경기도 안산(첨성리)에 정착, 직접 농사를 지으며 그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성호사설'(성호사설) 정치, 경제, 사회걔혁론을 설파한 '곽우록'(곽우록)을 지어새로운 국가사회질서 개편을 역설했다.
성호시대 이전부터 맹아기 실학자들이 토지의 균분을 실학의 핵심과제로 삼고 이의 실현을 주창했으나 집권사대부의 반대로 농지는 갈수록 권세가나 부호층의 소유로 편중,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은 심화되고 유리걸식하는 농민은더욱 늘어났다.
더욱이 당쟁을 틈타 날뛰는 지방 관아의 착취와 호족들의 횡포는 자영 소농민들을 궁지로 몰아붙여 '부유한 사람의 땅은 넓게 펼쳐져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송곳 세울
땅도 없다. 아홉집이 파산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라면 겨우 한집만이 살아가고 있다'(균일론)고 할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
또 당시 대동법(대동법)의 전면적 실시와 이앙법(이앙법)등 농업기술의 발전은 농산물의 생산을 증가, 농산물의 상품화를 가속화하면서 화폐의 유통촉진을가져왔으며 화폐유통의 일반화는 소지주농민의 몰락을 부추겼다.농촌에 살면서 이러한 현실을 직접 목도한 성호는 백성의 80%가 넘는 자영소농과 소작농의 보호를 경세치용의 우선으로 삼고 이의 해결책으로 새로운 한전법(한전법)의 실시를 주창했다.
반계 유형원의 균전법을 계승해 당시대에 맞게개선한 한전법은 한 농가의기본토지를 1결(결)로 하고, 그 땅을 매매할 수 없는 영업전(영업전)으로 한다면 농민들은 농토를 보전하고 대지주는 영업전의 한도이상은 차차 팔게되어 토지를 고루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 주요골자이다.
그리고 요즈음의 토지매매 신고제처럼 일체의 전지매매는 관청에 신고토록한다면 부자의 땅을 강제로 뺏지 않고도 세월이 흐르면 자연 농지점유는 균등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호는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는 십일세법(십일세법)의 원칙을 엄격히 지켜 족징(족징), 인징(인징), 백골징포(백골징포), 수포방번(수포방번)등 과다징수남징을 근절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다.성호가 역설한 이 토지개혁론은 모든 농지를 국유화, 사회계급에 따라 일정비율로 농지를 나누자고 주장한 반계 유형원의 균전론(균전론)보다 실현성이높은 탁견이었다.
성호자신도 자신의 개혁론에 만족했던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토지균분문제를 일찍부터 생각하여 마침내 한 방도를 생각해냈다. 이법을 실시한다면 가난한사람은 물론이고 자손의 가산유지를 걱정하는 부자들도 후대에 집안이 몰락해도 생명을 유지할 영업전은 남게 될 것이니 찬성할 것이다"
인간생활 영위의 기본인 식량을 공급하는 농업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재화는 땅에서 나는 것이나 사람의 노동력에 의해서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철저한 농본주의자였던 성호는 그 때문에 당시 점차활발해지는 상업활동을 억제하고 화폐의 사용을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오늘날의 행전(행전)은 백년이 되지 않았는데 점점 얄팍하고 작아져서 최초의 것보다 절반이나 가벼워졌다… 사치에 편리한 것이 돈만한 것이 없다… 관리가 탐학하기도 편리하고 고리대이용에도 편리하다… 돈이 유통되고 나서 백성들이 더욱 곤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업활동에 대해서는 "상업이 성하면 전지와 호미를 버리고 장사하는자가 늘 것이니 상업을 억제하지않으면 그 해가 농업에 미칠 것이다"고 걱정하고 관아에서 20, 30리 안에 시장이 중첩해서 열리지 않도록 시장을 줄여야할 것이라고 했다.
성호의 상업활동 억제와 화폐폐지론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다분히 시대역행적인 사상으로 규탄받아 마땅하겠지만 당시의 화폐는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절반밖에 안돼 백성수탈의 도구로 이용되고 실제 농민의 토지이탈을 촉진시켰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히 고루하다고만 할 수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석종교수(영남대 국사학과)는 "성호의 현실에 밀착된 실사구시적 독창성은여타 실학자들이 미치지못하는 부분이 많다"고 말하고 서구 중농주의(중농주의) 초기학자 보아큐베르도 화폐에 대해 성호와 같은 주장을 했다고 밝혔다.글·최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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