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병장 류창식선생 사후 83년만의 포장

사진조차 남아있지않은 고조할아버지. 83년전 돌아가신 만산 유창식선생(1858 ~1912)이 광복 50주년에 생전의 의병활동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 할아버지의 포장을 가슴에 안은 현손 유동철군(21·영남대 법대2)은이제사 역사가 무엇인지, 민족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것 같다고 말한다.중학 1년때 이육사의 손자와 친구였던 유군은 그의 집에서 훈장을 보고부러웠다며 "이젠 친구들에게도 선조들의 항일투쟁을 자랑하고 나 스스로도그 정신을 이어가기위해 노력할것"이라고 다짐한다.유군 집안은 만산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만산의 사촌동생인 동산유인식선생 (82년 건국훈장국민장)과 6·10만세운동의 주역 야호 유면희선생(대통령표창), 중경 임정의 국무위원이었던 단주 유림선생(62년 건국훈장국민장)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됐다. 이번 광복절에도 파리만국회의에 유림단의 독립청원서를 낸 서파 유필영선생과 선원재 유정희선생이 만산선생과함께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의 고조할아버지 만산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5백년 종사가망해도 삼천리 강역에 의사 한사람도 없단말인가"라며 '일본을 치자'는 격문을 돌리고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장이 된다. 38세때의 일이다. 유군의아버지 유종환씨(55·대구시수성구시지동)는 만산선생의 기골이 장대했었다며 그때 신었던 큼직한 가죽신을 내보인다. 11년간 의병활동을 펴다 일경에검거돼 모진 옥고도 치렀다.

1907년엔 안동에 협동학교를 창설,학감이 돼 민족교육사업을 펼치다 3년만에 폐쇄령이 내려지자 "일제의 간섭이 없는곳에서 우리민족에 의한 민족교육을 실시한다"는 계획으로 만주로 망명한다. 그러나 망명도중 동지들과 문중의 이주처를 마련해놓고는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56세를 일기로 영주 풍기읍에서 숨을 거둔다.

경북 안동시 예안면삼산리. 면소재지서도 시오리는 좋이 되는 산촌에서 선조들은 바람앞의 등불같은 조국의 명운을 일으켜세우고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정작 책임져야 할 정치인들이 모두 몸사리던 당시 산골의 백면서생이 항일구국에 앞장선 겁니다. 광복50주년, 을미사변부터 이제 한세기가 지나가는 시점에서 아직도 우리는 남북이 분단돼 진정한 광복을 못이루고있습니다. 이 지루한 전쟁을 이젠 끝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선조들의 항쟁사만 들추기보다는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사의 지평을 열어야 합니다"류종환씨는 말한다.

신세대 류동철군도 "세대가 달라지면서 생각도 달라졌으나 선조들이 목숨으로 지켜낸 우리의 역사를 더욱 찬연히 이어가야 할 책임만은 우리들의 몫"이라 고 다짐한다. 보훈혜택이 3대까지만 해당돼 만산선생의 포상을 대신받은 5대손 동철군은 실질적 혜택이 없지만 그래서 그 뜻을 더욱 소중히 잇겠다고 말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