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주도 인간상**16·17세기의 세계는 돈키호테적 인간상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비합리적인방법이나마 불굴의 도전을 하는 돈키호테적 인간상이 근대초기 유럽의 세계진출의 주인공들이었다. 17세기 후반이래 19세기 전기까지의 세계는 로빈슨 크루소적인 인간상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그는 독립된 개인이었고 또다른 독립된 개인을 만나 계약을 통하여 합리적인 원리위에근대시민사회를 열었다. 19세기 후기이래 20세기의 세계는 카우보이적 인간상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카우보이는 돈키호테처럼 외부세계에 대하여 도전적이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개인적이고 한걸음 나아가 합리적, 기계적이었다.
20세기 후반 세계사의 가장 큰 사건은 소련의 등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의 등장인지 모른다. 사무라이는 공동체에서 뛰쳐나온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 강화하는 지배자이다. 따라서 사무라이 자본주의는 안으로시민사회의 미성숙과 밖으로 세계경제의 불균형을 매개하고 있다.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떠한 인간상에 의하여 주도되어야 할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나는 흥부적 인간상이라고 하고싶다. 흥부적 인간상이란무엇인가.
우리는 1960년대 후반 흥부비판에 열을 올린 적이 있다. 자기가 찾아야 할재산도 지키지 못한 '권리 위에 잠자는 자'요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수많은자식을 낳아 헤아릴수 없이 고생시킨 무책임한 가장이며, 끝내 스스로 문제해결을 못하고 우연히 타율적, 신비적으로 부자가 된 자이니 어느 한구석 배울 데라고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근대주의적 흥부비판에 당시 상당한호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국문학 쪽과 교육학 쪽에서 흥부비판 논문이 나온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근대주의에 대한 회의가 일면서 흥부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더구나 놀부로 상징되는 상속적 부, 그리고 지대적 부가 현실적으로 한국경제의 암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흥부적인 인간상을 재해석해볼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개인적인 사건 하나가 생겼다. 언젠가강의실에 좀 늦게 도착,숨을 헐떡이며 강의를 시작하여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장군의 말을 인용한다는 것이 그만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라'고 해버렸다. 학생들의 폭소소리를 듣고서야 실수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다음순간 실수로 잘못한 말의 의미에 스스로 멈칫했다.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라'는 말은 돌조차도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을 살려보라는 기술혁신정신을 가르치는것이다. 그렇다면 '흥부전'에서 흥부가 박을 타니 약도 나오고 쌀도 나오고 비단도 나오고 금도 나오는데, 이것을 혁신의 가능성을 다룬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라'는 것보다 '박 보기를 황금같이 하라'고 하는 것이 훨씬 한국적이고 상징적이다. 물론 흥부전은 선행을 하면 보은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해석이 일반적이지만 그러나 오늘날 모래에서 반도체가 나오고 은행잎에서 '기넥신'이나오는 판국인데 박에서 비단이 나오고 금이 나온다는 상징이 기술혁명의 문제를 문학적 차원에서 다룬 소설이라고 상상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부축적 행위의 결과**
그러나 '흥부전'에는 박에서 약이 나오고 금이 나오는 결과만 나오지 그과정이 없다. 결과의 이노베이션이 아니라 과정의 이노베이션을 상징하는 부분이 아쉬운 것이다. 이한계는 오히려 기회로 역이용할 수 있다. '흥부전'은 청중에 따라 또 판소리 부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내용이 달라져 많은이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문제의식을 가미한 이본이 하나 추가된들 이상할 것 없을 성싶다. 흥부는 모든 한국인의 가슴에 살아있는 영원한 인간상이지만, 그 흥부는 재해석과 이본을 추가하는 형태로 끝없이 재생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흥부가 바다건너 제비왕과도 네트워크형으로 연계되고, 강남갔던 제비가 중국넓은 땅을 두루거쳐 흥부집까지 오는것도, 생각하기에따라서는, 흥부 이노베이션의 국제적 요소라고 볼수 있다.좋은 틀을 벗어나 넓은 국제적 시야를 펼쳐보여주고 있다.
흥부는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는 혁신적 인간상이면서 다시 '황금을 보기를돌같이 하는' 부유형 인간상이다. 흥부는 부모로부터의 상속적 부를 물려받았을 때 그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흥부전'의 표현처럼 '춘하추동사시절에 남의 일만 모두다 하는 고로 제벌이를 할 수가 없네'였다. 빈한한시절 온갖 궂은일을 다하지만, 그것 또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것이었지부의 축적이 목적이 아니었다. 제비와의 인연으로 박씨를 얻어 부자가 되었지만 부의 축적은 행위의 결과이지 행위의 동기가 아니었다. 부자가 된 후에도 제일먼저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아 흥부집으로 들어오소 나도 오늘부터기민을 헐란다'고 선언하고 아울러 놀부적 인간상을 초청하여 재산을 나누어가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를 축적한 노하우도 전부 가르쳐준다. 무소유란가난해서 가지려야 가질 것도 없는 것을 포함하지만 부유는 가질 것이 있어도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 흥부는 그러한 인간유형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21세기 세계 자본주의는 이러한 흥부적 인간상에 의하여 주도되어야하지 않을까.
흥부는 일종의 환경인이기도 하다. 흥부는 동네청소는 도맡아 하고 있지만그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환경사상의 궁극적인 도달점의 하나는 동물과 식물의 생존권을 인정하는 광역인권개념이다. '짐승살해를 아니하니 미륵이 벗이로다'는 흥부는 제비를 먹으려는 구렁이를 쫓아내되 죽이지는 않는다. 다리부러진 제비새끼를 자식처럼 돌봐주며 박씨 심어 박을 키우는 정성 또한 가족사랑의 경지이다. 그는 제비며 박과 인격적 교류를 하는 환경인의 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쓰레기 보기를 황금같이 하라'는 환경구호도 실은 흥부전의 재해석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흥부적 인간상은 인간성의회복과 자연의 회복과 기술혁신,그리고 화해의 정신을 통합한 모델을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신흥부전은 이러한 모델을 좀더 완벽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놀부형 자본주의 포용**
가진 것을 다 뺏기고 내쫓겨 최저변을 헤매는 흥부상은 4강에 밀리고 사무라이 자본주의에 쫓기고, 독재와 독과점에 박탈당하고, 환경파괴에 시달리는우리민족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러한 흥부가 밝은 휴머니티를 안고생태환경을 존경하며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혁신적 부를 이루면서 자신을 괴롭혀온 놀부형 자본주의를 껴안아 흥부적 질서속에 포섭해 가는 드라마는 우리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최근 남원땅 흥부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나는 어쩐지 지나간 역사의 흔적이 아니라 21세기 새역사의 입구에서있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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