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최초로 여성이 설립한 복명국교(대구시 중구 남산2동630)의 설립자가관기였다는 사실이 광복 50년을 맞아 뒤늦게 밝혀져 교육계에 화제를 뿌리고있다.그 설립자는 조선말 관기 향이라 불리던 '여걸 김울산여사'. 지금도 이 학교 교정 한켠에는 김여사의 석상이 무관심속에 남아 있다. 단아한 몸집과 날카로운 눈매가 당시를 풍미했던 예인(예인)으로만 보기에는 범상치 않다.광복을 한해 앞둔 1944년 87세의 일기로 눈을 감은 김여사는 조선여성의 교육과 일제 압박에서 국권을 되찾고자 하는열망이 누구보다 강했던 여성이었다. 지난 25년 경영난에 허덕이던 일신여학교 (순종의 하사금으로 설립)를인수, 서슬 퍼렀던 일제의 총칼속에서도 교명을 '광복'을 뜻하는 복명으로바꾼 것도 이러한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 이 학교만으로는 가슴의 응어리를못다푼 김여사는 복명에 부설 유치원 2개반까지 설립, 그 이름을 김강조와백두조라 했다.민족광복의 염원과도 같은 금강산과 백두산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개교한 근대학교들은 거의 선교사가 세웠거나 일본인들이 저들 자녀교육을 위해 세운 것이라면 복명은 명실상부한 조선인의 긍지와 애국열망으로 세워졌다. 더욱이 그것이 여성, 특히 기생신분에 의해 설립된 것이라는데더욱 큰 의미를 담고 있다.
1927년 아미산(현 천주교 관덕정 순교기념관 주위) 언덕 위에 벽돌 2층 교사를 신축할때 김여사가 재단에 내놓은 재산은 총 8만원(당시 쌀80㎏ 20원).당시 학교건축비만도 3만5천원이었으니 출연재산의 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있다.
관기출신으로 어떻게 이 많은 재산을 모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다만 외손인 최진형씨(76·전 의성 오류국교교장)는 "정미소와 술집을 운영해 돈을 모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만 말했다. 흥선대원군과 가깝게 지내면서하사받은 땅이 상당했다는 것은 풍문으로만 전해오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통정대부 김철보였다는 것이 소문을 더욱 신빙성 있게 해준다. 당시 땅문서만하더라도 한 궤짝은 됐다는 것이다.
나이 70에 전재산을 복명재단에 희사한 뒤 김여사는 횡정(현 대구 동산파출소 동쪽)집에서 여생을 정리했다. 현재 복명국교 교정에 위치한 김여사 석상은 당초 좌상 전신 동상이었으나 지난 42년 일제에 공출되자 해방후 단출한 석재흉상으로 새로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광복 50주년을 맞아 이 석상은 교육에 바친 그녀의 열정으로 인해어떤 우람한 상징물보다 큰 거상으로 오늘의 교육계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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