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 스물네살때 지금의 남편과 중매결혼을 했다. 시부모님은 남편이 어릴때 돌아가셨고 위로 누님 두분과 형님 한분은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은변변한 직장도 없었고 가진 재산도 없었다. 곧 무너져 내릴것같은 세모진 방한칸에서 우리의 신혼살림이 시작됐다.술과 노름을 좋아했던 남편은 대낮에도 술에 취해 집으로 와서는 잠들기전까지 술을 찾았다. 먹을 것도 없는 집에 술이 있을리 없었다. 돈이 없어 술을 못사오겠다고 하면 남편은몽둥이를 들고 장독이든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부숴버렸다.
그때는 남편이 얼마나 겁이 나든지 술을 사오라고 하면 무조건 밖으로 나왔다. 밤이 되어 남편이 잠들때까지 무작정 거리를 걸어다녔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아픈 다리를 끌고 집에 들어오면 남편은 코를 골며 자고 있고 술냄새가 온방에 가득차 있었다.
매일 이런 생활이 계속됐고 그때마다 결혼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엔 이혼이란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하루에도 수십번 일어났다.
첫아이를 가졌을때 먹을 것이 없어 배가 너무 고팠다. 남편만 믿고 기다릴수 없어 일을 찾아나섰다. 온종일 밭에서 일해주고 하루 품삯을 받아와 겨우끼니를 이어갔다. 며칠만에 집에한번씩 들어오는 남편은 출산때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집사람의 도움으로 순산하기는 했지만 남편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틀을 옆집사람이 먹을 것을 마련해주었고 삼일째 되던 날 남편이 돌아왔다.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오히려 딸을 낳았다고 투덜대기만 했다.
아이를 낳고 일주일후에 물지게를 지는 고통속에서도 남편이 한동안은 술도조금 마시고 집에도 매일 들어오길래 이제는 마음을 잡았나 싶어 다행으로 생각했는데 결국 그 버릇을 못버리는것 같았다. 아이때문인지 행패는 덜 부렸지만 옆집사람 보기에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먹고 살려면 다시 일을 찾아야했다. 친정어머니가 마음아파하실까봐 내 모든생활을 숨기고 살았지만 아이와 살기위해선 결국 친정을 찾아갔다. 사정이야기를 하고 약간의 돈을 얻어왔다. 백일도 안된 아이를 업고 행상에 나섰다. 옥수수, 번데기, 채소로 바꿔가면서 닥치는대로 장사를 시작했다.뜨거운 여름날 행상을 하다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 젖이 너무 뜨거워서인지아이가 설사를 하고 계속 보채기만 했다. 그래도 남편이란 사람은 빈둥빈둥 놀면서 술만 마셨고 나한테서 돈을 뺏아가지 않으면 다행으로 생각했다. 행상으로 겨우 끼니만 이어갈 정도였으므로 둘째 아이를 낳고도 먹을 것이 없어 국수로 일주일을 버텼다. 그때 네살된 딸은 국수가 질렸던지 구역질을 하며 밥을달라고 울어댔다. 하는수없이 주인집에가서 찬밥을 조금 얻어와 아이에게 먹였다.
셋째딸을 낳기전에는 그전에 당했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산달이 됐을때 미리 얼마간의 쌀과 호박을 사두었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내 술값도안주면서 지몸은 어지간히도 챙긴다"며 비아냥거리고는 그 쌀을 팔아 술값으로써버렸다.
더이상 남편을 원망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고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데도없었다. 저렇게무책임하고 원수같은 남편이 그저 내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하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어느해 그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10살, 7살, 4살의 세딸을 남겨둔채 집을나가 영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속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운정이 들었는지 날이 갈수록 어디서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하루라도 장사를 나가지 않으면 당장 먹을 것이 없는 형편이라 찾아볼 여유가없었을뿐만 아니라 어디 찾아볼만한 데도 없어 더욱 안타까웠다.결혼한후 10년동안 집에 들어온 횟수로는 약 2년, 남편한테서 받아본 돈이모두 30만원정도. 이로써 나와 남편사이의 모든 관계는 끝이 났다.어린 세딸과 살아가기위해서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날 팔물건을 떼기위해 새벽일찍 일어나 아이들이 먹을 저녁밥까지 지어놓고 장사를나가면 저녁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날밤이었던가, 엄마의 얼굴을 잘보지 못하는 세딸이 내가 항상다니던 골목 전봇대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 캄캄한 골목에서 나란히 앉아 막내는 언니무릎에 누워 잠들어 있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듯 아파온다. 못난 아비라도 옆에있었으면 그 아이들이 그렇게 불쌍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큰 애가울면서 "하루종일 동생들이 엄마만 찾으니 하루만이라도 장사를 나가지 않으면안되느냐"고 했지만 하루벌어 하루먹는 생활이라 그 어린것 소원하나 못들어줄형편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장사를 하다보니 경험도 쌓이고 장사도 제법 잘돼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때였다. 기침이 계속 나고 몸도 너무 아프고 해서 감기약을 계속 사먹었다. 그래도 낫지않고 점점 더 심해 하는 수 없이 병원을 찾아갔더니 폐병 2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가 큰 병은 아니니 몸을 편안히 하고 1년동안 약을 먹으면 완쾌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장사를 안나가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할것이며 설사 누가 잠시 맡아준다해도 약값은 어디 있나싶어 정말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여자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운명이라 할지라도 나한테 병까지 주어진다는 것은 너무 심한시련이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살 길이 없는터라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계속 장사를다녔다. 그러다 결국엔 몸져누웠다. 이러다가 저 어린것들만 남기고 죽는게 아닌가싶기도 하고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싶기도 해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철모르는 둘째와 셋째는 내가 집에 있는것만으로도 좋아서 옆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열한살 된 큰딸은 어린 마음에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내손을 잡으며하는 말이 "지금은 너무 어려 동생들을 잘 보살필 수가 없으니 국민학교 6학년이 될때까지만 죽지말고살아달라"고 애원했다. 눈물을 억지로 참았지만 딸아이가 얼마나 대견하고 믿음직했던지.
이런 내딸을 두고 죽고싶다 생각한 것이 부끄러워 빨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보건소에서 약을 타와 먹고 억지로 기운을 차려 일어났다. 매일 약을 한줌씩 먹고는 장사를 계속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어나갔다.
혹시 아이들에 병을 옮기지나 않을까하여 다달이 보건소에 데려가 검사를 받게했다. 1년이면 낫는다는 병이 몸을 너무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꼬박 6년간약을 먹어야했다.
남편이 집을 나간지 약 5년이 지난 어느날, 시집 조카가 남편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부산에서 어느 과부와 살림을 차려 살고 있다고 했다. 그말을 듣고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마 며칠간은 내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하기도 하고 남편을 죽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것보다는 저렇게라도 살아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잊으려고 애를 썼다.
그로부터 한2년쯤 지났을까, 또 소식이 왔다.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여자라면 다 그러하듯이 그 심정을 어떻게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다른건 다 참을수 있다지만 명절날 그 여자가 보란듯이 아들을 안고 남편과나란히 큰댁을 드나들 때는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아들도 하나 못낳는 여자가 아직도 할 말이 있나, 애들은 도대체 어떻게 키웠길래, 어미가 얼마나 욕을 했길래 아버지를 보고도 반가워하지 않느냐"고 다그쳐 기가 막혔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더 미웠다. 남편도 없는 큰댁, 인연을 끊고 살고 싶었지만 그래도 애들큰집인데 싶어 명절전날이나 시부모 제사에 한번도 빠짐없이 조금이나마 애들편에 돈을 부쳤고 명절아침엔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갔다.누구보다도 큰댁식구가 이때까지 살아온 우리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누구하나 남편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편을 들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하지만 모두들 너무 야속했다.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고 싶었지만 아이들을보고 꾹 참았다. 그곳에 더이상 있을 필요가 없어 다음부터는 다시 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애들을 데리고 나와버렸다. 하지만 막상 명절이 되면 가기싫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남편에게 보냈다. 나하고는 끝난 인연이라지만 아이들과아버지의 연을 내가 끊을 수 없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이렇게 사는 내가 이웃사람들에겐 어리석게 보였던지 아이들을 고아원에 데려다주든지 아버지에게 데려다주든지 하고 새출발을 하라는 사람들이 많았다.잠시나마 마음에 갈등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힘드는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이상한 헛소문이 나돌거나 여자 혼자 산다고 무시당할땐 정말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혼자 잘 살겠다고 어찌 자식을 버릴 수 있으며 또 아버지에게 데려다준다해도 아들이 세상에서 최고인줄 아는 남편에게 딸들의 장래를 맡길 수는없었다. 마음 약해질까봐 모든 일을 잊어버리려고 더욱 바쁘게 살았다. 아이들이 점점 커갔을때 방이 비좁은 것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는데 비가 오면 세숫대야, 양동이를 이리저리 받쳐야했고 추운 겨울이면 너무 추워 밤마다 플라스틱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하나씩 안고 잠들게 하는 것이 정말 마음 아팠다.그간 좀 모아놓은 돈과 애들 외삼촌에게서 빌린 돈으로 비가 새지않는 조금 큰방 하나로 이사를 했다. 덕분에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살아야했지만 다행히 장사가 좀 잘 되고 자리도 어느정도 잡혀 돈을 좀 벌었다.
하지만 큰딸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야하고 둘째가 중학생이될텐데 어떻게 학비를 마련해야하나 고민이었다. 이런 엄마의 사정을 알고 있는 큰딸이 스스로 야간고등학교에 가서 학비를 혼자 해결하겠다고 했을때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른다. 둘째딸이중학교를 졸업하던때 언니와 똑같은 말을 했다. 이제 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취직해서 돈을 벌면 학비걱정은 하지않아도 되니 주간을 가라고 했지만 언제까지 비좁은 단칸방에서 살거냐며 자기걱정은 하지말라고 했다.
장사하느라 엄마의 정을 제대로 줘보지도 못한채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다보니 딸들의 소풍,입학식,운동회 어디에든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엄마를 이해하고 원망하지 않아 고맙기만 했다.
저금통장에 점차 돈이불어나면서 조금 한숨을 돌릴무렵 고등학교에 다니던둘째딸이 갑자기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살면서 가장 염려되던 것이 제대로정을 받지못하고 자란 딸들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는데 불길한 예감이들었다. 사춘기라 그러려니 하고 애써 스스로를 달랬지만 점점 날이 가면 갈수록 늦게 집에 들어오고 때로는 술에 취해 들어오더니 결국은 학교까지도 그만두었다.
착하던 딸이 말로만 듣던 불량청소년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모든게 내탓이라 생각하고 딸의 마음을 잡으려온갖 애를 썼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마침내 가출까지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친구집이나 갈만할 곳은 다 가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살림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을때와는 비교도 되지않을만큼 고통스러웠다. 죽을 고생을 한 내게 돌아온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 딸이잘못되면 어쩌나싶어 며칠을 몸져 누웠다. 다시 기운을 차려 수소문한 끝에 딸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집에 가자고 하니, 독립하고 싶으니 절대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겨우 달래서 집에 데려다놓고 타일러봤지만 걷잡을 수가 없었다. 통금에 걸려 파출소 신세를 지기 일쑤였고 집에 붙어있는 적이 별로 없었다.
방황하기를 2년여.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공부가 하고싶으니 학교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학교에 다니기시작했는데 채 한달도 안돼 또 그만두었다. 딸 하나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포기하기에는 이 어미의 잘못이 크다싶어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정성껏 대해주었다.
이런 나의 노력에 마침내 딸이항복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하면서 공장에 취직해 열심히 일할테니 엄마도 좀 쉬어가면서 장사를 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단칸방신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쉴 수가 없었다. 골병이들었는지 몸이 자주 아팠지만 두 아이가벌어 보태면서 저금통장이 불어가는재미로 쇳덩이처럼 일을했다. 그래서 드디어 방2칸의 전세로 이사하게 됐다.잘먹지도 못한 딸들이 어미를도운다고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생각끝에큰딸은 힘이 별로 들지않는 미싱자수를, 둘째는 이종사촌 오빠집에서 자개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적성에 맞았는지 손재주가 있는 두딸은 기술을 빨리 배웠고열심히들 일을했다. 큰딸은 남의 집에서 일하다 혼자하겠다며 미싱을 한대사달라고 해서 내집마련 저금통장의 돈을 줄여 한대를 사주었다. 두배이상 수입이 많았다. 장사에 뼈가 굵은 나도 열심히 돈을 벌었고 둘째도 기술자가 돼제법 수입이 좋았다. 여유있는 돈은 믿을만한 곳에 이자를 놓아 그 돈으로생활하면서 우리 세사람이 버는 돈은 내집마련 저금통장에 차곡차곡 쌓았다.큰딸이 26세 되던해 시집을 보냈다. 결혼식장에 반갑지 않은 남편과 그 여자가 함께 나타났다. 남편은 딸의 손을 잡고 신랑에게 데려다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자신도 사람이라면 아마 양심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고나니어릴때부터 이때까지 고생만 시키고 남들같이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한 것이 너무 가슴아팠다.
남편에 대해 모든걸 잊고 살던 어느날, 부산에서 소식이 왔다. 남편이 중풍에 걸려 누워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부산에 한번 내려와 달라고 했다.천벌을받았구나 생각하면서도 가엾은 마음도 들었다. 우리모녀에게 한 짓을생각하면 동정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남편이라고 처음으로 부산에 찾아갔다. 젊을때는 혼자 잘도 살더니 늙고병드니 나밖에 찾을 사람이없더냐고 누워있는 남편에게 막 퍼부었다.
그렇게 큰소리만 치고 뻔뻔스럽던 남편은 발음도 분명치 않은 말로 "그동안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 한마디말로 어떻게 그 긴 세월의 고통과한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만 눈물을 흘리는 남편한테 더이상 심한 말을 할 수도없었다.
또한 나야 중매로 속아서 시집왔지만 그 여자는 자신이 스스로 택한 남자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듯기가 죽어있어 같은 여자로서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모든 것이 용서가 되어지는걸 보면 나도 많이 늙었나보다.그후 3년뒤 내집마련의 돈은 어느정도 모여졌는데 이번엔 몸이 말을 듣지않았다. 하루 장사나가면 이틀을아파 누워있었다. 딸들의 성화에 장사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두딸이 시집갈때까지만이라도 집에 놀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일당을 주는 식당에 일하러 갔다.
어느날 결혼은 죽어도하지않겠다던 둘째딸이 27세의 나이에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엉뚱한 짓말고 시집이나 가라고 했더니 부산하게 이리저리 헌책을구해와서는 정말 공부를 시작했다. 덩달아 막내는 미용기술을 배우겠다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시집갈 나이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결혼을 강요하기는 싫었다. 특히 중매결혼은 절대 시키기 싫었다. 둘다 열심히 하더니 둘째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막내는 2급미용기술 자격증을 땄다. 둘째는 공부에 미련이 남았던지 대학시험까지 치겠다고 했다.
하루 10시간씩 일을 하고 밤에는 졸면서 늦게까지 공부하는 모습이 딱해 기왕 시작했으면 시험일까지는 일을 그만두라고 했더니 어렸을때 방황했던 시간을 메우기 위해선 24시간을 48시간으로 늘려 써야하고 내집마련을 위해 어렵게 모은 돈을 조금이라도 축낼 수 없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다음해 남들은 정규고등학교를 나오고도 재수를 해야 합격한다는 대학에학원 한번 가보지 않은 둘째가 당당하게 합격을 했다. 아들 열 가진 부모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딸이 29세의 나이로 대학에 입학하던 날 딸 셋 키울동안학교라고는 처음으로 가봤다. 그때의 기쁨이란 그간의 아픈 세월을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듬해 기다리고 기다렸던 내집마련의 기회가 왔고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힘든 일을 해도 하나도 힘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늦게 대학에 들어간 딸은 공부를 잘해 장학금도 받고 방학때는 가지고 있던 기술로 일을 했으며, 평소에도아르바이트를 해서 오히려 생활비를 도왔다. 막내도 일류미용사가 돼 상당한월급을 받았다.
마침내 1994년 10월 아파트 내집으로 이사를 왔다. 결혼후 34년이란 세월은길고도 먼 세월이었다. 그때의 기쁨과 행복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이사오던 날 우리 네 모녀는 그동안의 슬펐던 일, 기뻤던 일 등을 밤새는 줄모르고 이야기를 하며 보냈다. 이게 꿈은 아닌가싶어 며칠밤을 잠을 못이루었다. 지금은 늙고 병들어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지탱하기 어렵지만 지금죽는다해도 무슨 미련이 있을까.
이제 35살인 큰 딸은 두 아들의 엄마가 돼 행복하게 살고 있고 사위는 맏아들노릇을 대신하고 있다. 한때 말썽을 부렸던 둘째는 이제 32살의 대학졸업반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29살의 셋째는 미용업계에서 최고가 되겠다며 피부미용까지 배우고 있다. 이제 더이상 바랄 것이 없지만 욕심을 내자면 둘째와 셋째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때까지만이라도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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