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긱회취재 시리즈-중일전쟁 발발

중국 본토나 만주에서의 앞서와 같은 항일 활동들은 그러나 자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준의 것이 되지 못했음은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최소한 중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여 주거나 미국이나 소련이 싸움을 시작해 줘야 근본적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 운동가들도그러한 국면전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이나 소련은 커녕 중국 조차 일본과전쟁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특히 중국은 27년도의 장개석 쿠데타로인한 국민당과 공산당 분열 이후 두세력 간의 싸움에만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기 중국 영공에

장개석 총통은 27년도에 남경을 수도로 해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한 이후공산주의자 박멸에 들어갔으며, 공산 세력은 이에 맞서 광주-남창봉기 등을거쳐 바로 그해부터 독자적 관할 영토만들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중국본토에는 국민당 정부 지배 지역과 공산당 지배 지역이 따로따로 만들어졌던것이다. 그런 다음엔 공산당 지역에 대한 국민당의 군사 공격이 그 뒤 10년간 이어졌고, 이것이 그사이 중국이 한 일의 전부였던 것이다. 일본이 32년도에 만주를 먹어 들어와도 공산세력 박멸이 더 급하다 며 그냥 놔두고만있던 것이 당시 국민당 정부의 정책일정도였다. 이런 틈새를 이용해 일본은만주만 먹은 것이 아니라 34년도부터는 중국본토에 대한 공작에도 착수, 북경 이남의 화북지역까지 일본 공군기들이 제 하늘같이 날아다니기도 했다.장개석총통의 공산세력 박멸 정책은 34년도 쯤에는 거의 성공하는 듯 하기도 했다 살뢸중남부 지역에 있던 공산당 지배 지역을 거의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땅을 빼앗긴 공산세력은 소위 대장정 을 통해 본토 북부지역의연안 일대로 옮겨 갔다.

모택동이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한 것도 이 과정을 통해서였다.중국이 이러고 있으니, 우리의 항일 전선도 활기를 띠기 힘들었다. 이미일본의 지배하에 들어 간 만주 지역에서중국 공산당 지도의 항일연군들이활동하고, 우리운동가들 역시 그것에 가담해 싸움을 하고 있기는 했으나, 중국 정부 자체가 가만있으니, 한마디로 몸체는 안움직이고 손가락 발가락만꼼짝거리는 형국이었다. 또형국이 그러하니 본토에 있는 임시정부 계열의 활동도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일단 전기를 가져다 준 것이 중국판 12 2 사태였다. 소위서안사변 이라는 것이 그것이다.36년12월에 국민당 소속 일부 군벌들이 서안에서 공산세력 토벌을 독려 중이던 장개석을 붙잡아 다시 공산군과 연합하는 것은 물론 결과적으로는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토록 한 것이었다. 당시 장개석은 공산세력 근거지인 연안에서 가까운 서안에 도착, 양귀비의 궁이었던화청궁에 머물다 사변을 당했다.사변이 일어나자 연안에서 집중 공격을 당하고 있던 공산세력의 리더인 주은래 등은 즉시 서안으로 날아가 두번째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2차국공 합작

중국의 이러한 상황 변화는 이제 중국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할 여건이 만들어졌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일전쟁은 다음해인 37년7월드디어 개시됐다. 더욱이 3년뒤인 40년도에는 미국-일본전쟁(태평양전쟁)도시작돼 기대가 모두 실현되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우리 독립운동계는 본격적 활동을 모색했다. 임시정부측은 군사위원회 를 설치, 장교를 양성해 1개 연대 규모 군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웠다. 또다른 운동세력이던 약산 김원봉 중심의 민족혁명당은 중국정부와의 협조 아래 청년들에 대한 군사 훈련을 또다시 시도했다. 8월30일에청년 1백여명을 강서성 성자현에 있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소시킨 것이다.

이러한 두 세력의 대응 중 임시정부측의 것은 그러나 불발로 끝났다. 본격적인 항일운동보다는 망명도생하는 일부터 해야 할 형편이 됐기 때문이었다.그것은 3년여간에 걸치는 길고 고난 찬 피난을 의미했다. 이미 상당수 군 간부 인력을 중국군 사관학교를 이용해 양성해 놨지만, 이를 조직해 군대로 만드는 일은 더 뒷날의 일로 미뤄지는 것이다.

임정 요인 등의 피난은 일본군의 재빠른 남경 점령 때문이었다. 당시 임정은 중국정부수도이던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수도라는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남경은 일본군의 최우선 공격 대상이 됐던 것이다. 이 시리즈 첫회분에서 남경의 대학살을 얘기했었지만, 남경이 중국의 수도였기에 일본군의 만행은 더 심했다. 중국 정부는 12월13일에 남경을 포기했다. 전쟁 발발 5개월만에 일본군에 점령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중경으로수도를 옮겨 갔다.

직선거리 8백㎞

임시정부측이 남경을 떠난 것은 11월17일이었다. 목적지는 호남성 장사.남경에서 직선거리로 약 8백㎞쯤 돼 보이는 장사를 피난지로 택한 것에 대해백범선생은 그의 일지 에서 물가가 싸서 라고 적고 있다. 함께 떠나야 하는 요인과 가족등의 인원이 1백명이나 되니 물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모양이었다.

장사에는 12월20일에 도착했다. 한달이 넘게 걸린 이 피난길에 대해서는백강 조경한선생의 백강회고록 이 더 자세히 증언하고 있다. 백강은 당시37세로, 10년전 북경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33세때 낙양군관학교로의 만주세력남하 때 본토로 복귀, 임정측과 함께 행동하고있었다.

임정인사 모두가 꼭같은 경로를 거친 것은 아니지만, 거의는 백강이 증언한 길을 밟았다.

회고록에 의하면 일행은 중국정부에서 제공한 배편으로 무한까지 양자강을거슬러 올라간 뒤 그 유명한 동정호를 거쳐 다른 물길로 장사로 향했던 것이다. 취재팀은 남경에서 공로 4백80㎞라는 무한까지 1시간20분간 프로펠러 여객기로 비행한 후 다시 열차로 6시간을 달려 장사에 도착했었다. 그 먼길을불편하기 그지없을 배편으로 피난했던 항일지사들의 고난이 새삼스러웠다.임정측은 다음해인 38년7월 또다시 피난길에 나서기까지 이곳 장사에서 7개월을 생활했다.

중국과 미국 교포들이 돈을 보내 줘 생활은 그럭저럭 꾸려 나갔다고 백범은 적고 있다. 백범 개인적으로는 이곳에 와서야 김구 라는 본명을 처음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외에 김원봉 계열에 반발하는 3개 정당의 요인들이 거의 이곳에서 함께생활했다. 조선혁명당의 이청천-유동열-최동오-김학규-황학수-현익철선생,한국독립당의 조소앙-홍진선생, 백범이 소속된 한국국민당의 이동녕-이시영-조완구-차이석-엄항섭-안공근-조성환선생 등등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만한독립운동계의 거목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아파트단지 변해

임정 임시 청사 당시 주소는 장사시 서구 서원북리6호. 상태로 남쪽 골목이자 3층짜리 제4중학 담 북쪽에 인접한 곳이었다. 그러나 일대는 이미 아파트단지로 변해 있었다. 지은지 15년은 됐음직한 6층짜리였다. 현재의 서원북리2호 4동아파트 자리가 당시 임정청사가 있던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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